제 4편..
1945년 8월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88여단 요원들은 각기 중국과 조선으로 향하게 된다. 이민 여사는 조선인 동료들과 헤어져 제1진으로 남편 진뢰와 함께 하바로프스크를 떠났다. 일제가 항복한 뒤 조선인 동료들은 대부분 조국으로 돌아가고, 주보중이 특별히 지명한 몇몇 조선인 동료들은 중국 내전에도 참가한다. 진뢰 부부는 하얼빈으로 갔고 그곳에서 공산당원으로 내전에 참여하는 등 활약한다. 중국공산당이 승리한 뒤 진뢰는 흑룡강성 성장을 오래 지내면서 중국 동북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된다.
그러나 중국이 문화혁명 등 대란에 휩싸일 때마다 진뢰-이민 부부도 노선투쟁에 휘말려 숱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가장 고생스러웠던 것이 문화혁명 때다. 이때 많은 사람이 갖가지 죄목으로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갔는데 진뢰 역시 반혁명분자, 주자파, 특무라는 올가미를 쓰고 꼬박 7년간 옥살이를 했다고 한다. 지주집안 출신으로 대학을 다닌 인텔리인데다 강청 등의 소위 ‘4인방’과 노선이 달라 홍위병들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민 여사 역시 진뢰의 부인인데다 조선족이라는 점 때문에 ‘조선 특무’라는 혐의를 쓰고 5년동안 감옥에 갇혀 사는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그는 토굴에 갇혀 지낸 세월이 너무도 고통스러웠다고 회상한다. 당시 홍위병들은 북한 김일성을 비판하는 등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문혁기간 내내 조선족이 고통을 많이 겪었다.
진뢰·이민 부부는 광복 후 김일성의 초청으로 1983년과 1992년 평양을 방문해 각별한 환대를 받았다. 83년 9월 흑룡강성 친선대표단을 이끌고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은 일행을 접견해 오전 내내 항일투쟁하던 시절 이야기를 나누고, 중국에 살고 있는 동료들의 안부를 일일이 물으면서 극진히 대접했다. 김일성은 의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축배까지 들었다고 한다.
92년 4월 김일성의 80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축하단을 이끌고 방북했을 때도 하바로프스크 시절 함께 생활하던 동지들 중에서 살아있는 여대원들을 모두 모이게 해서 이민과 만나게 해주었다. 평양 청류관에서 만났는데 김옥순, 박경숙, 박경옥, 리영숙, 리숙정 등 당시 동지들은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이민은 회고한다. 남자 동지들은 술 담배 때문에 일찍 죽었으나 여대원들은 대부분 살아 있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김일성을 우상화하면서 항일투쟁역사를 철저히 김일성 중심으로 왜곡하고, 특히 중국공산당 휘하에서 활동한 동북항일연군 시절의 투쟁을 조선혁명군의 독자적 투쟁으로 강변하는 북한에서, 김일성이 자신의 내력을 너무도 잘 아는 진뢰-이민 부부를 환대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주민들에게 학습시키는 공식적인 역사와 지도자의 개인적 만남은 별개인 것일까.
이에 앞서 진뢰-이민 부부는 1964년 김일성이 중국 동북지구를 방문할 때 하얼빈에서 주은래 총리와 함께 영접한 적이 있었다. 1945년 하바로프스크에서 헤어진 뒤 19년 만의 만남이었다.
김일성사망 때 만난 김정일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을 때 진뢰·이민 부부는 하얼빈에서 승용차를 타고 평양까지 조문하러 갔다. 김일성 사망 소식을 듣고 하얼빈 혁명기념관에 조문소를 차려 조선족들이 조문을 하게 했는데, 뒤늦게 조문방문 요청이 승인되어 18시간을 줄곧 달린 끝에 평양에 도착했다.
7월20일 장례추도대회가 끝난 직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면담한다고 해서 추도대회장인 김일성광장 휴게실에서 그를 만났다. 깊은 조의를 표하자 김정일은 감사하다면서 앞으로도 예전처럼 자주 방문해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이민 여사는 자신도 모르게 김정일의 손을 잡아 자신의 뺨에 갖다대는 무례를 범했는데, 그 옛날 김정숙 동지의 얼굴과 함께 어릴 적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고 술회한다.
김정일은 그때까지 외국 사절을 접견하면서 사진을 공개한 적이 없는데 진뢰 부부 접견사진은 이례적으로 로동신문에 공개됐다. 이날 김정일은 진뢰 부부를 만나고, 이어 이탈리아 국제관계 연구소 총서기 장 카를로 엘리아 바롤리를 접견했는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정일동지가 이들을 접견했다는 기사와 함께 접견사진이 1994년 7월21일자 로동신문에 실려 있다.
진뢰 부부는 1998년 9월 공화국 창건 50돌에 다시 초청을 받아 27일간 북한에 머물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계속 지방을 순시하는데 평양에 오면 특별면담을 할테니 기다리라고 해서 하루이틀 있다보니 한 달이 됐다는 것. 그 사이 옛날 하바로프스크 시절 동지들도 만나고, 금강산과 묘향산, 개성 등 각지를 구경했으며, 이민 여사 부모의 고향인 황해북도 은파군 양동리도 방문했다.
이민 여사가 한국을 방문하기까지에는 이런 저런 마음쓰임이 많았을 것이다. 김일성 부자와 특별한 관계라는 것이 한국행을 오히려 더디게 했을 것이다. 그는 한국의 발전상에 대해 많이 듣고 텔레비전을 통해서도 보았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까 훨씬 화려하고 특히 문화시설과 위생시설이 훌륭하다고 말했다. 세계 각국에서 비정부기구 대표단이 참가한 서울 NGO대회도 인상이 깊었을 것이다.
항일운동사 보완에 소중한 내용들
호텔 음식점에서의 짧은 만남만으로는 이민 여사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나 한국방문 느낌을 충분히 들을 수 없었다. 특히 그의 개인사는 우리 역사에서 소홀히 다루거나 왜곡해서 전하는 1930∼1940년대의 내용을 보완하는데 적지 않은 보탬이 될 것이 분명했다. 새로 들을 이야기도 많고 확인할 내용도 많았다. 항일운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글 가운데 몇몇 부분은 사실과 다르고 몇몇 부분은 충분히 기술되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필자는 일정이 빡빡한 이민 여사를 졸라서 한번 더 만나자고 요청했다. 그래서 이민 여사와 김우종 교수가 김성훈 농림부 장관의 배려로 한국의 농촌을 둘러보고, 한우사육단지와 젖소사육 목장, 축산물 종합처리장(LPC), 미곡종합처리장(RPC) 등을 방문·견학하는 승용차에 동승하게 되었다. 12시간 이상 한 차에 나란히 앉아서 미심쩍은 사항을 물어보고 확인하는 일을 했다.
이민 여사는 가는 곳마다 열심히 설명을 듣고 이것저것 묻기도 하면서 수첩을 꺼내 꼼꼼히 메모했다. 쓴 지가 너무 오래되어 한국말을 거의 잊어버렸지만 최근 공부를 다시 해서 일상적인 말은 조금 알아듣는다고 했다. 나이를 초월하는 그 열정은 놀라웠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 용인 민속촌이었다. 그는 이곳저곳 들르는 곳마다 어릴 적 살던 곳과 똑같다면서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널뛰기를 보고도, 괴나리 봇짐을 보고도, 집 모양이나 헛간 등을 보고도 바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듯 즐거워 했다. 병으로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항일투쟁을 하다 일본군 손에 죽은 아버지나 오빠 생각도 나는 듯 했다.
하루종일 한 승용차로 다니면서도, 그가 답변하기에 난처해 할 것같아 애써 뒤로 돌려 두었던 질문을 헤어질 때 쯤 던져보았다. 북한 동포들의 어려운 식량사정 등을 내쪽에서 먼저 들먹이고 나서, 함께 혁명활동을 했고 특별히 가까운 사이이기도 한데 지금의 어려운 북한사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로서는 답변하기에 매우 곤혹스러운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어서 통일이 돼야 한다. 남북이 함께 잘 살아야 한다. 지난날을 너무 따지기 보다는 민족의 장래를 생각해야 한다”고 우회적으로 대답했다. 그는 남쪽에서나 북쪽에서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역사가 정확히 기술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다면서 역사기록은 정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 이상.. 끝.. 우연이 내용을 읽어보고 거짓이나 왜곡된 말은 아닌것 같아서... 할일도 없고 심심해서 올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