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의 일본육사 출신 8 :김경천(김현충 =김광서=경천 김장군)/백마탄 김일성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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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육사 제23기 김경천[1888-1942. 55세로 소련에서 옥사] [ ] 부분은 한자..삭제됨. 사진들 삭제함..
본명은 김현충[金?忠]이고 독립운동시기에는 김광서[金光瑞]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1909년 육군중앙유년학교[도쿄 소재. 만13-15세의 남자 중에서 육군현역장교 지원자를 선발하여 교육하던 기숙제 교육기간은 3년이었다]를 졸업할 때는 김현충[金?忠]이었고, 육군유년학교 입학자는 당시에 7개의 고등학교나 제국대학을 웃도는 실력을 가진 수재 학생들이었다고 한다. 1909년 12월에 입학한 육군사관학교 재학 중 1910년 8월 한일합방 무렵에 김광서[金光瑞]로 개명했다. 1911년 5월에 740명의 졸업생 중 단 1명의 한국인으로 일본 육사 23기를 졸업했다. 1912년 서울에서의 호적명도 김광서이다. 독립운동 시기에는 김경천[金擎天]이라는 이름을 썼기 때문에 경천 김장군[擎天 金將軍]이라고 불린다. 김경천 장군은 대한제국 최후의 일본 육군사관학교 유학생으로 한일합방 후인 1911년 일제 육군기병중위로 근무하다가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해 주로 시베리아에서 활동했다. 소련 국적을 갖고 있다가 스탈린의 대숙청[볼쇼이 테로르Большой террор/Great Purge=1930년대 소련과 몽골인민공화국 등에서 행해진 대규모의 정치적 숙청사건] 때, 탄압을 받다가 1942년에 옥사했다. 김경천 본인이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쓴 적이 없지만 북의 ‘김일성‘이 38선 이북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설하고 그 주석을 맡자 그의 항일투쟁을 거짓이나 왜곡할 목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독립운동가 ’경천 김장군’을 김일성장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일설에는 일본 육사 54기로 대한민국 공군을 창설한 김정렬이 ‘김경천 장군의 3년 후배인 아버지 김준원[金埈元. 26기]로부터 김광서가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이라고 말을 들었다고 한다. 1888년 6월 5일 함경남도 북청군 출신으로 김해 김씨 무반 집안 출신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서울로 서울에서 자랐다. 일본어 학교인 경성학당에 진학해 일어를 공부했다. 그의 부친도 1895년에 일본에 유학하고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도쿄 공업학교에서 수학하고 도쿄 포병공창에서 총탄 등 무기제작 연수를 받았으며 귀국 후에는 대한제국군 간부여서 아들을 육군사관학교에 유학 보냈다. 1909년 일본유학 1주일 전에 유계준[柳桂俊] 딸인 유정[柳貞. 1892-1971]과 결혼했지만 아내에게 피아노 배울 것을 권하고 단신 유학했다. 1909년에 육군중앙유년학교를 졸업하고 육사 23기생으로 입학했다. 당시 사관학교에 유학했던 한국인들은 김경천 혼자지만 육군유년학교에는 3년 후배로 육사 26기인 홍사익[1887-1946. 일제 육군중장, 필리핀에서 포로학대죄를 저지른 B급 전범으로 처형됨]과 지청천[1887-1957.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역임] 등이 유학했다. 1910년 한일합방에 충격을 받고 탈주하여 항일운동을 하자는 말이 돌았지만 김경천은 지금은 배울 시기라고 하면서 자중을 촉구했다. 1911년 5월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2월에 기병소위로 임관, 육군기병학교로 배치될 무렵에 아내를 불러들여 결혼생활을 했는데 지바[千葉=현재 나리타국제공항이 있는 현] 부근에서 위의 두 딸이 출생했다. 임관 8년 후인 1919년, 기병 제1연대 소속 육군중위로 도쿄에서 근무하고 있다가 이광수 등의 조선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을 접했다. 그는 곧 휴가를 내고는 처자를 동반하고 귀국했다. 서울에서 3·1 독립운동을 앞두고 그는 항일 독립운동 참여를 결심하고 육사 후배인 지청천[제26기]과 함께 국경을 넘어 남만주의 신흥무관학교로 갔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의병투쟁 때부터 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이상룡(李相龍) 등이 설립한 무장독립운동가 양성기관으로 2018년의 흉작으로 폐쇄의 위기에 가까웠으나 일본 육군의 현역 장교였던 김경천과 지청천, 대한제국 군관학교 출신 장교인 신동천 등의 우수한 교관이 들어오면서 순식간에 수백 명의 학생이 모였다. 이 교관을 ‘남만의 3천[三天]’이라고 불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발행한 ’한국정신문화대백과사전‘에는 김경천의 이름이 빠져 있다. 내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전신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이 사전 편찬에 관여한 적이 있어 회고해 보면 아마도 최근 박근혜 정권의 국정교과서 추진세력의 한 뿌리가 그 연구원에 있었기 때문에 소련에서 독립운동을 한 김경천의 이름을 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과 함께 양심적인 편찬자가 ’가짜 김일성장군‘ 설에 김경천 장군이 김일성 장군의 한 모델이 되는 역사적 허구 조작에 끼어들기 싫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양시쌍비론이 든다. 사실 김경천이 이 학교의 교관을 지낸 기간은 6개월 정도에 불과했다. 이미 1920년 초에 그는 하얼빈에 있으면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항일 동지와 연락을 취한 것이 일본 측의 정보자료에 보인다. 그는 1920년 초에 독립 운동의 무대를 시베리아로 옮긴 것이다. [1920. 1.23. ‘高警第一五三五? 秘 ?外情報 不逞鮮人ノ行動(浦潮派遣員報告)「哈爾賓埠頭?十三道街居住金擎天ナル者ヨリ、目下浦潮ニ居住セル元平安南道平??衛隊下士ニシテ暴徒派不逞鮮人金燦五、及元咸鏡南道北??衛隊下士崔元吉、?海牙密使事件ノ張本人李儁ノ?子李鏞等十二名ニ宛テ、陰十二月十五日(陽?二月四日)愈?前進ノ予定ナルヲ以テ各位ハ二十人長トシテ部下ヲ引率シ同日?ニ哈爾賓ニ集合セラレ度シトノ書面ノ?送シ?レリト謂フ’ [기병장교 김경천의 모습]? 북의 ‘김일성’이 가짜이고, ‘진짜 김일성이 김경천’이라는 한국 내 친일잔당들의 주장은 조작된 것이라는 증거가 여기에서도 발견된다. 자세한 것은 후술하는 부분을 참고하기 바란다.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면서 당시 시베리아는 혼란 상태에 빠졌다. 10월 혁명 이후에 프랑스와 영국의 개입으로 시베리아에 있던 프랑스군의 지휘를 받는 체코 군단이 백군[반혁명군]에 가담하면서 일본을 중심으로 한 제1차 세계대전의 연합국이 시베리아에 출병했다. 그러나 대전의 종결에 따라 체코 군단은 전투를 중지하고, 백군도 거의 괴멸해 일본을 제외한 연합군은 모두 철병을 결정했다. 연해주를 중심으로 시베리아에는 고려인이 많았지만 러시아 국적을 가진 기존 이민자뿐만 아니라 항일운동을 전개하던 망명자도 많았다. 그 지도자인 이동휘가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가 되어, 레닌의 민족자결론에 공명했다. 김경천이 시베리아에 넘어가던 시기에는 레닌에게 독립운동자금 원조를 요구하는 지침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만주(간도)와 시베리아의 항일조선인 집단은 적군(赤軍)에 가담하게 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간도와 연해주의 항일세력이 무장투쟁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마침 김경천이 연락을 취한 시기, 간도에서 일어난 강도살인사건을 기화로 블라디보스토크의 고려인 거리인 신한촌에 대한 대규모 단속을 시작했다. [2016년 8월의 블라디보스토크 앞] 김경천은 마침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었으나 단속을 피해서 교외의 산중으로 들어가 블라디보스토크의 동쪽으로 나홋카의 동북에 있는 파르티잔스크[Партизанск] 인근에서 빨치산 부대를 만들어 한창걸[韓昌傑. 연해주 태생의 러시아 국적 고려인으로 제1차 대전에 징병으로 대독전을 경험하고 키에프의 사관학교를 마치고 공산당에 입당해 빨치산 부대를 결성했으나 1930년대에 숙청됨]부대 등과 함께 중국인 마적부대와 교전하고 이를 물리쳤다. 김경천은 마적퇴치로 이름을 날리면서 ‘경천 김 장군’이라 불리게 되었다. 당시의 파르티잔스크 빨치산 연합부대 규모는 300명 정도였지만 김경천은 이를 지휘하여 1921년 봄 무렵, 백군 잔당[콜차크부대]과의 전투를 치렀다. 파르티잔스크는 당시 치안이 매우 문란해서, 김경천은 민생을 정재관(鄭在?)에게 맡겨 군정을 폈다고 한다. 당시, 정재관은 미국에서 한국독립운동을 하다가 헤이그 밀사사건에 연루된 것이 드러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와서 권업회를 설립한 중심인물로, 권업 신문을 창간하는 등의 독립계몽운동을 하고 있었다.
[당시의 신한촌 산비탈에 들어선 러시아인 아파트들]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촌 표지 앞에서] 김경천이 지휘한 빨치산 부대는 눈에 띄게 규율이 높고 군사 조직도 다른 빨치산과 달랐다. 적군 지도자도 ‘이 조선인 부대는 규율, 대의에 전념하고 경애의 모범을 보였다.……조선인들 사이에는 규율에 대한 불복종, 명령 불이행, 술에 만취한 경우를 보지 못했다’고 극찬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전부터 우수리스크의 근교에는 조선인 무장단체로 혈성단[血誠?]이 있었으므로 이를 중심으로 빨치산이 결집해 1921년 초 무렵에 파르티잔스크 고려의병단이 결성되었다. 김경천은 사령관으로 초빙되었고, 이 무렵부터 김경천은 김광서(金光瑞)라는 이름으로 일본 측의 정보보고서에도 등장하게 되는데, 그에 따르면 1922년 중순에 약 600명을 이끌었다고 한다. 1921년부터 1922년까지 김경천은 주로 이만[중국어 伊曼/러시아어 Дальнере?ченск달리네레첸스크 ;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 중간에 있는 시베리아 철도역으로 우수리스크 강에 근접하고 강 건너편은 흑룡강성 호림[虎林]시이다.] 부근을 무대로 적군에 협력해 백군과 전투를 벌였다. 1922년 여름에는 연해주 혁명군사위원회가 김경천을 포시에트[Посьета/英語 Posyet=러시아가 두만강 건너로 북한과 중국에 저하고 있는 국경지대]군구 빨치산 연합부대장에 임명했다고 한다.
당시, 김경천이 시베리아에서 활약한 사실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에서도 활발하게 보도되었다. 1923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는 1페이지를 모두 김경천의 인터뷰 기사로 실었다. 기사에서 김경천은 ‘1922년 1월 2일 이만에서의 전투에서는 사령관의 항복으로 지휘관을 잃은 소비에트 적군을 지휘하여 총알이 빗발치는 속을 백마에 타고 지휘하다가 급기야 이만 점령에 성공했다.’고 한다. 1920년대 한반도의 신문지상에서 가장 많이 보도된 독립운동가는 김경천이었고, 인터뷰 기사까지 실린 것은 그 한 사람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미 이 시기, 만주와 시베리아의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은 분열되고 1921년 6월의 흑하사변[자유시참변. 이 연재글 7참조]에서는 아군끼리 싸움을 벌이다 레닌쪽으로 기운 이동휘가 영향력을 잃었다. 또 1922년 10월 블라디보스토크가 함락됐고 일본은 북 사할린을 제외한 시베리아 전역에서 철수를 완료했다. 백군의 잔당이나 박해를 두려워한 러시아인들은 시베리아를 탈출해 망명길에 나서야 했다. 소련 내전에서 잠정적으로 완충국가로 시베리아에 수립되었던 극동공화국도 무너지고 소비에트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했다 1922년에 러시아 내전이 끝남으로써 소련 정권으로서는 조선인 항일 빨치산의 역할을 재고하게 되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일본과의 관계 수복을 위해서도 독립운동단체의 무장활동을 방치할 수 없게 되었다. 김경천은 무장독립투쟁의 지속을 원하여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했다. 그러나 지도자의 대립으로 임시정부가 분열하고 시베리아의 고려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세력만이 남아 조선공화국을 자처하는 조직이 됐다. 조선공화국 국무 위원에 지청천이 있어 김경천도 이를 지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3년 8월 말, 조선공화국의 조직은 소련정부의 비호를 기대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면서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코민테른의 승인을 기다렸다. 하지만, 1924년 코민테른은 승인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응답하고 추방을 원하여 조직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김경천은 시베리아에 남는 것을 선택해, 지청천과 삶의 길이 엇갈렸다. 1925년, 매일신보는 "김광서는 망명운동가들을 이끌고, 공산주의자들과 결별했다‘고 보도했지만, 이는 오보였다. 요새 말로 가짜뉴스였다. 무장독립운동의 꿈을 버리지 못한 김경천은 연해주 각지에서 군사지도를 맡으면서 무관학교의 설립을 시도하여 블라디보스토크 한인군인클럽을 조직하기도 했다. 또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조선사범대학의 일본어와 군사학 강사를 맡아, 한때 영관급인 대우로 극동 소련당국에 초청 받아 군사전문가로서, 시베리아 각지에서 군대조직 정비를 도와주었다. 조선인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생들의 친목회인 전의회(全誼?) 회보에 의하면 일본군 현역장교로 근무하는 그들 가운데 지청천의 동기생인 홍사익[종전 후 필리핀에서 포로학대죄목으로 전범 처형됨]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몸을 던진 김경천과 지청천의 서울에 남겨진 두 부인을 원조했다고 한다. 김경천의 아내 유정은 1923년 겨울, 많은 빚 때문에 소유하는 가옥을 처분하고 3명의 아이를 데리고 곤궁한 생활을 했지만 더 생활이 어려운 지청천의 부인에게 상당한 돈을 기부했다고 한다. 1925년 김경천은 처자식을 블라디보스토크로 불러들였다. 전의회 회보에는 이 처자의 출발까지 기록되어 있어, 전의회 회원들은 김경천이 시베리아에 남았던 것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를 마지막으로 김경천의 소식은 실리지 않았다. 1930년대 중반부터 스탈린은 대숙청의 일환으로 소련공산당과 공적 기관의 요직에 있던 조선인 지도자와 지식인에 탄압의 손이 뻗쳤다. 1936년 김경천도 간첩 혐의로 구속되어 3년형을 받았다. 이어, 1937년 연해주에 사는 고려인(조선인) 20만 명은 모두 강제 이주의 대상이 되어 중앙아시아로 이송됐다. 김경천의 처자도 카자흐스탄으로 보내져적군인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인도 ‘인민의 적’으로 불리는 고통을 당했다. 김경천은 1939년에 석방되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지만, 겨우 한 달 후에 다시 체포되어 8년형을 받고 수감되었다가, 1941년 독일과의 전쟁 발발과 함께 멀리 소련 서북쪽으로 이감되어 1942년 심장질환으로 옥사했다. 그러나 정확한 사망일시, 장소, 사망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스탈린이 죽은 후인 1959년 2월 16일 김경천은 소련에서 명예 회복됐으며 유족도 복권됐다.
사후(死後)의 평가 김경천의 활동 무대가 주로 시베리아였기 때문에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다. 이승만 정권의 극단적인 반공주의 때문에 한국의 언론은 시베리아에 남았다는 것이 공산주의자가 됐다는 것과 같은 뜻으로 해석해서 이를 의도적으로 진실이라고 믿게 했기 때문이다. 1998년 한국정부는 김경천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그 식전에는 그 때까지 생존했던 김경천의 막내딸(1928년생), 막내 아들(1932년생)이 한국을 방문해 그의 자세한 행적이 알려지게 됐 다. 그의 23기 일본인 동기생 중에 가장 높은 계급에 올라간 오바타 히데요시[小畑英良. 1890-1944.8.11. 55세에 죽음. 육군대장 추서]는 김경천과 같은 기병병과로 도쿄의 기병 제1연대에도 약 10여년 군 생활을 같이 했다. 그는 일제 제31군사령관으로서 7월 21일 섬에 상륙한 미군과 결전을 벌이며 괌도를 사수하다가 도쿄에서 옥쇄병령을 받고 '태평양의 방파제가 되겠다'는 답전을 보내고 사령부가 위치한 참호 내에서 60명의 부하들과 함께 자결했다. 명령에 따라 살고 죽어야 하는 군인으로서 김경천은 오바타와 같은 나이에 죽었지만 국적이야 어떻든 떳떳한 한국인으로 살다 죽었다. 그의 한 평생은 어느 나라에 살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 살던 한국인으로서 진정한 애국자의 삶이었다.
정보 부재, 오보, 고의성과 공작이 혼합된 김일성 논쟁에 김경천 장군은 전혀 무관.
성균관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은 1974년 ‘김일성 열전’을 저술했다. 이 저술에서 이명영은 북한의 김일성이 일제 강점기에 활약한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도용한 가짜이며 일제 강점기에는 ‘4인의 김일성’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 책 속의 주장은 박정희 군부 독재 정권 시대의 선전문서로 학문적 가치가 전혀 없다. 이명영은 1928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출생해 1948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했고, 성균관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3년까지 이 대학교수로 재직했다. 1963년부터 7년간은 경향신문에서, 1971년부터 1975년까지는 중앙일보에서 논설위원으로 일한 경력이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어린 시절에 아버지로부터 들은 김일성 전설이 ‘육사에 유학했던 인물’이라는 데서 전설의 모델을 처음 찾았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소련과 외교 관계가 없었는데다, 반공적인 가치 판단 기준에 따라 시베리아에 잔류한 배경이나 스탈린 정권의 박해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고, 1920년대 후반 이후의 소식이 불명이라고 쓰고 있다. 김경천 장군이 스탈린 정권의 탄압을 받아 투옥되기 시작한 것은 1936년이고 1937년 전후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여러 차례 보도된 만주 지역 빨치산 대장인 김일성의 활동을 대조해 볼 때, 그의 저술은 진실 추적이 미진한 허구와 오판의 이야기임을 이제는 쉽게 알 수 있다. 1982년 북한에서 소련으로 망명한 허진[許眞]은 임은[林?]이라는 필명으로 도쿄에서 출간된 ‘북한왕조 성립비사-김일성 정전-’(일본어)에서 소련에 있던 고려인들의 저작이나 증언으로, 김경천이 소련에 머물다가 대숙청에 희생된 것으로 밝혀졌지만 당시 소련은 고려인이 자유롭게 입을 열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아 숙청에 관한 정보는 정확성이 결여되어 있다. 또한 당시에는 우리나라에서 김경천 장군에 대한 광범위한 관심이 없었다. 상황이 바뀐 것은 1990년 한국과 소련의 국교 회복 이후이다. 그 이듬해 소련이 붕괴하면서 한국과 중앙아시아의 고려인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고려인의 독립운동가가 한국에서 주목을 받게 됐다. 김경천이 제1의 김일성이라는 것은 허구임이 확실해졌고, 제2의 김일성은 일제의 정보보고와 매일신보 보도 1937년 11월 18자에 따르면 보천보를 습격했던 김일성이 그해 11월 13일 무송현에서 만주국 토벌군에 의해 사살됐다는 것이다. 일제의 첫 정보 보고대로 김일성이 정말로 이 때, 사망했다면 북의 김일성은 가짜라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만주국군은 김일성을 사살했다 해서 포상까지 했으나 그 후의 정보보고에는 그가 다시 출몰했다고 적고 있으므로 처음의 정보보고가 잘못됐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김일성 피살 보도와 김일성 애처의 귀순 보도 등, 당시 주요일간지에 실린 기사들. 취재미진으로 인한 오보인지, 일부러 조작한 허보인지 아리까리하다.] 친일잡지 ‘삼천리’에는 ‘김일성 비중(匪中)에 무장 여군(女群), 납치된 25명 무사히 돌아오다’[1940.4.1. 제12권 4호. 기사 중에. 일성이 무고한 양민을 납치했다가 풀어주었다는 내용이 포함됨], ‘김일성 애처 귀순, 선무공작 제1선에-소설 같은 전향의 경위’[1940.7.5.일 조선일보 석간]‘ ‘김일성 등 반국가자에 권고문, 재만동포 백오십만의 총의로‘[1941.1.1. 제13권 제1호, 일본군에 쫓기는 김일성에게 귀순을 권유하는 격문] 등의 기사가 엄연히 계속하여 보도되고 있다. 하지만 김일성은 1940년 10월 23일 소련으로 월경했음] 등의 기사가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사살 보도와 애처의 귀순 보도 등은 가짜뉴스임이 분명하다. 제3의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1로군 2방면군장 김일성인데 이미 김일성은 당시에 최현, 안길 등과 함께 하바롭스크 부근 브야츠크의 소련군 88여단 소속이었음이 소련 측 자료에 기록되어 있다. 이 부분에 관심 있는 독자들은 2002년 2월 3일 오루 11시 25분부터 2월 4일 오전 0시 20분 사이에 방영된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당시 사장 김중배, 기획 정길화]의 제작 자료들을 국회도서관 등의 웹사이트에서 검색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종석 박사[2006년 김대중 정권에서 통일부장관 역임]와 한홍구 교수[성공회대]의 저술과 논문에서도 이와 관련된 사실과 진실들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김일성 가짜설이 정권에 의해 보다 체계화된 것은 박정희 시절이다. 민주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군 장교로 복무하다 해방을 맞았던 박정희는 5.16 쿠데타로 한반도 반쪽을 통치하는 최고 권좌에 올랐지만 김일성과 대비되는 과거 전력은 부담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만주군에서의 활동을 공비를 토벌한 반공의 궤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남북이 대치해 있기는 했지만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이전의 지도자들에겐 굳이 김일성의 항일 경력을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김일성 가짜설의 집대성판으로 평가된 이명영의 저서가 세상에 나온 것도 바로 박정희 정권 때였다. 그는 일본을 오가며 많은 증언들을 모아 김일성 가짜설을 체계화했는데 당시 그를 만났던 박갑동[朴甲東, 1919~. 남로당 박헌영 계로 북에서 숙청된 후에 일본으로 망명] 씨에 의하면 정권의 지원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명영의 가짜설 배후에는 박정희와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배후설을 부정했다.[출처 ; 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작성자 woo19wcc] 신문에 났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김경천 장군 이야기는 기사는 오보와 허보도 많다는 사실과 국정교과서 지정과 같은 일은 후손들을 기만하는 지식인의 배덕행위임을 판단할 수 있게 하는 좋은 자료이다. ?유일상[건국대 명예교수. 신문방송학 저널리즘 전공. 재직 중에는 주로 언론법과 윤리, 언론역사 등을 공부하고 가르쳤다.]
[출처] 대한제국의 일본육사 출신 8 :김경천(김현충 =김광서=경천 김장군)/백마 탄 김일성 장군이 결코 아니다.|작성자 Henry Ryu 작성자동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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