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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대한제국의 일본육사 출신 김경천 (김현충=김광서=경천 김장군)/백마탄 김일성 장
Korea, Republic of 돌통 0 272 2019-07-30 14:50:11

   한자 들이 사라졌네..   왜?  이유가?


(제 2편)  대한제국의 일본육사 출신 김경천 (김현충=김광서=경천김장군)/백만탄 김일성 장군이 결코 아니다.

 

 

일본 육사 제23기 김경천[1888년~1942년. 55세로 소련에서 옥사]   

내용상의 사진들은 삭제했음..

 

1911년 5월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2월에 기병소위로 임관, 육군기병학교로 배치될 무렵에 아내를 불러들여 결혼생활을 했는데 지바[千葉=현재 나리타국제공항이 있는 현] 부근에서 위의 두 딸이 출생했다.

 

임관 8년 후인 1919년, 기병 제1연대 소속 육군중위로 도쿄에서 근무하고 있다가 이광수 등의 조선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을 접했다. 그는 곧 휴가를 내고는 처자를 동반하고 귀국했다.


서울에서 3·1 독립운동을 앞두고 그는 항일 독립운동 참여를 결심하고 육사 후배인 지청천[제26기]과 함께 국경을 넘어 남만주의 신흥무관학교로 갔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의병투쟁 때부터 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이상룡(李相龍) 등이 설립한 무장독립운동가 양성기관으로 2018년의 흉작으로 폐쇄의 위기에 가까웠으나 일본 육군의 현역 장교였던 김경천과 지청천, 대한제국 군관학교 출신 장교인 신동천 등의 우수한 교관이 들어오면서 순식간에 수백 명의 학생이 모였다.

 

이 교관을 ‘남만의 3천[三天]’이라고 불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발행한 ’한국정신문화대백과사전‘에는 김경천의 이름이 빠져 있다.


내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전신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이 사전 편찬에 관여한 적이 있어 회고해 보면 아마도 최근 박근혜 정권의 국정교과서 추진세력의 한 뿌리가 그 연구원에 있었기 때문에 소련에서 독립운동을 한 김경천의 이름을 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과 함께 양심적인 편찬자가 ’가짜 김일성장군‘ 설에 김경천 장군이 김일성 장군의 한 모델이 되는 역사적 허구 조작에 끼어들기 싫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양시쌍비론이 든다.

 

사실 김경천이 이 학교의 교관을 지낸 기간은 6개월 정도에 불과했다. 이미 1920년 초에 그는 하얼빈에 있으면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항일 동지와 연락을 취한 것이 일본 측의 정보자료에 보인다. 그는 1920년 초에 독립 운동의 무대를 시베리아로 옮긴 것이다.

 

[1920. 1.23. ‘高警第一五三五? 秘 ?外情報 不逞鮮人ノ行動浦潮派遣員報告「哈爾賓埠頭?十三道街居住金擎天ナル者ヨリ、目下浦潮ニ居住セル元平安南道平??衛隊下士ニシテ暴徒派不逞鮮人金燦五、及元咸鏡南道北??衛隊下士崔元吉、?海牙密使事件ノ張本人李儁ノ?子李鏞等十二名ニ宛テ、陰十二月十五日陽?二月四日愈?前進ノ予定ナルヲ以テ各位ハ二十人長トシテ部下ヲ引率シ同日?ニ哈爾賓ニ集合セラレ度シトノ書面ノ?送シ?レリト謂フ’

 [기병장교 김경천의 모습]

?

 

 

북의 ‘김일성’이 가짜이고, ‘진짜 김일성이 김경천’이라는 한국 내 친일잔당들의 주장은 조작된 것이라는 증거가 여기에서도 발견된다. 자세한 것은 후술하는 부분을 참고하기 바란다.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면서 당시 시베리아는 혼란 상태에 빠졌다. 10월 혁명 이후에 프랑스와 영국의 개입으로 시베리아에 있던 프랑스군의 지휘를 받는 체코 군단이 백군[반혁명군]에 가담하면서 일본을 중심으로 한 제1차 세계대전의 연합국이 시베리아에 출병했다. 그러나 대전의 종결에 따라 체코 군단은 전투를 중지하고, 백군도 거의 괴멸해 일본을 제외한 연합군은 모두 철병을 결정했다.

 

연해주를 중심으로 시베리아에는 고려인이 많았지만 러시아 국적을 가진 기존 이민자뿐만 아니라 항일운동을 전개하던 망명자도 많았다. 그 지도자인 이동휘가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가 되어, 레닌의 민족자결론에 공명했다. 김경천이 시베리아에 넘어가던 시기에는 레닌에게 독립운동자금 원조를 요구하는 지침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만주(간도)와 시베리아의 항일조선인 집단은 적군(赤軍)에 가담하게 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간도와 연해주의 항일세력이 무장투쟁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마침 김경천이 연락을 취한 시기, 간도에서 일어난 강도살인사건을 기화로 블라디보스토크의 고려인 거리인 신한촌에 대한 대규모 단속을 시작했다.


 [2016년 8월의 블라디보스토크 역 앞]


 

 

김경천은 마침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었으나 단속을 피해서 교외의 산중으로 들어가 블라디보스토크의 동쪽으로 나홋카의 동북에 있는 파르티잔스크[Партизанск] 인근에서 빨치산 부대를 만들어 한창걸[韓昌傑. 연해주 태생의 러시아 국적 고려인으로 제1차 대전에 징병으로 대독전을 경험하고 키에프의 사관학교를 마치고 공산당에 입당해 빨치산 부대를 결성했으나 1930년대에 숙청됨]부대 등과 함께 중국인 마적부대와 교전하고 이를 물리쳤다. 김경천은 마적퇴치로 이름을 날리면서 ‘경천 김 장군’이라 불리게 되었다.

 

당시의 파르티잔스크 빨치산 연합부대 규모는 300명 정도였지만 김경천은 이를 지휘하여 1921년 봄 무렵, 백군 잔당[콜차크부대]과의 전투를 치렀다.


파르티잔스크는 당시 치안이 매우 문란해서, 김경천은 민생을 정재관(鄭在?)에게 맡겨 군정을 폈다고 한다. 당시, 정재관은 미국에서 한국독립운동을 하다가 헤이그 밀사사건에 연루된 것이 드러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와서 권업회를 설립한 중심인물로, 권업 신문을 창간하는 등의 독립계몽운동을 하고 있었다.

 

[당시의 신한촌 산비탈에 들어선 러시아인 아파트들]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촌 표지 앞에서]


?

 

김경천이 지휘한 빨치산 부대는 눈에 띄게 규율이 높고 군사 조직도 다른 빨치산과 달랐다. 적군 지도자도 ‘이 조선인 부대는 규율, 대의에 전념하고 경애의 모범을 보였다.……조선인들 사이에는 규율에 대한 불복종, 명령 불이행, 술에 만취한 경우를 보지 못했다’고 극찬했다고 한다.


 (제 3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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