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파인애플 농장의 흉작이 이어지면서 불경기로 인한 재정 악화도 문제였고, 이승만이 대한인국민회를 자신의 영향권 아래 두기 위해 박용만과 극한 대립조차 마다하지 않았던 것도 한몫을 했습니다.
이승만과 박용만은 여섯 살 차이로 서대문 감옥에서 만나 함께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친한 사이였습니다. 두 사람은 1904년 비슷한 시기에 미국 유학 생활을 시작했는데,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자리를 잡지 못했던 이승만을 박용만이 1913년에 하와이로 초청하면서부터 둘의 관계는 의형제에서 정적政敵으로 변해갔습니다.
박용만은 무장 투쟁을 위해 국민군단 창설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반면, 이승만은 교육을 통한 실력 양성을 주장하면서 국민회 회장 선출과 자금 사용 문제를 제기하며 박용만과 주도권 싸움을 벌였습니다.
이승만의 국민회 장악은 한동안 실현되지 않았지만, 1918년 박용만 계열의 인물들이 ‘일본군 선박 폭파미수사건’에 연루되면서 박용만이 하와이를 떠난 후 이승만은 결국 국민회를 장악하게 됩니다. 이 재판 당시 이승만이 증인으로 나와 국민군단에 불리한 증언을 했는데, 이것이 이승만과 박용만을 완전히 갈라서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