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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5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319 2019-09-28 14:57:30

5. 김일성의 사전 권력 정지(整地) 작업




빨찌산 출신 지방에 파견해 실세 확장

 




언제나 그렇듯이 권력자의 등장은 뒷날 신비스럽게 치장되거나 과장되는 것이 일쑤다.

 

김일성의 등장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소련군의 대위 계급장을 단 33세의 새파란 모습으로 원산항에 도착한 그를 영웅화시킬 「전설」들이 필요했던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25軍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의 원산마중과 열차충돌 사건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소련군대장이 「빨찌산」대위를 마중하기 위해 원산까지 내려갔고 그러다가 치스차코프가 탄 열차와 김일성이 탄 열차가 충돌했다는 것이다.



김일성과 함께 원산으로 돌아간 유성철씨(兪成哲, 전 조선인민군 작전국장·蘇 타슈켄트 거주)는 91년 8월 28일 본사 기자와의 국제전화로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45년 9월 19일 원산에 도착한 후 휴식을 취하고 21일 오후 평양으로 떠날 예정이었죠. 이날 치스차코프 대장이 원산에 와 김일성과 함께 떠나도록 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치스차코프가 탄 열차가 약속날짜인 21일 오전까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날 오후 1시 우리는 별도의 기차편을 마련, 평양으로 출발했다가 공교롭게도 치스차코프가 탄 열차와 충돌하는 사고가 있었지요.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어서 인명피해는 없었습니다.』



유씨와는 김일성의 입북시기에 대해 다른 견해(8월 말)을 갖고 있는 서용규씨(전 북한노동당 고위간부)도 이 에피소드에 관해 북한에서 들은 얘기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蘇 치스차코프 대장(大將) 마중설」에 대한 반론



『치스차코프는 국내파 공산주의자 이주연(李周淵), 소련파견 공작원 양양순(陽永順)등과 함께 김일성을 만나러 기차를 타고 원산으로 갔답니다.

 

그러나 김일성이 예정보다 늦은 치스차코프 일행을 기다리다 못해 다른 기차로 출발했다가 치스차코프가 탄 기차와 접촉사고를 일으킨거죠. 지금 원산에는 당시의 그 기차가 사적으로 전시돼 있습니다.』



서시는 『당시 원산에서 출발했던 사고열차의 기관사가 원산 사적지에서 해설원으로 일하는 것은 80년대 초까지 북한에서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치스차코프가 원산에 갔다는 부분에 대해선 반론도 없지 않다. 당시 소련군사령관 정치장교였던 메크레르씨(83·모스크바 거주)는 『다른 장성이 원산에 갔을지는 모르나 치스차코프 사령관이 김일성을 마중하러 원산에 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밝혔다.



북한문제전문가인 서대숙교수(미 하와이대)도 『김일성이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었다면 치스차코프가 북한에 들어올 때 동행시켰을 것』이라고 말했다.



前 蘇25군 정치사련관 레베디프 소장은 金의 도착 소식을 듣고 그날 밤으로 평양에 오라는 얘기를 한 적은 있으나 치스차코프가 마중갔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고 했다.



당사자인 치스차코프는 이 대목에 대해 기록이나 증언을 남기고 있지 않다. 때문에 정확한 진상은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열차사건 등은 소련이 김일성을 뒷받침해 준 당시의 상황을 반증하는 사건들임에는 틀림없다.



원산에 들어온 김일성은 소련의 전폭적인 후원 속에 지방조직에 착수하면서 소련과 집적 연결되는 빨찌산의 하부조직을 뻗어같다.

 

김일성은 원산에 도착한 직후 함께온 빨찌산들을 각 지방에 파견한다. 김일을 평북으로, 박성철(朴成哲)·최충국(崔忠國) 등을 함북으로 파견, 지역 사정을 소상히 파악토록 지시한다.



서봉규씨의 증언―.


『김의 이러한 조치는 소련군과의 약속이나 묵인 하에 했든. 지시를 받아서 했든지 간에 김이 독자적으로 추진한 것입니다. 소련군이 김일성의 심복들에게 직접 이같은 지시를 내렸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요는 소련측의 지원 하에 나름대로 「집권구상」을 가졌던 김일성이 이의 일환으로 자신의 심복들을 지방에 파견했다는 얘기다.

 

전 북한 내무성 부상 강상호(姜尙昊. 83·러시아공 페테프스부르크 거주)의 증언은 보다 실감이 난다.



『46년 초쯤인가 김일성이 자신의 집으로 나를 초대하더군요. 그 자리에는 문일..부관도 있었지요.

 

김은 「빨찌산이 해방전에 참전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면서 「원산에 도착 즉시 북한 전 지역의 정세파악에 들어갔었다」면서 「원산에 도착 즉시 북한 전 지역의 정세파악에 들어갔었다」고 하더군요.』



강씨의 증언은 계속된다.

 


『김일성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그래서 김책(金策)을 함흥으로, 오진우(吳振宇)를 회령(會寧)으로, 최현(崔賢)을 혜산(惠山)으로 급파해 지방사정을 파악토록 지시했지…」라고 말한 것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김일성은 이를 위해 원산에서 했듯이 빨찌산 핵심들을 북한 전역으로 파견했다. 김일성 자신도 「김동환」등의 가명을 써가며 「민정시찰」을 했다.



前 蘇25군 정치담당관 메크레르 중좌는 『9월 중순에 상부로부터 김일센이 평양에 도착하면 그를 데리고 각 지방에 다니며 주요 인사들에게 소개하라는 지시가 떨어지더군요』라고 증언하고 있다.



김은 지방에 내려가는 「빨찌산」들에게 구체적이고 치밀하게 지시를 내렸다. 무엇보다도 민족주의자, 기독교 인사, 국내파 공산주의자 등 다양한 계층으로 섞여있는 당시 북한 상황에서 김이 내린 지시는 「의미」가 있다고 파악된다.



노동자 계급 속에서 기술자 확보에 치중



김일성은 원산에서의 체류일정을 끝내고 고향땅 평양으로 입성한다. 김은 이곳에서 소련군의 지원 아래 김책·최용건·안길(安吉) 등 빨찌산 핵심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집권구상을 펼쳐나갔다.



이 당시 김일성이 가장 역점을 둔 대목은 공산당 창건 준비와 이에 대비한 인재발굴이었다.

 

서용규씨는 『김일성이 내린 임무는 지방의 당조직 착수, 노동계급속에서의 새로운 인재발굴, 기술자·전문가 발굴 및 추천, 지방의 실태 파악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말한다.



서씨의 증언은 계속된다.

 


『노동계급 속에서 새 인재를 발굴하는 과제는 평양학원 입학 추천으로 추진됐죠. 이 학원은 45년 10월 18일 개교, 11월 중순에 1기생을 배출합니다. 바로 이들이 지방에 내려간 빨찌산들이 추천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거죠.』



평양학원 1기생은 정치반 84명, 군사반 1백여명 등 모두 2백여명 정도가 배출돼 북한사회의 핵심간부로 등장한다.

 

이 학원의 군사반은 46년 2월 보안간부훈련소로, 그 뒤 정치반은 중앙당학교로 각각 개편된다.



이들은 6·25때 정치군관으로 참전, 상당수가 전사했다. 김일성은 이들 학원이나 훈련소를 보다 내실있게 하기 위해서는 빨찌산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 기술자 등 전문가를 확보하는데 치중한다.



서씨의 증언―.

 


『김일성은 일제때 학명을 나갔거나, 해군으로 복무했거나, 비행기 조종사로 근무했던 사람들을 찾는 데 역점을 두었죠.

 

지방에 내려간 빨찌산들이 이런 사람을 찾으면 소개장을 써서 김일성에게 보냈습니다. 그러면 김일성은 「당신은 보안간부훈련소(평양)에 가서 무엇을 가르치시오」, 「당신은 수상보안간부훈련소(남포)에 가서 이것을 가르치시오」,

「당신은 비행보안간부훈련소(신의주)에 가서 조종술을 가르치시오」라는 식으로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서씨는 『지방에 내려간 빨찌산들의 숫자는 공식적인 자료는 없으나 임춘추(林春秋) 등의 말을 종합해 볼 때 60명쯤』이라며 『이들은 48년 2월 조선인민군이 창설되기 직전에야 거의 전원 평양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자신을 중앙지도부로 하는 공산당 창당에 박차



김일성은 북한을 장악하기 위한 조직의 구성에 이미 착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조직의 궁극 목표는 북한의 독자적인 공산당 창건이었다.



조선중앙통신 주필로 근무하다 50년대 말 남한으로 망명해온 한재덕(韓載德, 사망)씨의 표현에 따르면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소련 볼셰비키당을 만드는 것』이었다.



빨찌산동료나 부하들을 지방에 내려보낸 김일성은 평양에서 당 창건에 대비한 포석으로 여러 가지 활동을 벌인다.

 

당시 상황을 보면 평야에는 조만식을 비롯한 민족주의 세력이 단단한 기반을 갖고 있는 데다 현준혁 등 국내파공산주의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때문에 김일성은 우선 국내파에 대한 접근을 본격화한다. 맨투맨, 혹은 집단적인 접촉을 통해 회유, 설득작업을 벌이면서 자연스럽게 「중앙지도부」의 위치를 잡아나간다.



서용규씨는 이 점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김일성이 국내파 중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은 김용범과 박정애입니다. 다음으로 주영하·오기섭 등과 접촉을 했죠. 처음에는 도의 책임자·부책임자들과 만난 상견례를 한 후 간부들과 집체적으로 만났습니다.

 

이렇게 해서 9월 만쯤에는 각 도에서 책임자·부책임자 등 주요간부 2∼3명씩은 평양에 오게 됐죠.

 

김일성은 이들과 3일 정도 비공식회의를 하면서 공산당 창건을 위한 북부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회의 소집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김일성은 이처럼 심복들을 지방에 내려보내고 자신은 회의를 주재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을 정점으로한 「중앙지도부」를 형성하다.



서씨의 증언―.

 


『김일성은 당시 중구역 연화동에 있었던 동양척식주식회사 평양지사를 사무실로, 그 사택을 숙소로 삼았죠.

 

그런데 빨찌산파들은 김일성사무실이나 숙소를 갔다오면 「지도부에 갔다왔다」고 말하더군요.

 

특히 지방에 내려간 빨찌산들은 「지도부가 어떠니」하면서 김일성에 대한 선전을 열심히 했죠. 이러다 보니 어느덧 김일성의 사무실이 공산주의자들 내부에서도 「중앙지도부」라고 불려졌지요.

 

물론 다른 단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김일성이 있는 데를 보고 「중앙지도부」라고 지칭하는 게 정당화되는 분위기가 형성된 거죠.

 

중앙지도부는 김일성을 비롯한 김책·최용건·안길 등 빨찌산파와 주영하(朱寧河)·오기섭(吳淇燮) ·김용범(金鎔範) 등 국내파로 구성됐다가 후에 약간의 변동이 있게 됩니다.』



김일성은 「중앙지도부」를 통해 북한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어느 정도 굳혔다고 판단하고 공산당 창건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이에 대응해 만만치 않은 세력이 도전장을 내게 된다. 박헌영의 서울중앙을 지지하는 북한의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북한에 독자적인 공산당을 창건하는 문제를 놓고 빨찌산파와 국내파간의 대결과 긴장이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이상 ~~ 6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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