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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10편..그대로역사.
Korea, Republic of 돌통 0 291 2019-10-05 16:33:59
공산당분국 창설(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0)

 
 
 
◎국내파에 견제당하는 김일성 대회기간 내내 박헌영측과 심한 갈등/소서 추천한 김용범이 책임비서 맡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등장은 북한의 정치적 전환점이었다.


이전까지 김일성의 권력장정이 수면하에서 진행된 것이었다면 분국창설은 그것이 수면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33세의 새파란 김일성이 노련한 정치가 박헌영과의 담판에서 분국창설이라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는 것 자체가 북한권력의 방향을 예고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권력향한 디딤돌


많은 도전이 있었지만 소련군정의 뒷받침을 받는 김일성에게로 권력은 모아져갔다.


현재 북한 조선노동당의 모체가 바로 45년 10월에 만들어진 북조선분국이었으며 조선노동당도 분국창설의 계기가 된 서북 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를 당창립대회로 잡고 있다는 점 역시 분국이 김일성의 권력을 향한 디딤돌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분국은 예비회의와 서북 5도 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를 통해 탄생됐다.


그러나 지금까지 북조선 분국의 탄생과정에 관한 연구들은 내용을 조금씩 달리한다.


동경대의 와다하루키(화전춘수) 교수는 『10월10일 예비회의가 개최된뒤 13일 조선공산당 서북 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가 열렸다』고 말한다.


북한 외무차관을 지낸뒤 소련에 망명,동방학 연구소에서 연구활동을 해온 박길룡씨는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인 「조선공산당의 재건」에서 『서울의 당중앙위가 평양에 북한당 단체를 지도하기 위한 조직뷰로를 만들기로 결정한뒤 서울의 당중앙위 대표의 참석아래 45년 10월13일 열성자대회가 열린다』고 쓰고 있다.


일본 성학원대 스즈키 마사유키(탁목창지) 교수는 『10월5일 조직뷰로 결정을 위한 준비회의가 열린뒤 10일부터 13일까지 5도당원 및 열성자 연합대회가 열렸다』고 말하고 있다.


예비회의가 열린 날짜가 5일,10일로 다르고 본대회 개최일도 10일,13일 개최기간은 하루,나흘등 제각각이다.


연구결과들이 이처럼 엇갈리는 것은 이용가능한 자료의 제약때문이다.


현재 주로 사용되는 자료는 『옳은 노선을 위하야』(조선산업노동조사소 45년 11월, 이 책은 박헌영직계가 산노 명의로 제작,배포하다 김일성측의 제지로 이북분은 회수됐었다)와 이의 일본판(동경 민중신문사 46년 6월) 및 해방일보 45년 11월5일자 신문이다.


연구내용들이 이처럼 서로 다른 것은 박헌영·김일성의 비밀회동 등이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김 비밀회동을 처음으로 공개한 전 노동당 고위 간부였던 서용규씨의 증언에 따르면 분국은 45년 10월5일부터 8일까지의 예비회의,이어 10일부터 13일까지의 서북 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라는 과정을 통해 탄생한다.


그러나 분국창설은 국내파와 김일성과의 합의를 통해 만들어졌다기보다 소련군정과 김일성의 목표가 실현된 것이었다.


사실상 예정된 코스를 밟아왔다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당시 소군정 정치사령관 레베데프의 증언.


『나는 처음부터 이북에 공산당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조직위원회(레베데프는 조직위원회가 곧 당이라고 했다)를 만들려고 생각했죠.


소비에트화의 첫 코스였을 뿐 아니라 남쪽의 당을 의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서울에 당중앙이 있다는 어려움 때문에 여러번 논의를 거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회의때마다 나는 「서울의 당과 관계없이 이북에 조직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


나중에 합치는 한이 있어도 이북에 조직위원회를 두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국내파의 강력한 반발과 지도부 일부의 주장에 따라 분국으로 낙착됐습니다.』


이정식,스칼라피노 교수도 「한국공산주의 운동사」에서 『열성자대회개최는 김일성과 그 동료들의 본격적인 권력장악 시도였다는 점이 명백하다.
 
대회개최 수주일전부터 김일성그룹은 소련의 지지와 지도를 바탕으로
북한전역에 요원들을 파견,우위를 확보하려 했다』고 쓰고 있다.


서용규씨도 북한에 새로운 정치집단을 만들어 내기위한 김일성의 작업이 입북이후 9월말까지 계속돼 45년 9월29∼30일께 일단 각도책임자로
 
열성자회의 소집을 위한 발기인위원회가 구성됐고,이들 발기인이 10월2일께 각도에 내려가 대표들을 선발·소집하여 10월5일부터 예비회의를 갖기로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10월5일부터 8일까지 평양에서는 서북 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를 위한 예비회의가 열렸지만 결론없이 대립만하다 분국창설의 과제를 10월8일밤의 박­,김 비밀회동으로 떠넘겼고 결국 분국창설은 열성자대회에서 마무리됐다.


45년 10월10일 평양에서는 서북 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가 비공개리에 소집됐다.


대회에는 정식대표 57명과 방청자를 합해 1백80명 정도가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대개 도급간부들과 군당위원장들이었다.


○열성자대회 개최
 


『옳은 노선을 위하야』에 따르면 회의에는 하나의 강연과 세개의 보고가 있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당조직문제에 관한 보고」다.


『옳은 노선을 위하야』는 「김○○동무」가 발표한 것으로 되어있다.


대부분 연구자들은 김○○가 김일성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것은 열성자대회가 김일성주도하에 개최되고 진행됐다는 중요한 증거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서용규씨는 전혀 새로운 증언을 하고 있다.


서씨의 증언.


『열성자대회의 회의에서는 예비회의때 자유토론 형식과는 달리 격식을 갖추었지만 정식보고자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김일성은 주제발표를 하거나 토론에는 참가했지만 정식으로 보고하지는 않았습니다.


북한에서 열성자대회가 개최된 10월10일을 당창립일로 삼고 있으면서도 회의의 공식보고문서를 내놓지 않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 증언은 매우 중요하다. 열성자대회가 분국창설을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김일성파가 전적으로 주도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회의 공식의제는 서북 5도당의 정치노선·조직노선 및 정세상황이었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분국설치였다.


갈등은 꿈틀거렸지만 대회가 소집되기 직전에 있었던 김일성,­박헌영 비밀회동이 갖는 정치적 무게에 힘입어 분국창설은 큰 문제없이 통과됐다.


그러나 소란이 없을 수는 없었다. 서씨의 증언.


『김일성측은 대회첫날 박헌영과의 비밀회의에서 합의사항,즉 서울중앙의 지도를 받는 중간지도기관인 북조선 분국 창설을 양해한다는 내용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정달헌등 일부가 이를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그처럼 중요한 결정을 당중앙위원회의 토론을 거쳐 해야지 어떻게 총비서 박헌영 개인과의 합의로만 결정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같은 항의는 박­,김의 비밀합의를 깨기에 너무 미약했다. 열성자대회는 박­,김 회동의 합의에 따라 진행됐다.


김일성파는 입북 한달이 채 안되는 기간에 권력의 중심부에 바짝 다가섰고 박헌영이나 국내파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권력의 핵심으로부터 한걸음 밀려나는 순간이었다.


분국창설이 결정됨에 따라 지도기관이 선출됐다.


서씨는 그동안 비밀에 싸였던 지도기관의 인선내용을 이렇게 증언했다.


『책임비서에 김용범,제2비서에 오기섭·무정이 각각 선출됐습니다. 집행위원에는 김일성·안길·김용범·박정애·주영하·장순명·강진건·오기섭·최경덕·김응기·송봉옥·이순직·김교영등 모두 17명이 선출됐습니다.
 
 
북조선 분국 집행부서장에는 조직부장 주영하,선전부장 김교영,간부부장 이동화,청년부장
 

김욱진,노동부장 최경덕,농민부장 이순직,부녀부장 박정애,교육부장 한설야,총무부장에 박종호로 결정됐습니다.』



김일성은 북한 공산당을 완전장악하기 일보전까지 다가갔다.



그러나 박헌영의 힘은 여전히 강했고 국내파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우선 김일성 자신이 책임비서로 선출되지 못했고 김일성파의 핵심인 김책과 최용건도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지 못했다.



김일성이 왜 책임비서가 못됐을까.



서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책임비서 자리가 김용범으로 돌아간 이유는 김,이 국내기반이 충분치는 않아도 소련 공산당 약소민족국에서 공작원으로 파견할 정도로 믿을만한 인물이라는 점,국내 공산주의계열의 파벌에 속해있지 않다는 점,해방직후 북부중심지 평양에서 당조직적 기반을 구축해 나간 점,소군정과 김일성측이 강력히 추천한 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김일성도 책임비서로 추천되기는 했으나 사양했습니다. 그 이유는 우선 나이가 젊고 국내활동가를 앞세워야 하는 당시 상황에서 김용범처럼 국내 형무소에서 나온 경우가 아닌데다 10월 당시처럼 38선이 유동적인 상황에서는 소련공산당 전략(조선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지를 평양으로 끌고 오려는 것)을 바로 집행하기 어려웠던 사정 등이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소군정의 정치사령관 레베데프의 설명은 다소 다르다.



『김일성이 분국의 책임비서가 되지 못한 것은 김일성의 역부족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정치훈련이 되어있지 않은 그를 전면에 부상시키기는 이르다고 판단했습니다.



본인이 레닌의 사상에 대한 이해도 적어 정당을 이끌만한 준비가 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김,은 빨치산 훈련만 받은 사람이 아닙니까.』



뉘앙스는 다르지만 두 증언자 모두 김일성 일파가 전반적인 권력을 잡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대회가 진행되는 기간동안 사사건건 김일성파와 국내파가 대립하고 김일성측의 의견이 상당히 무산된 것은 그같은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



○박 찬양문구 채택



국내파는 정치노선문제를 놓고 김일성파에 제동을 걸었다.



서씨의 증언. 『서울 중앙을 지지하는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은 서울의 정치노선인 박헌영의 8월 테제를 그대로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별도의 정치노선채택을 주장하는 김일성파의 입장을 무시하려 했습니다.



정치노선을 둘러싼 대립이 결정서초안작성위원회에서 「8월테제」(박헌영이 발표한 정치노선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를 말함)에 준해 새로 만든다는 선에서 절충되기는 했지만 소군정과 미군정간에 명백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 외에는 사실상 8월 테제의 기본내용을 그대로 베껴놓았습니다.』



김일성이 밀린 것이다.



더욱 주목되는 일은 분국창설을 결정하는 대회에서 당총비서 박헌영에 대한 찬양문구를 채택한 점이다. 「박헌영에 대한 축전」은 대회 두번째 순서로 채택됐다.



『옳은 노선…』은 축전 내용을 이렇게 전한다.

 

 


『…박헌영동지의 정당한 노선을 밟아서 5도연합회의가 열리게 됨에 대하여… 조선무산계급의 영도자인 박헌영동지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박동무의 건강을 축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축전은 열성자대회 참가자 전원의 결정이었다. 박헌영이 조선공산당 최고의 지도자라는 것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는 것이었다.

 

 

대회 첫날부터 시작된 김일성파와 국내파의 시끄러운 대립은 대회기간동안 줄곧 계속됐다.

 
 
      이상..  다음 11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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