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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신. 이오시프 스탈린. 독재의 최고봉. 08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49 2019-10-17 23:05:51

전통적인 해석은 두 방향이 존재하는데, 각각 한나 아렌트 이래로 시작한 "전체주의론"에 입각한 대숙청 해석과 소련 공산당에서 내놓던 관제 역사 서술이 그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전통주의적 시각은 대체로 전체주의론의 시각을 의미한다.
여기서 전체주의론이란? 나치 독일과 스탈린 소련을, 전체주의 사회라는 맥락에서 비슷한 사회로 보는 입장이다.



전통주의적 시각에 입각한 대숙청은 스탈린의 과격한 정책이 빚어낸 사회 모순으로 발생한 불만 세력을 강력한 통제력을 지닌 스탈린이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서 분쇄하고 절대권력을 구축하고자 한 시도로 평가된다.



이에 따르면 농업정책 실패와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부작용으로 인해 스탈린의 인기가 땅에 떨어졌고, 그 대안으로 떠올랐던 인물이 레닌그라드 공산당 지도자였던 세르게이 키로프였다.



세르게이 키로프는 굉장히 인기가 많았는데 1934년 당 대회의 중앙위원회 상임위원 선거에서 나온 반대표가 단 3표일 정도로 원만한 인품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 스탈린의 경우 반대표가 292표를 넘었다.    그는 스탈린파였지만 스탈린에게 몇 차례 산업화 속도를 완화해줄 것을 요청했고, 때문에 스탈린은 이를 괘씸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스탈린은 키로프를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수도인 모스크바가 아니라 레닌그라드에 머물게 하였다.




키로프는 이렇게 레닌그라드 당사의 자신의 사무실에 머물다가 그 해 암살되었는데 스탈린이 이를 공산당 내에 파시스트들과 연결돼 있는 제5열의 소행이라고, (여기서 5열이란?  진격해오는 정규군에 호응하여 적국 내에서 각종 모략 활동을 하는 조직적인 무력집단을 의미한다.)   선전하여 당내 첩자들의 색출작업을 실시한다.



이 과정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 같은 반(反) 스탈린파들은 물론이고 스탈린을 제외한 10월혁명의 원로들과 경쟁자들, 최종적으로는 반(反) 공산주의 계층들까지 모두 쓸려나가버려 이후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스탈린 절대지배체제가 확고히 수립된다.




세르게이 키로프의 보안 문제에 스탈린이 직접 간섭하는 등 키로프의 암살을 전후해 석연치 않은 문제가 있어 스탈린이 사주했다는 설이 있었다. 



대숙청과 전혀 무관한 부됸니나 볼로쇼프, 혹은 자신의 아들들에 대한 보안 문제 간섭이나 숙청과 무관한 병사 내지는 사고사에 대한 보안 문제를 봐서 이 설을 의심하는 의견도 있다. 



또한 실제로는 키로프의 부인에 대한 연정(...)으로 벌어진 치정극이라는 설부터..  반소련 음모, 스탈린이 손수 사주했다는 설 등이 있는데 니카타 흐루쇼프의 경우는 노골적으로 스탈린의 사주설을 주장했다.




사실 스탈린은 혁명 후 동지가 동지를 처형하던 프랑스 혁명의 악순환을 경고하며 대숙청 10년 전에는 숙명의 라이벌이자 불구대천의 원수 레프 트로츠키를 처형하는 것을 반대한 적도 있다.



그래서 트로츠키는 그 이후에 대부분의 동지들이 처형된 것과는 달리 외국 추방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이 그렇게 인정이 많을 리가 없었고, 후에 멕시코로 망명한 트로츠키가 자신을 즉, 스탈린을 계속 까대자 자객을 보내 암살한다.



이전에도 볼셰비키는 제정을 무너트리는데 같은 혁명동지였으나 방법론 차이로 갈라졌던 멘셰비키 들을 처형하지 않고 대체로 망명을 허용할 정도로 혁명 동지들에 대한 처형은 매우 자제하였다.



그러나 트로츠키를 축출한 스탈린이 농업을 집단화시키고 과격한 산업화를 추진하자 당 내에서는 그에 대한 반대가 많아졌다.



그 당시만 해도 스탈린보다 경력이 화려한 혁명가들이 당 내에 있었던지라 만약에 중앙위원회에서 불신임 투표라도 당하면 그는 그대로 정권을 잃고 정치계에서 묻힐 판이었다. 그래서 당에서 자신에 반대하는 세력을 뿌리 뽑아서 자신의 정책을 추인하는 거수기로 만들려고 하였다.



여기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게 농업집단화였는데 농민들이 자기 땅을 빼앗기고 집단농장에서 일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잦은 반란이 일어났다.



이때 반란 진압을 위해 군이 동원되었는데 잘 알려져 있지만 이 과정이 정말로 참혹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대기근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스탈린은 원스턴 처칠에게 독소전쟁보다 이 시기의 반란 진압이 더 참혹했다고 했다.



인민을 위한다는 붉은 군대가 인민을 탄압하니 장교들이 스탈린 체제에 회의감을 느낀 게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당원이었던 몇몇 장교들은 중앙위원회에서 스탈린에게 용감하게 반대표를 던지기도 하였다.



더욱이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에서는 이러한 집단화 정책 실패와 자연재해가 겹쳐 대기근이 일어나서 수백만 명이 아사하였는데(홀로도모르) 이 책임은 모두 무리한 산업화를 밀어붙인 스탈린이 져야 할 판이었다.




스탈린은 "소련의 산업화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 또한 여기서 산업화를 중지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식의 독선을 가졌고 이건 스탈린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이런 식의 사고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가 계속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오르기 주코프의 회고록을 봐도 그 당시에 만약에 산업화를 포기했으면 몇 년 후 일어났을 독소전쟁에서 소련이 이길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이런 생각이 스탈린 독재와 대숙청을 합리화했으며 결국 이는 실존하는 반대파 또는 반대할 수 있는 세력을 모조리 숙청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더해서 대숙청 후에 라브렌티 베리야가 예조프를 기소하면서 넣은 죄목 중에 양성애와 변태 성향을 넣을 정도로 새디스트(성적으로 가학하는 성행위)  성향이 있는 예조프가 숙청을 감독하면서 막장으로 치달았다.



원래 자유롭게 허용되었던 동성애와 낙태는 스탈린 집권 후 다시 범죄가 되었다. 스탈린 체제는 사실 차르 체제와 다름없는 보수적인 체제였던 것이다.



그 이전까지 공산당의 공식 입장은 동성애건 뭐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 어떤 자유도 제한해선 안 된다는 것이였다.   웃기는 것은 사실상 후임자라고 할 수 있는 베리야도 로리콘 성향이며 새디스트였다는 것.




1937년 봄에 미하일 투하쳅스키 원수가 체포되며 군부에 대한 대숙청이 시작되었다. 적백내전 중 양성된 노련한 장교들을 누명을 씌워 정치적 혐의로 숙청해서 처형하거나 NKVD의 고문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굴라그로 보내거나 해서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소련군은 몇몇 장성을 제외한 훌륭한 군인들의 씨가 말라버렸다고 알려졌다.



때문에 독소전이 개전하자 심각한 인력 부족에 시달린 소련은 그때까지 죽지 않은 장교들을 다시 불러와서 복귀시키는 조치가 취해졌고, 죽은 사람 중에 미하일 투하쳅스키 원수 같이 유능한 장교들 역시 많았으며 대독승전의 주역 중 한 명인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원수는 숙청 전에도 소장이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발가락이 다 뭉개지고 이빨도 절반이나 날아갔다가 독소전 때문에 살아났다.



주코프는 실제로 숙청 리스트에 올라갔다가 할힐곤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이름이 슬그머니 빠졌으며, 이반 코네프는 인맥줄을 잘 타 스탈린의 술친구인 보로실로프 원수 라인으로 들어갔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죽은 사람들이 현대전에서 정말 무능했을지는 알 수 없는 셈. 그리고 무능한 장교들이 싹 쓸려나갔냐면 그것도 아닌 것이 당장 대숙청에서 살아남은 원수 2명이 스탈린의 예스맨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와 시대에 뒤떨어진 세묜 부댠나다. 둘 다 바르바로사 전쟁에서 독일군에게 뼛속까지 처발린 다음 다시는 일선에 나서지 못했다(...).



대숙청 직후 벌어진 소련-핀란드 전쟁만 봐도 결과가 어떻게 작용했는지 알 수 있다.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등으로 단련되고 임무형 지휘체계 등의 우수한 시스템으로 체계적으로 조직된 독일 육군, 루프트바페 등의 공격으로 흩어져 있던 소련 육군은 각개격파를 당해 분쇄되고, 공군은 수천기의 비행기가 박살나 버려 제공권을 장악당해 초반에 수백만이 갈려나가 버렸다.



어쨋든   어떻게 보든지 간에 독소전 초반 소련군을 반신불수로 만든 것에는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할 정도로 타격이 심했다.




군부에 대한 숙청이 시작된 것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첫째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독일 방첩대(SD)가 소련군의 고위장교들이 독일군과 내통하고 있다는 문서를 흘렸고 거기에 위조된 투하쳅스키 원수의 서명이 있었는데 이걸 본 스탈린이 "헐, 이 새퀴들이 내 뒤통수 깔 준비하고 있던 거야? 용서할 수 없다!"라면서 예조프와 함께 고위장교들을 줄줄이 쳐냈다는 것이고,



둘째는 NKVD가 일부러 군의 고위장교들에 대한 불신감을 부추겼다는 설이다. 진실이 무엇이든 의심 잘하는 스탈린에게는 효과 직방이었을 것이다. 세번째로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역정보를 스탈린이 간파하였음에도 오히려 이를 숙청의 구실로 삼았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어떤 이유든 간에 실제로 스탈린이 군에까지 대숙청을 옮기고 싶어하지는 않았다는 증거들은 꽤나 있는 편이다. 실제로 1937년 초까지는 민간에 대한 숙청은 많았어도 군대만은 거의 건드리지 않았는데, 위의 이유들로 인해 스탈린이 군대에 슬슬 의심을 품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소련군은 고도의 기계화와 함께 신속한 기동력을 갖는 기동군을 창설하는 계획이 있었기에 군 지휘관들에게 더 많은 재량권을 주고 당의 감시역인 정치장교 제도를 없애려고까지 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는 위에 언급된 누명에 부채질을 하는 꼴이 된 것이다. 기동전 구상 자체는 스탈린도 동의한 것이지만 하필이면 굉장히 안 좋은 시기에 찍히기 쉬운 짓을 스스로 벌이고 있던 것.



대숙청 이전의 소련군이 킹왕짱 좋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후사정이 어찌됐든 그나마 육성되기 시작한 장교들을 대거 제거한 것도 그렇고 장교들이 숙청에 대한 강한 공포감을 갖게 만들어 몸 사리게 만든 것도 소련군의 전투력이 내려가는데 크게 기여했다.



극단적으로 몸을 사린 결과 자기 판단대로 창의적으로 지휘하지 못하고 전투교범 등에만 매달리는 경직된 모습을 보이게 된 것. 덕분에 독소전 초기에 독일군이 감청한 유명한 대화도 나왔다.


"우리는 포격을 받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너희들 미친 거냐! 왜 암호로 보고하지 않는 거냐! 암호로 다시 보고해라!"



이미 공격을 받고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 한가하게 다시 보고하라는 것도 어이없지만, 더 큰 문제는 보고를 받은 쪽, 그러니까 지휘관 쪽에서 통신보안의 가장 기본적인 사항 중 하나인 이중송신 금지를 무시하라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지시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이중송신 이란.. 동일한 내용을, 도·감청이 가능한(= 암호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회선을 통해, 평문과 암호문 모두로 송신하는 행위. 사실상 적군에게 암호를 갖다 바치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대한민국 국군을 포함한 대부분의 군대에서 엄히 금지하고 있다.)    



대숙청 직후의 붉은 군대가 얼마나 막장 상태였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화라 할 수 있겠다. 이런 지경이니 우라돌격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우라돌격이란.. 단순 돌격보다는 포병, 공군, 전차등이 동반된 공격이었다. 반자이 어택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또한 위에 나온 상황같은 독소전 초기에는 우라돌격보다는 참호, 대전차포등을 사용한 방어전이 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전쟁 중반기가 되어가며 제대로된 우라돌격 교리가 완성되어 독일을 밀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소련군이 반자이 어택 수준의 돌격을 한것은 정치장교의 선동으로 인한것이 주류였고, 그 이외 상황에서는 진지에서 죽거나 도망칠지언정 반자이 어택 수준의 막장까지는 가지 않았다.



    이상..  끝..   제 09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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