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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6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44 2019-10-21 22:46:32

연안파 입북

 

◎아무준비도 없이 “평양행”/심양에 국민당군 닥치자 혼란극심/무정,혼자 몰래 떠나 대원들이 반발

 
 
 

○도착전




어둠이 내려 깔린 45년 12월초의 평양역.



초저녁의 어두운 역사로 구식 증기기관차가 들어섰다.



바퀴의 쇠마찰음 사이로 감격의 외침인듯한 짤막한 탄성들이 잇따랐고 간간이 중국말도 들렸다.



이윽고 플랫폼에 70명 정도의 사람들이 내렸다.



흐릿한 역구내의 불빛사이로 조선독립동맹 주석 김두봉,조선의용군 사령관 무정,독립동맹 부주석인 최창익,한빈 등의 얼굴이 보였다. 이제 막 평양으로 귀환한 연안파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간부들이었다.



이들의 눈에는 물기가 번졌고 가벼운 흥분마저 감돌았다.



그러나 감회도 잠깐.



역구내의 어둠속에서 몇사람이 이들에게로 다가갔다. 맞이하러 나온 이들을 따라 걸음을 재촉하듯 역사를 나왔다.



대기하고 있는 트럭에 올라탄 이들은 곧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길고 험했던 투쟁의 역사를 인정받기는 커녕 손발과 같은 군대와 무기마저 대륙에 남겨두고 맨몸으로 입북해야했던 연안파의 입북은 이처럼 어둠속에서 순식간에 끝났다.

 

환영대회도 없었다. 김일성의 얼굴은 물론 보이지 않았다. 후에 김일성 비서실장 평양시 당부위원장을 지낸 연안파 홍순관씨는 이렇게 당시를 기억한다.



같은 조선의용군 출신으로 북한 정무원기관지 민주조선 간부를 지낸 조종찬씨(70)가 홍씨의 증언을 이렇게 전했다.



『기대를 가지고 내린 평양역은 쓸쓸하더군요. 환영행사까지 바라지도 않았지만 막상 아무도 없으니 섭섭했죠. 조선해방을 위해 싸운 동지적 입장에서 맞이하러 나올 수는 있는 것 아닙니까. 환영하지 않는구나 하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해방후 넉달 허송



연안파는 뒤늦게 들어와 환영도 못받고 스며들듯 북한에 겨우 자리를 잡아야했다.



그들은 군사력을 중국에 남겨두어야 했고 입북후에는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북한정치 핵심으로 성장하지도 못했다.



연안파의 지주로 간주됐던 무정,장군은 연안파안에서 내 몰렸고 연안파끼리도 서로를 멀리하는 분열상이 전개됐다.



연안파는 너무 늦은 시점에 아무런 계획도 없이 분열의 씨앗마저 안고 들어왔던 것이다.



이미 정치적 기반을 단단하게 굳혀가고 있던 김일성파의 흐름에 흡수되거나 아니면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불확실하게 알려져 있는 입북과정과 시기에 대해 조종찬씨는 전 북한 직업총동맹위원장 서휘의 증언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연안파 간부진들이 압록강을 넘어 신의주에 온 때가 11월말,평양에 도착한 때는 12월 초입니다. 국경을 넘으니 신의주 학생사건이 며칠전에 일어났다더군요. 압록강철교를 기차로 넘는데 김일성 장군 전단이 많이 붙어있읍니다.』



45년 12월이면 소 군정과 김일성에 의해 정치판이 이미 꽉짜여진 때였다. 가까운 중국에서 해방을 맞았는데도 4개월을 허송하고 만 것이다.



45년 8월15일 의용군은 조선진공 준비를 하고 있었다.



3일전인 8월12일 의용군은 조선진군을 명령하는 팔로군 주덕 총사령관의 연안총부명령 6호를 받았다.



『…소련 붉은 군대에 배합… 조선인민을 해방하기 위하여 나는… 조선 의용군 사령원 무정,부사령원 박효삼,박일만에게 즉시 …동북으로 출병하며… 조선을 해방하는 임무를 완수할 것을 명령한다.』(중국의 광활한 대지 우에』)



의용군이 출병을 준비하고 있는데 일본이 항복한 것이다.



그 당시 연안에 있었던 조종찬씨의 증언.



『해방 이틀뒤인 17일 의용군 근거지인 태행산에 가 있던 무정장군등 1백여명이 연안으로 집결했습니다. 그때부터 떠날 준비가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일이 있었다. 의용군과 독립동맹간부만 조선으로 돌아가는 준비가 비공개리에 진행됐다.



조종찬씨가 전하는 당시 중급간부 홍순관씨의 증언.



○두방향으로 갈려



『해방이 되자 모두 조선에 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사실은 간부들만 먼저 조선에 들어가기로 돼 있었어요.

 

그래서 대개 공산당원이었던 독립동맹간부나 조선의용군 간부들은 중국공산당이 발행한 당원확인증과 추천서를 받고 출발했습니다. 당원경력 사본도 무정이 가져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중국당으로부터 특별지시는 없었어요. 입북이 예정된 간부들끼리도 따로 모여 행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하지도 않았습니다.』



「조선에 들어가면 무엇을 할 것인가」는 각자가 생각할 일이었다. 관심의 초점은 오로지 「해방된 조선으로 돌아가는 것」하나였다.



약 20일정도의 준비끝에 출발했다.



대원 3백명 1진이 먼저 떠났고,부녀자와 가족들은 2진으로 나중에 출발하기로 했다.



조씨의 계속되는 증언.



『9월5일 연안을 떠나 심양으로 향했습니다. 중국당이 동북(만주)으로 파견한 임표(동북지방 홍군사령관)의 간부 연대천명과 같이 출발했습니다.



행렬은 초라했지요. 마차 두대에 잡품이나 무기를 싣고 말에 탄 사람이라고 해야 김두봉,무정 정도였고 나머지는 걸었어요.



해방당시 의용군은 태행산·연안·진제기(협서성·하남성·호북원)∼내몽고자치구∼하북성(장가구·승덕)∼요녕성(금주·심양)등 5개성 4천리에 걸친 장정이었다. 행군 60여일만에 심양에 도착한 것이 11월초.



고위간부들은 시내 사령부에 머물고 전사나 하급간부들은 숙박을 위해 심양주변에 머물렀다. 여기서 의용군은 두 방향으로 갈렸다.



홍순관씨의 증언.



『도착해서 얼마 안돼 의용군의 앞날을 결정하는 중요회의가 열렸습니다. 조선의용군 간부와 중국당과의 연석회의였습니다.



내용은 11월10일 오가황 조선소학교에서 열린 전조선의용군 군인대회에서 무정이 발표했습니다. 「간부만 조선에 들어가고 전사들은 3개 지대,즉 1·3·5지대로 재편해 동북지방에 파견,중국해방전투에 참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출발때의 방침이 비로소 공개된 것이다.



○모포 씌우고 때려



즉시 부대개편에 착수했다.



1지대(지대장 김웅,정치위원 방호산,정치주임 주연)는 남만주로,3지대(지대장 이상조,정치위원 주덕해)는 북만주로,5지대(지대장 이익성,정치위원 박훈일)는 동만주로 이동하기로 했다(이들은 이후 여러차례에 걸쳐 개별적 혹은 집단적으로 입북했다).



의용군 사령원은 여전히 무정이었고 정치위원은 박일우였다. 입북과 이동준비로 바쁜 와중에 상황이 갑자기 악화됐다. 2차 국공내전이 시작되면서 국민당이 심양에 진공한 것이다.



홍씨의 증언.



『상황이 급해지자 입북할 간부들이 기차로 심양을 뜬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눈치있는 사람은 이런 소식을 알았지만 나머지는 속수무책이었어요. 그래서 전사들이 도망가고 그랬습니다. 혼란이었죠.』



혼란속에서 무정이 지도자답지 않은 행동을 했다.



홍씨의 증언.



『입북할 간부들이 기차탈 준비를 하는데 무정이 무순에서 기관총으로 무장한 트럭을 하나 얻어왔습니다. 무정은 기차를 타지 않고 트럭으로 따로 이동해 본계에서 본대와 합친다는 거였어요.



그때는 기차가 국민당 비행기에 목표가 돼 위험했고 자동차는 작아 훨씬 안전했던 때였죠. 혼자만 살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조씨가 전하는 당시 간부대장 서휘의 증언은 훨씬 더하다.



『심양을 떠나기 전날일 겁니다. 새벽에 소란해서 깨어보니 대원들이 「대장동무 어떻게 된거요」라고 묻습니다. 그래 무슨 소린가 해서 둘러보니 무정이 없어진거예요. 간부도 아니고 자기말 잘듣는 사람만 골라서 데리고 야밤에 떠나버린겁니다.』



우여곡절끝에 45년 11월20일쯤 입북간부들은 안동에 도착했다.



서휘의 증언.



『우리들이 안동에 머무는 동안 무정이 평양에 가서 소 군정의 정치위원을 만나 협상을 했어요.

 

들어올 수는 있지만 독립동맹의 이름은 안되고 무장도 해제하라는 거예요. 이미 무장을 떼어놨으니 별문제는 없었지요. 이렇게 해서 안동에서 10여일,신의주에서 10여일을 머무른 우리는 평양으로 가게 됐습니다.』



소 군정이 제공한 기차로 가는 도중에 작은 사건이 벌어졌다. 무정의 머리에 모포를 씌워서 한 사람이 한대씩 때린 것이다. 무정의 행동에 대한 대원의 반감이 폭발했기 때문이었다.



◎배치 해주기만 기다리다 끝내 정치세력화에 실패



○도착후



평양에 도착한 이들의 입장은 매우 모호했다. 우선 이들은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사전계획도 없이 조선에 들어오기만 했다.



그나마 입북간부 전부가 독립동맹 소속이었기 때문에 정치조직을 만들수도 있었지만 소 군정과의 약속때문에 멋대로 독립동맹간판을 내걸기도 어려웠다.



연안파의 힘이었던 군대도 없었다.



결국 소 군정과 김일성측이 처리해 주기만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홍씨의 증언.



『평양의 태평양호텔에 모두 투숙해 배치를 기다렸지요. 그런데 제대로 안돼요. 그러다 하루는 김일성이 소 군정 정치부대좌와 같이 와서 우리 배치문제를 주제로 연설을 했습니다.



그때까지 배치를 못받았던 최창익을 위시해서 모였죠. 그런데 김일성이 와서는 「조선이 독립됐다. 미국이 남조선을 점령했다」는등 쓸데 없는 말만 해요.

 

최창익이 「우리 동료들을 빨리 배치해줄 수 없느냐」라고 해더니 들은척도 안하고 나가는 거예요.』

 

연안파는 김일성쪽에서도 골치아픈 문제였다.



전 북한 고위관리 서용규씨.



『연안파의 배치는 복잡한 문제였습니다. 연안파는 공산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갖고 들어온 독립동맹 조직과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과 독립동맹원들을 흡수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분국에 대두됐지요.』



배치문제는 해가 넘어가도록 질질 끌었다. 46년 1월 신민당창당이 내부적으로 결정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분열은 연안파 스스로도 조장했다.



홍씨의 증언.



『도당 이하 간부를 배치하는 간부부장에 임명된 무정이 횡포를 부렸어요. 자기와 태행산에 같이 있던 사람은 좋은 곳으로 보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형편 없는 곳으로 배치하는 거예요. 혁명역사가 남보다 오랜 서휘(32년 혁명참가)를 지역당 책임자로 내보낸 것은 단적인 예입니다. 연안에서의 갈등이 재연될 것이었죠.』

 


결국 최종적으로는 연안파의 핵심간부가운데 김두봉·최창익·한빈 등 일부는 신민당으로,나머지는 중앙 및 지방의 행정기관으로 배치됐다.



핵심인 당쪽에는 무정,김창만,후에 개별적으로 들어온 박일만,하급간부 일부만이 배치됐을 뿐이었다.



연안파는 북한정치의 주변부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해방 4개월만에 북한정치를 꾸려나갈 정치세력들의 입북은 거의 완료됐다.


 

 

  이상.  끝..   제 17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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