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독재 괴물 인민공화국.27편.건국과정.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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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판사 위폐사건」집중거론 ◎박헌영,김일성 4차회동/“미군정에 탄압빌미 제공” 박헌영에 화살/개성코스 택해 박 입북/김일성 승용차로 영접 신탁통치결정의 후유증은 46년 중반기가 되면서 이남에 날로 복잡한 정세를 조성했다. 우선 임시정부수립문제를 논의하던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임시정부문제를 협의할 수 있는 참가자」의 자격을 놓고 씨름하다, 회의시작(46년 3월20일)한달 반만인 46년5월8일 무기한 휴회로 들어갔다. 좌익에 대한 미군정측의 탄압도 서서히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직접적인 계기는 46년 5월 발생한 조선정판사의 위조지폐 발견사건이었다. 사건의 내용은 이렇다. 『46년 5월6일 미군정수사대는 서울 중심가에 있는 근택빌딩을 수색했다. 그 건물에는 조선공산당 본부뿐 아니라 공산계신문을 발행하는 조선정판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곳에서 종이,잉크,약1천2백만원에 달하는 위폐(당시 환율로 약12만달러)를 비롯한 위조지폐설비가 발견됐다』(이정식·스칼라피노공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이 사건이후 미군정은 조선공산당에 대한 막후수사를 강화해 『조선공산당이 임시정부의 다수세력을 차지해 권력을 장악한다』는 계획을 발견했다(같은책). 아직 대결로 치닫지는 않았지만 미군정은 「지하에서 꿈틀대는 조선공산당의 음모」를 경계하고 있었고 조선공산당 역시 미군정 공격을 목표로 하는 전략을 채택해 나가면서 긴장이 점차 고조돼 나갔다. 거기에다 6월3일에는 이승만이 정읍에서 『이남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폭탄발언을 했다. 이같은 발언은 이승만을 내세워 미군정이 남한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시켰다. 좌우를 막론하고 논란에 빠져들어갔다. 더욱이 미군정은 여운형과 김규식등을 중심으로하는 좌우 합작모임을 주선하고 나서 미군정이 새로운 정치판도를 구상하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들이 난무했다.
그런데 당시 박헌영의 입북코스를 놓고 논란이 있었습니다. 당시 38선의 경비가 강화되고 박헌영도 미군정의 감시대상이었던 만큼 조심을 해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씨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46년 4월이후 북조선 공산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상. 끝. 28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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