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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김일성 모두 ‘침공’ 추진…북, 중·소 설득해 선공. (상)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37 2020-01-03 00:31:19
브루스 커밍스 교수와 인터뷰

 
 

올해는 한국전쟁 69돌을 맞는 해다. 또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지 19돌이 되는 해다. ‘6·25 동란’ 또는 ‘6·25사변’으로 불렸던 한국전쟁은 2차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중국이 처음 맞선 전쟁으로,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첫 충돌이란 세계사적 의미가 있다.

 

 

이후 냉전이 시작됐다.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는 반공의 기치 아래 독재체제가 이어졌고 1961년, 1980년의 거듭된 군사 쿠데타도 이런 배경에서 가능했다.

 

평양 대폭격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북한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체제가 이어지면서 지금까지 전시동원 체제가 계속되고 있다.

 

 

이런 정치적 상황 속에서 국내의 객관적인 한국전쟁 연구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초기 저서들은 대부분 외국 학자의 것이었다.

 

특히 ‘한국전쟁 연구는 커밍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있을 만큼 커밍스의 영향이 독보적이었다.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1980년대 이후 한국전쟁 연구는 사실상 ‘커밍스 콤플렉스’와 ‘커밍스 알레르기’가 대결하는 양상이었다”고 말할 정도다.

 

커밍스의 연구는 반공주의 시각에 치우친 전통주의 연구의 평면성을 넘어서, 식민지와 냉전, 계급 갈등이라는 전쟁의 구조적 기원으로 파고들었다는 점에서 한국전쟁 연구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부에선 그를 북침설에 동조하는 친북학자로 오해하기도 했지만, 커밍스가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제기한 것은 북침설이 아니라 ‘남침 유도설’에 가깝다.

 

1990년대 공산권 기밀문서가 공개되고 소련·중국·북한의 계획에 의한 선제남침설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자리잡으면서 그의 남침 유도설도 설득력을 잃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누가 처음 방아쇠를 당겼는지보다 전면적 충돌을 낳은 역사적·구조적 요인이 중요하다는 학문적 신념을 철회하지 않고 있다.

 

커밍스의 영향을 받았던 진보적 연구자들도 1990년대 후반부터는 여러 나라의 사료를 교차분석하거나, 전쟁의 기원이나 전개과정보다 전쟁의 유산과 영향이란 차원으로 연구 방향을 다각화하고 있다.

 

** 저명한 석학.. 브루스 커밍스 교수와 권*호 워싱턴 특파원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답변은.. 글씨를 적색으로 하겠다. (브루스 커밍스의 답변은 붉은색 이라는 뜻이다.)

 

 

■ 브루스 커밍스 인터뷰<한국전쟁의 기원> - 처음부터 터프한 질문으로 시작하겠다. 어렸을 때, ‘한국전쟁은 북한의 한반도 적화야욕, 그리고 소련의 세계 공산화 전략으로 인해 일어났다’고 배웠다.
 
 
그러나 당신은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외부 요인 뿐 아니라, 내부 요인에도 주목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한국전쟁의 핵심 원인은 무엇인가?
 
 
“나는 기본적 관점을 바꾸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한국전쟁이 일제 강점기에서부터 비롯된 한국 내부의 갈등에서부터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 직전) 당시 남북한은 소련과 미국으로 양분됐고, 소련과 미국은 한국 내부에서 반목하는 양쪽 진영을 각각 지원했다. 특히 소련과 미국은 각각 군 출신(일본군과 독립군)들을 지원했다.
 
 
한국전쟁의 원인은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일성은 만주에서 독립군 게릴라로 일본군과 싸웠다.
 
 
그리고 일본군은 김일성을 잡으려 애썼고, 그들 중 한 명이 김석원(주: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장교로 복무했다. 육군대좌로 광복을 맞았고, 56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사학재단연합회 이사를 맡기도 했고, 충무 무공훈장,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이었다. 45년 해방 이후, 소련은 김일성을 지원했고, 미국은 김석원과 같은 이들을 지원했다.
 
 
미국은 일본군에 있었던 한국군 장교들을 등용했다. 이들 중에는 박정희, 김재규 등도 포함돼 있다. 미국은 한국의 권력기구에 일본군 출신들을 기용하는데 큰 책임이 있다.
 
 
그리고 48년 이승만이 한국에 들어왔을 때, 이승만은 북한에서 내려온 일본군 출신 한국인 장교들을 군 장성으로 기용했다.
 
 
이들 중 한명이 김석원이다. 그리고 미국은 48~50년에 500명의 미군 장교들로 이뤄진 자문단을 구성했다. 이 자문단은 김석원과 같은 (일본군 출신들에게) 38선 방어를 책임지게 했다.
 
 
이 점에서 소련과 미국이 30년대 일본강점기에서부터 부딪친 양쪽을 각각 지원한 것은 외국이 (한 나라에) 개입한 경우로는 최악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한국은 통일됐을 것이다. 김일성은 한국군의 한 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일본군과 싸웠기 때문이다. 김석원은 일본 제국주의 아래에서 가장 심한 부역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군이 아니라, 벌을 받았어야 했다. 그러나 소련은 북쪽에서 김일성을 지지했고, 미국은 남쪽에서 김석원(과 같은 인물들)을 지지했다. 이는 한국으로선 최악이었다.
 
 
49~50년 한국 상황에서 이는 거의 피할 수 없었다.남북한에 외세가 개입했다는 건 한국전쟁의 핵심 원인 중 하나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과 소련의 역할은 더 중요했다.
 
 
나는 미국인이어서 전쟁의 이런 측면을 더 강조할 수 있다. 뭔가하면, 미국인들은 한국전쟁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1950년 6월25일 발발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미국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용기있게 남한을 방어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미국이) 한 일은 모두 다 올바른 것이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35년동안 학생들을 가르치고 책을 출판하면서 한국전쟁의 그 복잡한 기원을 설명하느라고 애쓴 이유다.”1930년대 독립군 김일성-일본군 김석원
해방뒤 소련-미국 지원한게 불행 씨앗. 
 
 
- 당신은 특별히 한국전쟁에서 미국의 책임을 강조했다.
 
 
“미국인들 중 미국이 한국을 점령하고 미 군정을 실시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미국인들은 (미국의) 독일과 일본 점령만 알 뿐이다. 미국인들은 한국에 대해 잘 모른다. 그들은 전쟁이 1950년에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미국이 이승만과 같은 애국자들이 남한 정부를 수립하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했느데,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 봉사한 이들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의 본질이지만, 그건 매우 현명하지 못한 처사였다. 이런 배경들이 전쟁을 야기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미 군정은 좌익, 노동조합, 인민위원회, 여성조직 등을 탄압했고, 나중에 이는 제주 항쟁과 여수 항쟁으로 집약됐다.
 
 
이는 한국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미국이 깊은 책임을 갖게 되는 또다른 예다.역사학자들이 책을 쓸 때, 학자들은 현존하는 책, 문서들을 살펴봐야 한다.
 
 
내가 81년에 출간된 첫번째 책을 쓸 때, 거의 모든 책들이 북한과 소련을 비난했다. 미국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몰랐고, 말하지도 않았다. 나는 다행히 미 군정 시기 비밀문서들을 볼 수 있는 첫번째 비정부기관 연구자였다.
 
 
그 문서들은 70년대에 공개됐다. 나는 그 기록들을 10년간 살펴봤다. 그래서 나는 내 판단에 강한 자신감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 사람들이 몰랐던 문서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의 이성적인 사람이 그런 문서들을 읽는다면, 그들이 내 생각에 동의할 것이라고 믿는다. 내 첫번째 책의 의도 중 하나는 ‘균형’이었다.
 
 
현존하는 모든 책들이 김일성을 비판할 때였다.” 
 
 
- 당신은 한국전쟁에서 일본 강점기의 영향을 많이 강조했는데, 일본 강점기가 한국전쟁에 미친 영향은 뭔가?
 
 
 
“(일제강점기는 한국전쟁의) 주요 원인 중 하나다. 유일 원인은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다. 제국주의 기간동안 한국인들은 한국인과 싸웠다.
 
 
(일본 강점기에) 경찰의 절반은 한국에서 미움을 받았다. 식민국가의 경찰 중 절반은 한국인이었다. 샌프란시스코 대학 교수인 내 친구. 사라 서가 최근 위안부로 불리는 성노예에 대한 훌륭한 책을 펴냈다.
 
 
사라 서는 많은 한국인들이 위안부 모집에 관여했다는 걸 파악했다. 일본인들을 미워한 한국인들은 일본에 부역한 (이런) 한국인들과 싸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부역이 매우 만연했다는 거다. 또 일본은 한국을 인력 자본으로 이용했다. 수백만명의 한국인들을 산업현장, 광산, 징용 등으로 보냈다.
 
 
약 10만명의 한국인 청년들이 군에 끌려갔다. 또 한국인들의 20%가 이동했다. 빈곤, 징용 등으로 만주, 일본, 한반도 북쪽 등으로 갔다. 이주한 한국인들의 삶은 안정되지 못했고, 부조화와 불안을 야기했다.
 
 
(해방이 되자) 45년에 (일본군에 있었던 한국인) 군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첫번째 책에서 나는 여기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왜냐하면 한국 민중들은 그들이 돌아오는 것을 언짢게 생각했다. 그들은 돌아와서 정치 활동에 관여했고, 40년대 후반 많은 소란을 야기했다.일본은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 한국인들을 이용했다.
 
 
대만도 일본 식민지였다. 그러나 대만인들의 이동은 (한국인들에 비해) 매우 적다. 45년 일본에는 3만5000여명의 대만인만 있었을 뿐이다. (이에 반해) 한국인은 200만이 넘었다.
 
 
또 대만인들 상당수는 학생이거나 전문가들이었다. 일본은 한국의 인력을 광산 또는 군, 또는 성노예로 사용했지만, 대만인을 이용하진 않았다. 한국여성 1만여명이 성노예로 끌려갔다
 
 
.1920년대 일본은 3·1 운동의 여파로 유화책, 소위 ‘문화 통치’ 정책을 썼다. 이때 김성수가 동아일보를 시작하는 등 한국에서 신문이 발간되기 시작했다.
 
 
(한국인들이) 사업을 시작하고, 책을 쓰고, 결과적으로 독립의 밑바탕을 준비하는 게 가능해졌다. 그러나 30년대에 (일본은) 다시 강경책으로 선회했다. 일본에 종사했던 이들이 해방 이후 미움을 받게된 건 이때부터다.
 
 
북한은 종종 한반도 분단과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일본을 고발한다. 오랫동안 나는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일본은 (강점기 한국인) 분열책을 썼고, 이는 45년부터 50년까지(해방 이후)의 혼란을 야기하게 했다.
 
 
일본은 한국의 산업, 도로, 철도 등을 구축한 식민지 개척자이기도 하다.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서 한 것과는 비교된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 네델란드는 인도네시아에 아무 것도 건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자본을 (한국에) 가져왔고, 한국에 자본주의를 소개했다. 일본은 일본이 미개발된 한국을 발전시켰다고 말한다. 초가집에 있던 농부들을 노동자, 광부들로 만들었다고 얘기한다.
 
 
나는 오랜 기간 일본 식민주의에 영향을 미친, 일제치하에서 진행된 개발과 미개발을 강조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물음이다.

 
 
            이상..  다음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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