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석학의 토론)이승만*김일성모두'침공' 추진..북/중.소 설득해 선공(중).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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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 편에 이어서 인터뷰에서 특파원의 질문은 검정색 글씨, 커밍스의 답변은 붉은색 글씨이다.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물음이다. ”한국전쟁은 ‘국제전 성격을 지닌 내전’ 내전 아니라면 소련 붕괴때 북도 붕괴 됐어야함. - 그렇다면, 전쟁의 성격면에서 볼 때, 한국전쟁은 내전(Civil War)인가, 아니면 국제전(International War)인가?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대부분 미국인들은 베트남 전쟁을 내전으로 본다. 미국인들은 베트남에 국제문제가 개입된 걸 도외시한다. 한국전쟁에 대한 온전한 역사를 안다면, 한국전쟁 또한 내전으로 바라볼 것이다. 일본은 일제강점기동안 분열책을 썼다. 한쪽은 김일성, 다른 한 쪽은 김석원 같은 이들로 나눠. 그때 미국과 소련이 진주했다. 나는 아직도 한국전쟁의 적절한 정의는 ‘국제적 세력이 개입된 내전’으로 본다. 만일 내전이 아니라면, 북한은 소련이 붕괴됐을 때 같이 붕괴했을 것이다. 또 북한이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30년동안 지속됐다는 건 북한이 자신들의 방향이 옳다고 믿고, 자신들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만일 북한이 소련의 꼭두각시이고, 스탈린이 버튼을 눌러 김일성이 (남한을) 공격하게끔 시켰다면, 북한은 유럽에서 공산주의가 붕괴됐을 때 같이 사라졌을 것이다. 다른 말로, 북한의 영속은, 나같은 학자들에게는 북한이 소련의 꼭두각시라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민족주의 체제라는 것을 뜻한다. 북한의 영속성에 의해 이는 증명되고 있다. 오는 6월이면 70년이 된다, 70년. 그것(이렇게 분단된 상태가 오래되고 있는 것)이 한국전쟁의 비극이다. 그러나 영속성은 한국전쟁의 기본적인 속성이 내전이기 때문이다.베트남전은 한국전쟁과는 성격이 다르다. 1954년 베트남 민족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를 무찔렀고, 60년대 미국의 개입 전까지 약 10년간의 공백이 있었다. 그래서 베트남 전쟁은 베트남 내전에 미국이 개입한 것으로 보여진다. 소련과 중국은 그렇게 많이 개입하지 않았다. 한국, 중국, 베트남은 식민주의에 저항한 비슷한 경험을 지니고 있다. 이는 민족주의자와 혁명적 저항운동을 만들었다. 그래서 북한은 공산주의 중국, 베트남과 유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 당신의 책에서 나는 2차대전 이후 미국이 처음부터 남북한 분단을 꾀하려 했던 게 아니고, 마치 우발적으로 38선이 그어진 것처럼 이해했다. 38선은 계획된 것인가, 아니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인가? “한국의 분단은 아마 미국이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여한 이후 24시간만에 일어난 최악의 결정이었다. 가장 강경한 외교정책가였던 존 맥콜리는 (국무부의) 딘 러스크 등에게 한반도를 나눌 위치를 찾으라고 지시했다. 나는 러스크가 나중에 이와 관련한 증언을 하는 것을 들었다. 러스크는 미국이 서울을 차지하기를 원했다. 서울은 프랑스의 파리, 일본의 도쿄처럼 모든 것이 집중된 거대 도시다. 1945년에도 그랬다. 미국 지역에 서울을 포함시킨다는 건 미국으로선 매우 중요한 정치적 결정이다. 우리는 서울을 원했고, 그래서 38선을 선택했다. 지리학자를 제외하곤 한국인들이 이전에는 전혀 몰랐던 그 선이 영원하게 된 것이다. 미국과 소련 양쪽이 38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비록 소련은 어떤 공공문서로도 38선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남기지 않았지만. 그들은 38선 이남으로 내려가지 않음으로 해서 묵시적으로 38선을 수락했다. 그러나 소련이 한국을 분단하는 것을 직접 저지르진 않은 것이다. 그래서 38선은 미국의 결정이었다. 맥콜리와 러스크는 한국인 어느 누구와도 이를 상의하지 않았고, 동맹국들, 영국, 프랑스, 소련과도 상의하지 않았다. 매우 사려깊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 파급효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한 한국인 작가는 (38선을) 역사의 장애물로 묘사했다. 38선은 동북아시아와 한국사의 거대한 장애물이다. 대부분 미국인들은 이를 모른다. (38선의 획정은) 한-미 관계 비극 중 하나다.” - 미 군정 하에서 하지 중장은 여운형과 중도파 대신 반공주의자이자, 친미주의자인 이승만과 한민당을 택했다. 이는 소련과 북한의 존재 때문인가, 미국으로선 불가피한 선택이었는가? “하지 장군은 매우 흥미로운 존재다. 그는 반공주의자였다. 또 남부 일리노이주 출신이다. 그곳은 40년대 당시 인종차별이 매우 심했던 주였다. 흑인과 백인 학교가 분리돼 있었고, 마치 미국 남부 같았다. 그리고 하지 중장은 매우 보수적인 배경을 갖고 있었다. 하지는 45년 10월 이승만이 귀국했을 때 그를 환영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 비밀정보기구는 국무부 지시를 어기고 비밀리에 워싱턴에서 이승만을 데려왔다. 이승만은 45년 10월 도쿄에 도착해 맥아더를 만났다. 맥아더는 그에게 개인비행기를 제공해 한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하지는 10월20일 성대한 환영식으로 그를 맞았다. 이 모든 게 소련은 물론 국무부 정책에도 반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10월20일 반공적인 연설을 했다. 그리고 당연히 소련은 평양에서 김일성을 내세워 짝을 이뤘다. 분열이 매우 일찍 온 것이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공산주의를 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공산당을 경험한 적이 없다. 강한 좌익을 가져본 적도 없다. 그러나 대부분 한국인들은 40년대 대일본 저항 과정에서 자연스레 좌익 정체성을 지녔다. 미국인들은 한국과 한국인들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다. (당시) 한국인들은 많은 문제를 좌익이 해결할 수 있다고 봤다. 그리고 좌익은 애국적 아우라를 지녔다. 그래서 (당시 미국이 이승만을 택한 것은) 매우 나쁜 결정이었다. 이승만을 데려온 것이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이는 단지 상황을 더 양극화시켰을 뿐이다. 2년 뒤 하지는 이승만을 미워했다. 그는 이승만의 (대통령) 취임 전에 한국을 떠났다. 그는 이승만이 하와이의 측근들을 데려오는 걸 원치 않았다. 그는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낮았다. 심지어 하지는 부패 혐의로 몇 번이나 이승만을 체포하려 시도한 적도 있었다.이런 상황은 미국-중국과의 관계에서 조셉 스틸웰 장군과 장개석 사이에서도 있었다. 스틸웰 장군은 장개석, 이승만과 가까웠고, 이들을 지켜봤다. 미국은 잘못된 사람을 택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을 알았다. 이승만은 미국에 35년간 살았고, 반공주의자였다. 이승만은 만일 미국이 이승만을 돕지 않고, 이승만을 한국의 넘버1 지도자로 만들지 않는다면 그밖에 아무도 없다고 믿게할 수 있었다. ‘김구? 아니오. 그와 일할 수 없다. 여운형, 김규식? 아니오. 그들과도 일할 수 없다. 그들은 나처럼 강하지 않다. (오직) 나만이 한국에서 미국의 이익을 지킬 수 있다.’ 이승만은 이런 점에서 매우 효과적이었다. (이런 상황은) 한국전쟁까지 지속됐다. 53년 이승만에 대항한 쿠데타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전쟁 말기에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그는 매우 영리한 정치인이었다. 미국이 그런 사람과 함께 일한 건 실수였다. 그는 상황을 더 양극화시켰기 때문이다.하지에 대해 하나 더 말하자면, 그는 46~47년에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위원회를 설립하려 애썼다. 그러나 불행히도 너무 늦었다. 이미 양극화된 상태였다. 여운형의 딸이 (북한에서) 내게 말했다. 장택상이 47년 7월에 여운형을 암살했다고. 장택상은 당시 수도경찰청장이었다. 나는 이게 진실인지 정확히 모른다. 그러나 미군정이 장택상을 용의자로 의심했다는 건 사실이다. 46~47년의 이런 일들이 (좌우) 상황을 더 양극화시켰다. 하지는 45년 9월에 여운형, 김구, 김규식과 논의를 했어야 했다. 이승만이 아니라. 그러나 미국은 (이승만을 선택하는) 매우 나쁜 결정을 했다.” - 이승만은 한국전쟁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나? 그리고 오늘날 한국의 우파들 사이에선 건국의 아버지로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있다.“모든 나라가 건국자에겐 관대하다. 조지 워싱턴을 비판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러나 나는 역사학자는 문서에서 발견되는 것들을 다뤄야 한다고 본다. 비록 미국이 45~60년에 이승만을 지지했고, 그가 잘 하기를 원했지만, 미 정부 안에선 이승만의 부패, 측근들의 권력남용에 대한 서류가 가득찼다. 이승만은 김석원과 백인엽의 형 백상엽 등을 취임시켰다. 북한에도 일본에 종사했던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수는) 적었다. 49~50년에 이승만은 (남한이) 북한을 침공하는데 미국이 지지하도록 하기 위해 애썼다. 이건 레토릭한 선전이 아니다. 모두 문서에 있는 것들이다. 저널리스트인 윌리엄 매튜스의 기록을 보면, 심지어 전쟁 1주일 전에 존 포스터 덜레스가 한국에 왔다. 덜레스는 이승만을 만났다. 덜레스는 트루만 행정부의 대사였다. 이승만은 말했다. ‘우리는 북한을 공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우리를 도울 필요가 있다.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다’라고.역사학자는 영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영예롭게 하는 일을 못한다. 이승만은 미국의 지지가 없었다면 한국의 대통령이 될 수 없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해방 직후) 그에 대해 들은 적도 없었다. 그는 너무 나이가 많았다. 이미 70살이었고, 35년동안 나라 밖에 있었다. 그는 미국 출신의 첫번째 박사였다. 어떤 측면에선 매우 똑똑한 정치 지도자였다. 그는 한국의 파벌을 다룰 줄 알았고, 특히 미국을 다룰 줄 알았다. 그러나 보수적 역사학자들은 이승만의 진짜 행동을 보여주는 문서들에 대해 얘기해야 한다. 이승만은 김일성만큼 전쟁을 유발시켰다. 김일성은 결국 소련과 중국의 지지를 얻어냈고, 미국은 거절했다. 이게 근본적인 차이다.” - 당신의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해 일부 비평가들은 이 책이 수정주의 사관에 입각해 너무 주관적이라는 비판을 한다. 어떤 비평가들은 김일성이 한국전쟁 발발 이전에 소련에 이를 간청했다는 옛소련 외교문서를 근거로 ‘김일성이 소련의 승인없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당신의 주장이 틀렸다고 주장한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거의 20년동안 비판받아 왔다. 그러나 내 첫번째 책은 문서들을 통해 (이전의 생각을) 수정하기 위해 나왔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묻는 것은 ‘어떻게 너의 논문이 이전(의 논문들)과 다르게 만들 것이냐’는 것이다. 둘째, 조심성있게 말하자면, 내 책은 미국에서 이런 종류의 책이 얻을 수있는 최고의 상인 미국 역사학회가 수여하는 존 킹 페어북 상을 받았다. 한국에서 (내 책을) 이해하는데는 마이너한 문제와 큰 문제가 각각 하나씩 있다. 첫번째 (한국) 번역물은 터무니없었다. 내가 3~4페이지도 읽을 수 없었다. 그들(번역자)은 내가 쓴 걸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많은 은유(메타포)를 사용했다. 그리고 다소 문학적으로 쓰려했다. 그런데 이런 것들 대부분이 제대로 번역되지 못했다. 그 번역본은 아직도 소위 해적판이라고 하는 형태로 불법 유통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내가 첫번째 책에서 말한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번역을 통해 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건 마이너한 문제다.중요한 문제는 기록문서와 관련된 것이다. 90년에 두번째 판이 출간된 뒤, 소련이 해체됐다. 내가 알 수 없었던 것을 소련의 문서에는 있었을 것이다. 소련 문서들에 있는 것을 모른다고 나를 비판하는 것은 내가 미 군정기에 있는 문서들을 모른다고 한국역사학자들을 비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들은 (미국 문서에) 접근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소련 문서)에 접근하지 않았다.나는 그런(소련) 문서들이 공개되는대로 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을 침공한 첫번째 주동자는 스탈린이 아닌, 김일성이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김일성은 지속적으로 스탈린에게 지원을 간청했다. 그리고 스탈린은 그에게 제한된 지원을 허락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전면적 침략을 감행했다. 나의 가장 심한 비평가들, 캐서린 위더스비와 같은 사람도 지금은 (나의 견해를) 인정한다. 캐서린은 늘 한국전쟁이 스탈린의 전쟁이었다고 주장했다. ‘이건 스탈린의 전쟁이다. 스탈린이 단추를 눌렀다’라고. 나는 그런 주장에 내 귀를 닫았다. 왜냐하면 그게 사실일 리가 없기에. 그리고 지금 판명됐다. 게릴라 전쟁이 아닌, 국지전이 아닌, 전면적 전쟁을 치르기로 한 결정은 김일성이 내린 것이다. 김일성의 목표 중 하나는 남한을 점령해서 김석원과 같은 사람을 붙잡아 그들의 목을 비틀고 그들이 30년대에 저지른 것을 추궁하려 했다는 것이다. 김석원이 김일성의 첫번째 아내 김혜순을 살해했다는 루머가 있다. 나는 김혜순이 그의 첫번째 아내인지, 그리고 이게 사실인지 모른다. 그러나 김일성과 김석원 사이에 누군가의 죽음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한국전쟁에 대한) 주장이 옳았다고 본다. 김대중은 ‘김일성이 50년대에 한반도를 통일시키려고 했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먼저 한국, 그 다음 일본 식의 세계 공산화 전략을 추구한 게 아니었다.” - 남,북한 중 한국전쟁의 영향은 지금까지 어느 쪽이 더 심하게 받고 있느냐? “북한이 더 심하게 영향받고 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북한은 (전쟁 이후) 100만명 이상의 군을 지닌 요새 국가로 바뀌었다. 모든 국민들이 군사훈련을 받고, 지하시설물을 설치했고, 부족한 자본의 상당 부분을 군비로 쓴다. 북한은 전쟁을 위해 재조직되고 있다. 원인은 미국이 한국전쟁을 끝내려는 외교적 노력(종전협정 또는 평화협정 체결 등)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녔다. 전쟁은 오래 전에 끝났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전쟁의 효과는 정말로 북한을 군사정부로 변형시켜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남한의 경우, 65년 이래 경제발전이 됐다. 이는 남한을 계속 변모시켰다.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은 한국전쟁에 대해 생각지 않는다. 젊은 사람들은 인터넷에 몰두하고, 하이테크 산업의 일자리를 찾는다. 남한은 한국전쟁 이래로 (북한보다) 더 정상적이고 더 예측가능한 종류의 발전을 해왔다. 물론 만일 한국이 45년에 통일됐다면 한국은 더 오래 전에 안정된 상태를 찾았을 것이다. 북한은 한국전쟁 이후 깊게 영향받고 있다. 그리고 미국과 일본이 만든 (남한의) 군부가 61년에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 80년에는 전두환의 쿠데타가 있었다. 군부는 30년동안 한국정치의 주요한 인자였다. 그러나 남한은 민주화됐다. 나를 공격했던 사람들, 우익과 반공주의자들이 (이제 남한에서) 영향력이 줄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젊은 사람들은 30년전에 교과서에서 읽은 것보다 내 책을 더 믿는다. 만일 85년이라면, 나는 남한이 아직도 한국전쟁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전두환과 군부가 군부독재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를 바꿨다. 원더풀한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런 종류의 변화는 북한에도 일어날 수 있다. 어떤 형태가 될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언젠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 국제법 측면에서 보면 한국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기술적으로 정전 상태일 뿐 종전이 아니다. 총성이 멎은지 60년이 됐는데도 종전에 이르지 못하는 까닭이 뭐라고 보나? 또한 이런 현실과 관련해 구체적으로 누가 어떤 책임이 있다고 보나? 그리고 남과 북이 정전체제를 뒤로 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나? “적법성은 한국전쟁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 해리 트루만은 미국 헌법을 따르지 않았다. 미 헌법은 전쟁을 선언할 때 의회의 비준을 받을 것을 요구한다. 그는 의회 대신 유엔으로 갔다. 그리고 전쟁선언 없이 지구 건너편으로 50만명의 미군을 보낸 첫번째 대통령이다. 린든 존슨 대통령도 베트남전에서 그렇게 했다. 조지 H.W.부시, 조지 부시도 이라크전에서 그렇게 했다. 4번의 주요한 전쟁에서 미국은 전쟁선언없이 전쟁을 시작했다. 미국 헌법에 따르면, 모두 불법이다. 53년 한국전쟁이 끝났을 때, 아이오와주 법원은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판결을 내렸다. (하하하) 그건 경찰 출동이었으니까, 전쟁으로 불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합법성이란 한국전쟁에선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나는 김영삼과 빌 클린턴이 4자회담(남북한, 미국, 중국)을 했을 때인 90년대에 평화협정을 맺는 것이 (지금보다) 더 쉬웠을 거라 생각한다. 북한은 평화조약(treaty)의 요구를 포기했다. 미국 헌법에서 조약은 상원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아마 상원이 이를 거절하리란 걸 알았다. 그래서 북한은 평화협정(agreement)으로 바꿨다. 불행히도 이마저도 이뤄지지 않았다. 평화협정이 한국전쟁을 법적·기술적 관점에서 끝낼 것이다. 그러나 평화협정이 남북한 사이의 대치까진 끝내지 못할 것이다. 한국전쟁을 끝내려는, 남북한 대치를 끝내는 가장 큰 노력은 김대중이 취임했던 98년 2월부터 노무현 정부로 이어진 지난 10년간이었다. 남북관계 진전의 가장 큰 성취가 이들에 의해 이뤄졌다. 그러나 불행히도 90년대 후반 미국이 이런 (한국에서의) ‘진전’과 나란히 가지 않았다. 그 결과 2001년 이래로 (남북관계에서) 거의 진전이 없었다. 그리고 북한은 지금 핵보유국이라고 주장한다. 90년대 후반의 (남북관계) 진전이 지난 20년간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건 매우 불행한 일이다. 다음편. 마지막 (하)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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