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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역사를 지켜보면서..06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33 2020-01-21 18:58:54

05편에 이어서~~


 

 

나는 내 운명에 대해서는 시대의 흐름에 맡기고 내 행동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겸허히 맡기려고 한다. 이제 나의 여생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나는 스스로 정치에 실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어느 한편에 서서 이익을 볼 생각은 조금도 없다. 또 오래 살고 싶지도 않다. 나의 두고 온 가족들은 내가 오늘부터 이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해주기 바란다. 가능하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위하여 미력한 힘이나마 기여하고 싶다.



이번에 일본을 방문하여 조총련의 존경하는 벗들이 진심으로 환대해준 데 대해 감사히 여기며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나를 아는 모든 벗들이여, 나를 죽었다고 생각하기 바란다. 중국에서 말썽을 일으켜 사랑하는 중국의 벗들에게 폐를 끼치게 된 데 대해서도 죄송하기 그지없다.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은 중국외교부에 김덕홍과 나의 망명사실을 통보했다.



그때가 오전 11시 30분이었다. 오후 5시 30분, 한국정부가 김덕홍과 나의 망명신청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고 전해 들었다. 망명을 신청하면서 나와 김덕홍이 가장 걱정한 것은 중국정부가 우리의 한국 망명을 과연 승인해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중국의 문화를 사랑하고 중국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으며, 중국과 북한 간의 친선을 조금이라도 더 강화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그래서 중국 수뇌부에서도 나에 대한 감정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의 국가적 이익의 견지에서라면 나와 김정일을 바꿀 수 없을 것이고, 김정일이 강하게 반대할 경우 중국정부는 우리를 북한으로 돌려보내거나 제3국으로 보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보도를 통해 다 알다시피 우리가 망명신청을 하자, 북한은 수백명의 보위부 요원들을 동원하여 중국경찰의 경계망을 뚫고 한국총영사관으로 진입하려고 두어 차례 시도했으나 저지당했다.



중국정부는 1,200명의 무장경찰과 장갑차를 동원해 경비를 강화시켜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 점은 우리에게 행운이었다. 몇 해 전 평양의 러시아 대사관으로 망명을 신청하러 간 무장하사관이 보위부 요원들에게 사살당한 예 에서처럼, 북한이 우리를 사살하려 했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북한보위부 요원들의 의도를 파악한 한국대사관에서도 가능한 한 경비에 만전을 기했다.



그래도 위험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와 김덕홍이 들어 있는 방 맞은편이 바로 콩고 대사관이었기 때문이다. 콩고는 북한과 관계가 좋은 편이라서, 우리는 북한이 그 대사관을 이용하여 저격을 시도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한국대사관에서는 우리의 신변안전에 더욱 신중을 기하기 위해 중국공안측에 영사관 주변의 경비강화를 요청하고, 창문에 외부로부터의 총기 공격 등에 대비할 수 있는 철판을 설치하는 등 만일의 사태 대비에 만전을 기했다.



대사관측의 노력으로 조금은 안심이 되었지만, 그 대신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아 밤낮으로 불을 켜놓고 있어야 했다. 게다가 잠시도 방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쐴 수도 없었다. 나와 김덕홍은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샤워 때 외에는 아예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개죽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갑갑하게 지내는 것쯤이야 아무 일도 아니었다.

 

대사관에서는 북한측에 의한 독약 투입에 대비해 외부에서 음식을 반입하지 못하도록 하고, 영사관 구내에서 만든 요리도 검사를 한 뒤에야 식사를 하도록 했다. 2월 21일부터는 한국정부에서 요리사가 파견되었다. 며칠간은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만, 중국정부가 한국정부에 협상할 용의를 표명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는 가족들에 대한 걱정으로 가슴을 조였다.



잠약(수면제)을 먹어도 아내와 자식들의 걱정하는 모습이 떠올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시 일어나 잠약을 한 알 더 털어 넣고서야 겨우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가족을 걱정하는 것처럼 가족들도 나와 똑같은 심정으로 내 걱정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내가 마음속의 안타까운 심정을 덕홍에게 어찌나 호소했던지, 우직하기만 한 그마저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가족얘기는 꺼내지도 않으면서 나를 위로하는 것이었다. “형님, 가족들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서울에 가면 길이 있을 겁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는 너무도 부끄러웠지만, 혼자 있으면 다시 가족들 걱정으로 마음을 졸였다. 나와 덕홍은 가족들의 생명을 희생시키더라도 민족을 구원해야 한다고 맹세했었다.



그런데 막상 일이 터지고 나자 내 가족만 걱정하면서 덕홍을 귀찮게 하고 그의 가족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으니, 이러고도 형 될 자격이 있으며 애국자로서의 의지를 간직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수치심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가족사진을 더 이상 보지 않으려고 아예 트렁크 깊숙한 곳에 갈무리했다. 하지만 그래본들 문득 문득 떠오르는 가족들의 얼굴은 트렁크에 넣을 수 없었다.



특히 먹을 것이 있을 때면 그리움이 더했다. 대사관에서는 내가 사탕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는 그걸 이따금 가져왔다. 쟁반 가득한 사탕을 덕홍이와 같이 먹을 때는 별로 못 느끼지만, 혼자서 먹노라면 두 돌이 되어가는 손자 지성이가 작은 입을 벌리고 ‘아, 아’하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려 차마 목에 넘어가지가 않았다. 지성이는 식사 때면 내게 늘 그렇게 다가와 밥을 먹여달라고 했었다.



부끄러운 고백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만일 평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처지였다면 그 남은 사탕을 대사관에 그냥 두고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사관 직원들의 의견도 한가지는 아니었다. 중국정부가 우리의 망명을 국제관련에 따라 처리할 것이라는 희망적인 의견이 있는가 하면, 어쩌면 그쪽에서 망명 처리를 오래 끌지도 모른다는 어두운 의견도 있었다. 끌면 얼마나 오래 끌 것 같으냐고 물었더니 6개월 내지 1년을 끌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대사관은 대한민국 영토나 다름없으며 중국정부로서도 우리를 강제로 끌어낼 수는 없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그렇다면 좋다, 6개월이고 1년이고 영사관에 있다가 한국으로 망명이 실현되면 좋고 여의치 않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평양에서 독약을 구한 뒤로는 이상하게도 늘 마음이 평온하고 한편으로 든든하기도 했다.

 

 

 

             이상..    07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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