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과 성장, 내 고향 삼청동 나는 1923년 1월 23일(음력 1922년 12월 7일) 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광청리 삼청동에서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러나 출생 신고를 늦게 하여 호적에는 1923년 2월 17일로 등재되었다. 아버지 황병덕은 평안남도 대동군 청룡면 이현리에서 출생하여 줄곧 그곳에서 살다가, 1910년 강동군 광청리로 이사하여 서당을 열고 학동을 받아 한문을 가르치면서 식구들을 부양했다.
어머니의 이름은 이덕화이며, 평양시 교외의 고방산 노화동 태생이었다. 나를 낳을 당시 아버지는 41세, 어머니는 46세였다. 증조부와 외조부는 한학자였는데, 서로 친분이 두터워 사돈을 맺었다고 한다. 조부 황유문은 증조부의 3남이었다. 아버지는 삼청동으로 살림을 나왔지만 조부는 백부 황병헌과 함께 이현리에 눌러 살았다.
맏누이의 이름은 황승조로 1908년생이었다. 그러나 누이는 6.25전쟁 때 폭격으로 사망했고, 매부 왕훈병은 4년제 소학교를 졸업한 탄광노동자였다. 형 황승엽(황승길이라고도 불렸다)은 1913년생으로 6년제 소학교를 졸업하고 철도역 급사를 거쳐 보험회사 사무원으로 있다가 1942년에 해방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둘째누이 황길조는 1915년생으로 1996년에 죽었는데, 매부 김종환은 6년제 소학교를 졸업한 후 화물차 운전기사를 하다가 6.25때 단신 월남했다.
내 유년의 추억이 잔뜩 서린 광청리 삼청동은 20여 호가 모여 사는 아늑하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그 마을에서 우리 집은 두 번째 부자로 통했는데, 가장 낫다는 집이 우리 바로 앞집 임씨네였다. 그 집은 우리 동네에서 유일한 이층집이기도 했다. 우리가 경작하던 밭은 2천 평가량이었는데, 아버지의 생가가 있던 이현리에 아버지 명의로 된 밭이 또 있었다.
그 밭은 삼촌이 경작하면서 조부모님을 모셨는데, 매년 추수철이 되면 김장할 배추나 무와 겨울을 날 식량을 삼촌이 가져오곤 했다. 형은 승호리의 4년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미림에 있는 6년제 보통학교를 더 다녔다. 집에서 미림까지는 20리가 넘어, 형은 학교에 가자면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서야 했다. 그런 까닭에 어머니는 늘 새벽에 조반을 지었고, 그래서 식구들의 아침식사도 다른 집보다 일렀다.
아버지는 나를 다른 아이들처럼 보통학교에 입학시키지 않고 다섯 살 때부터 당신의 서당에서 ‘통감’2권까지 가르쳤다. 신학문을 해야 한다는 주변의 얘기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먼저 한문을 배우는 것이 좋다면서 당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버지는 술은 못했으나 담배는 즐겨 피웠다. 그래서 당시 법으로 금지된 담배를 산에 몰래 심었다가 가을에 은밀히 거두어 오기도 하고, 그 잎담배가 떨어지면 ‘희연’이라는 이름의 봉지담배를 사서 피우기도 했다.
아버지는 서당 훈장과 농사일 외에도 당시로서는 드문 양봉을 쳤다. 열다섯 통쯤이라고 기억되는데, 그 덕택에 다른 집에서는 귀한 꿀을 우리 식구들은 필요할 때 쓸 수 있었다. 어머니는 기억력이 보통 좋으신 분이 아니었다. 어깨너머로 배운 천자문을 줄줄이 외우고 동네 아이들의 생일을 대부분 기억할 정도였다. 게다가 인정도 남달라서 동네 아이들의 생일날 아침에는 늘 어머니에게 동네 개 물 안 먹는 것까지 걱정한다고 놀려줄 때가 많았다.
형은 아버지를 닮아 외모가 수려한 편이었다. 그러나 성격은 어머니를 닮아 나와 달리 인정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형은 의협심이 강하고 자존심 또한 대단했으나, 한 가지 흠은 자잘한 일에 신경질을 낸다는 점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외모에 성격은 아버지를 닮아, 평생 한 우물을 파면서도 지루한 줄을 모르는 철학자형 인간이었다.
적어도 북녘 땅을 떠날 때까지는 아버지가 그랬듯이 나 역시 큰 후회도 부담도 없는 삶을 지향해왔다. 형은 광주학생사건 당시 미림보통학교 6학년이었다. 그런데 이 학교에서 독립만세를 주도한 혐의로 교사들에게 붙들려 곤욕을 치렀다. 그 와중에 일본인 장교에게 곤봉으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았다고 한다.
형은 그 일이 있은 후 한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다. 그러고도 후유증으로 몇 년을 더 고생했는데, 심할 때는 며칠씩 누워 움직이지도 못했다. 젊디젊은 나이로 죽기까지 형은 늘 두통에 시달렸는데, 결국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병을 앓다가 내가 토오쿄오에서 대학을 다닐 때 죽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후로는 형을 보지 못했는데, 그동안 보내준 후원에 고맙다는 말 한 마디 못하고 혈육4의 따스한 정 표시 한 번 못 했던 터라, 그렇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니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어릴 적 우리 두 형제는 자존심이 남달리 강하다는 것 말고는 외모가 다르듯이 성격 또한 확연히 달랐다.
또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양도 서로 달랐다. 어머니는 늘 형을 감싸고 돌았고, 아버지는 나를 형과는 상대가 안된다면서 높이 평가하고 극진히 아꼈다. 아버지는 또 둘째누이를 영리하고 똑똑하다면서 사랑했다. 둘째누이는 학교나 서당에 다닌 적이 없는데도 형과 나의 어깨너머로 배워 국문은 물론 일본어까지 읽을 수 있을 만큼 영특했다. 그 누이도 나를 아꼈고 나도 둘째누이를 맏누이보다 좋아했다.
형은 그런 나와 둘째누이를 자주 때리면서 못살게 굴었다. 둘째누이와 나는 형에게 대들지는 못했지만 보대낌을 덜 당하기 위해 힘을 합치고는 했다. 어려서 그랬겠지만, 둘째누이와 나는 형을 감싸고 도는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더 따랐다. 당시 겨울은 지루한 계절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저녁을 먹기 무섭게 마실을 다녔는데, 주로 우리 집으로 모였다. 오지 않는 사람들은 동네에서 소문난 투전꾼들뿐이었다.
이상.. 11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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