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에 이어서~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에서 마치 조선 사람들이 《열악한 민족성》때문에 망한 것처럼 말하였는데 조선이 망한 것은 낙후한 민족성 때문이 아니라 통치배들의 부패무능 때문이었다. 조선 민족이 《열등》하다고 개탄하는 이광수의 논조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논조와 일맥상통하였다. 일본 사람들은 입만 벌리면 우리 민족을 《열등한 민족》이라고 비방하였다.
《열등》하기 때문에 일본이《보호》,《지도》,《통제》해야 한다고 떠들었다. 《민족개조론》은 일본 제국주의 강점자들에게 보내는 이광수의 공개 전향문이나 다름없었다. 이 전향문을 쓴 대가로 그는 지난날 독립운동에 참가한 사람으로서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총독부 코앞에서 버젓이 올방자를 틀고 앉아 연애소설들을 써내고 있었다. 소설가로서의 이광수는 초기에 독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대중이 그를 사랑한 것은 그가 독자들의 구미에 맞는 진보적인 작품을 써왔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나라 현대소설의 개척자라고 불리울만큼 새로운 양상의 소설을 많이 써냈다.
그러나 《민족개조론》으로 하여 이광수에 대한 대중의 애정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의 소설작품들에서 엿보이던 개량주의적 요소가 완전한 자기의 형체를 가지고 이 논문에 등장한 것이다.
민족운동을 개량주의의 방향으로 유도한 근대 지식인들은 심지어 국채보상운동을 통하여 모은 돈으로 조선 사람이 주관하는 민립대학까지 설립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총독부는 독립인재양성의 온상으로 될 수 있는 민립대학의 설립을 허가해주지 않았다. 비폭력적인 물산장려운동도 역시 일제의 저항에 부딪쳤다. 조선 사람이 일본이 내려 먹이는 상품을 쓰지 않고 국산제만 사용하는데 대하여 총독부가 눈을 감아줄리는 만무한 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이 운동을 일화배척의 목적을 가진 반일운동으로 보고 독을 품고 방해하였다. 실력양성의 간판 밑에 진행된 개량주의운동은 이념상에서는 애국애족을 표방하였으나 방법상에서는 비폭력을 전제로 하는 보수적이고 소극적인 저항운동이었다.
총독부가 허용하는 한도에서.. 민족의 경제력을 육성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경제적 침략에 대항하려는 그들의 지향은 사실 망상이나 다름없었다. 일본이 자기를 매장할 민족산업의 발달을 용허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초보의 초보에 속하는 상식인데 기업을 창설하고 국산품을 애용하면 민족의 살 길이 열린다고 생각하였으니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는가. 개량주의길로 타락한 민족운동자들은 제국주의 속성을 옳게 보지 못하였거나 외면하였다. 그들이 무력항쟁으로부터 방향을 바꾸어 평화적인 문화운동으로 이행한 것은 투쟁방법상에서의 후퇴를 의미하였다.
그것은 식민주의자들과의 평화적 공존이나 타협을 전제로 하는 운동이었다. 평화적 공존이나 타협 속에서는 어차피 변질현상이 생기기 마련이다. 실지로 개량주의자들 가운데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훗날 민족운동대열에서 도피하든가, 전향하여 일제의 앞잡이가 되었다. 자강론의 변형인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준비론이라고도 함)은 민족개량주의자들이 의거하고 있던 이론적 지탱점이었다.
그는 조선 민족을 세계에서 정신적 수양이 가장 낮은 민족이라고 하면서 우리 민족이 적어도 미국이나 영국 사람들만큼 때벗이를 해야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까지 하였다.
강연장의 분위기를 보니 대부분의 군중이 그의 주장에 공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연설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물론 그의 강연내용은 일구일언이 다 애국의 정신으로 관통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발언에서 민중의 투쟁의욕을 거세할 수 있는 위험한 요소들을 발견하고 실망하였다. 총체적으로 볼 때 그의 주장에는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점들이 있었다.
각자가 자기를 수양하고 인격을 높이며 그에 토대하여 민족의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안창호의 주장에는 나도 동감이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을 세계적으로 정신적 자질이 가장 낮은 민족이라고 한 그의 견해와 실력양성을 위한 개량주의적 방법론에는 도저히 찬성할 수 없었다. 실력양성은 어디까지나 독립투쟁을 추진시키는 하나의 과정으로 되어야지 그 자체가 혁명전체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안창호는 독립투쟁을 실력양성으로 대신하려고 하였다. 실력이 양성된다고 하여 독립투쟁이 저절로 진척되는 것은 아닌데 그는 민족의 역량을 어떻게 조직하고 그것을 종국적인 승리의 길로 어떻게 동원시켜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특히 민족해방투쟁의 기본형태로 되어야 할 폭력투쟁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입에 담지 않았다. 만주에서 독립의 기초로 될 수 있는 산업을 진흥시킨다는 것도 역시 문제가 있었다. 국권을 잃은 민족에게 발전소를 건설하라고 차관을 줄 사람이 과연 어디 있겠는가.
온 강토가 일제의 손아귀에 들어갔는데 설사 열강들이 차관을 준다 하여도 이국땅에서 어떻게 발전소를 세우고 벼농사를 착실하게 할 수 있겠는가. 또 일제가 조선 사람들이 그렇게 하라고 가만 내버려 두겠는가. 나는 강연을 듣다못해 더 참지 못하고 안창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종이에 써서 들이대었다.
―산업과 교육을 진흥시켜 조선 민족의 실력을 배양해야 한다고 했는데, 나라를 일제놈들에게 통째로 빼앗긴 조건에서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우리 민족을 정신수양이 낮은 민족이라고 했는데 어떤 점이 그러한가?
― 연사가 말하는 열강이란..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들인데 과연 우리가 그들을 본받아야 하는가? 또 우리가 그들의 《원조》에 의해서 독립을 가져올 수 있는가?
질문 쪽지는 앞에 앉은 학생들과 사회자를 거쳐 안창호에게 전달되었다. 반발심에 못 이겨 단호하게 서면 질문을 들이대기는 하였으나 막상 사회자가 불안한 표정으로 학생들이 앉아있는 쪽을 주시하는 모습을 보게 되니 사실 그때의 내 심정은 복잡하였다.
그 질문 때문에 강연 중에 있는 연사가 불쾌한 자극을 받게 된다면 안창호를 숭배하고 있는 독립운동자들과 수백 명의 청중들에게 큰 실망을 주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생기었다. 안창호의 강연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게 되면 그의 강연을 위해 남다른 성의를 보인 오동진도 서면 질문의 장본인인 나를 고깝게 생각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런 결과는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안창호에게 서면 질문을 들이댄 것은.. 그가 우리의 질문을 받고 잠깐만이라도 자기의 주장을 검토하여 민족의 자존심과 자주정신에 배치되는 유해로운 사상을 그 이상 더 먹이지 말았으면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독립운동의 대선배로 존경받는 안창호에게서 그가 청중에게 채 말하지 않은 독립운동의 새로운 지침이나 방략을 듣고 싶은 욕망을 억누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태는 내가 예상한 것보다 크게 번지였다. 안창호는 쪽지의 글을 한참 동안 내려다 보고 나서 사회자에게 무엇인가 몇 마디 물었다. 훗날 손정도에게서 말을 들으니 그날 안창호는 사회자에게 질문 쪽지에 김성주라는 서명이 있는데 그런 사람을 아는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처럼 도도한 기상을 가지고 장내를 쥐락펴락하던 안창호의 연설이 그만 김이 빠져버리었다. 안창호는 조금 전까지 일사천리로 펼쳐나가던 강연을 성급하게 마무리짓고 연탁 앞에서 황황히 물러섰다.
연사는 매우 심각하게 질문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 좀 자극이나 받으라고 그런 질문을 했는데 안창호 자신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고 강연을 중도에서 스스로 포기해 버린 것이었다.
실망한 청중은 도산 선생이 왜 갑자기 저렇게 주접이 드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출입문 쪽으로 밀려나갔다.
그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길림독군서에서 수백 명의 헌병과 경찰을 동원해 가지고 강연회장에 불시에 달려들어 300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체포했던 것이다.
연사인 안창호는 물론, 현묵관, 김리대, 이관린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자들이 한꺼번에 무리로 붙잡혀 경찰청에 구금되었다. 이 대검거사건을 조종한 것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구니도모였다. 안창호의 길림도착과 때를 같이하여 봉천에 나타난 구니도모는 중국 헌병사령관 양우정에게 수백 명의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길림에 모였으니 이를 체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양우정의 명령에 따라 길림독군서의 경찰들과 헌병들은 구니도모의 조종 밑에 조선 사람들의 가택을 수색하는 한편 대동공창에 달려들어 유례없는 대검거작전을 벌리었다.
우리는 안창호가 비록 강연은 잘하지 못했지만 적들이 그도 포함하여 수백 명의 조선사람들을 붙들어간 데 대해서는 치솟는 격분을 누를 수 없었다.
더구나 서면 질문 끝에 강연이 중단되고 강연이 중단되는 동시에 안창호가 체포되어가니 나로서는 이런 연쇄반응의 책임이 마치 서면 질문에라도 있는 듯한 느낌까지 들어 괴로운 생각을 털어버릴 수가 없었다. 중국 동북지방을 통치하고 있던 장작림 군벌은 《미쯔야협정》으로 일본과 손을 잡고 조선의 공산주의자들과 반일독립운동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있었다.
이 협정은 만주지방에서 조선민족 해방투쟁의 근원을 없애기 위한 악질적인 협정이었다. 이 협정에 의하여 조선인 애국자들을 체포하는 졸개들에게는 상금까지 주었다. 중국의 일부 반동관헌들은 상금을 타먹으려고 허위 밀고까지 하였다.
대동공창에서 벌어진 집단적인 검거소동도 역시 장작림군벌이 일제의 사촉을 받아서 감행한 반동적인 폭압행위였다.
우리는 즉시에 《ㅌ.ㄷ》성원들의 회의를 열고 붙잡힌 사람들을 석방시키기 위한 대책을 진지하게 토의하였다. 그 걸음으로 독립운동자들을 찾아가 그들과도 체포된 사람들을 빼내올 방법을 의논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넋을 잃고 앉아있을 뿐 속수무책이었다.
우리는 모두 단결하여 길림독군서에 압력을 가하면 안창호 선생은 물론, 체포된 사람들을 다 빼내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군중의 힘을 동원하는 것이 제일 위력하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였다.
독립운동자들은 맨주먹밖에 없는 자네네가 무슨 재간으로 그 무지막지한 독군서놈들을 굴복시키겠는가, 군중이 나서서 떠드는 것보다는 돈이나 뇌물이 더 맥을 추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대중의 힘을 잘 믿지 않는 타성이 그 때에도 나타났다.
나는 돈으로 통하지 않는 것도 군중의 단결된 힘으로 능히 해결할 수 있다고 그들을 꾸준하게 설복하였다. 그런 다음 손정도가 운영하는 길림 예배당에서 시내의 독립운동자들과 조선인 유지들, 청소년 학생들이 참가한 군중집회를 가졌다.
우리는 집회참가자들에게 독군서가 왜놈들과 한 짝이 되어 조선의 애국자들과 무고한 동포들을 무리로 붙잡아갔다는 것을 설명한 다음, 그들이 이제 몇 푼의 돈을 받아먹는 대가로 체포해 간 사람들을 일본 경찰에 모조리 넘겨줄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였다. 조선의 애국자들이 왜놈들 손에 넘어가는 날이면 무자비한 처형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인데 겨레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조선 사람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단결하여 애국자들을 구원하기 위한 대중적 석방운동에 떨쳐나서자고 호소도 하였다. 우리가 안창호에 대한 석방운동을 벌리자 적지않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고개를 기웃거리었다.
민족주의자들은 물론, 공산주의운동을 한다는 사람들과 심지어는 우리의 영향을 받고있는 청년학생들 속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안창호의 이론에 대하여 서면 질문까지 들이댄 사람들이 왜 이번에는 그를 구원하지 못해 그렇게 애를 쓰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안창호의 사상을 문제시하는 것이지, 안창호란 인간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안창호도 조선 사람이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애국지사인데 어떻게 그를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고 설복하였다.
나는 그때 수난당한 조선 민족은 어려운 때를 당하면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는 대의명분을 앞에 내세웠다. 내가 안창호의 강연을 반박한 것은 그들이 사대주의적이고 민족허무주의적이며, 개량주의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조국을 광복하는 성스러운 싸움에 더 적극적으로 투신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민족주의자들과 사상 투쟁을 한 것은 그들을 타도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깨우쳐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반일의 기치아래 묶어 세우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안창호 석방을 위한 군중집회가 있은 다음, 길림의 담벽과 전주대들에는 《중국 경찰이 근거없이 조선 동포들을 붙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어 놓고 박해한다.》,《중국 관헌은 일제의 간계에 속지 말라!》,《감옥에 갇힌 조선 동포들을 하루빨리 석방하라》는 내용의 삐라와 격문들이 나붙었다.
우리는 중국의 각 신문사들에도 글을 써 보내어 사회여론을 환기시켰다. 길림 시내의 청소년들과 군중들은 매일과 같이 독군서에 몰려가 감금된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외쳤다.
어떤 날에는 독군서 앞에서 시위도 벌리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 중국의 반동군벌이 체포해간 조선의 독립운동자들을 일제의 손에 넘겨주지 못하게 하려고 있는 힘을 다하였다. 독군서는 군중의 압력에 못 이겨 20여 일 만에 안창호를 비롯한 구속자 전원을 석방하였다. 긴장된 투쟁 끝에 얻어진 안창호의 석방은 나를 몹시 기쁘게 하였다.
우리는 자유로운 몸이 되여 동료들의 곁으로 돌아온 안창호를 만나려고 독립운동자들을 찾아갔다. 나는 그가 질문에 담겨진 우리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를 은근히 기대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감옥에서 나오자 바람으로 총총히 길림 땅을 떠나가 버렸다. 그가 어떤 심정으로 상해에 돌아갔는지 똑똑히 알 수 없지만 나는 그가 정신을 가다듬고 새로운 기분으로 길림을 떠났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애국자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 최후의 순간까지 모든 시련을 감당해낸 그 후의 그의 생활이 그것을 증명해 주었다. 안창호가 길림을 떠난 후 나는 한번도 그를 만나지 못하였다.
10여 년이 지난 후 우리가 백두산 쪽에서 무장투쟁을 할 때 안창호는 일제놈들에게 체포되어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최후를 마쳤다.
나는 그때 그 소식을 듣고 평생을 민족의 계몽과 단합에 바쳐온 안창호가 독립의 날을 보지 못하고 일찍이 떠나간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별스럽게 맺어졌던 안창호와의 인연이 그것으로 완전히 끊어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안창호는 갔지만 그의 여동생 안신호가 해방 후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우리와 함께 일하였다. 해방 후 조국에 개선한 나는 국내에서 활동하던 애국지사들을 통하여 안창호의 누이동생이 남포 방면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다.
그 당시 남포 지구에서는 김경석 동무가 파견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안신호를 찾을 데 대한 과업을 주었다. 며칠 후 남포에서 안신호를 찾았다는 통보가 올라왔다.
김경석 동무에게 전화로 그 여자의 경향이 어떤가고 물으니 그는 밤낮 성경책만 끼고 다니는 여자인데 독실한 신자 같다고만 대답하였다. 나는 안신호가 이름난 애국열사의 동생이기 때문에 종교를 믿어도 애국심만은 있을 것이니 당적 영향을 주면서 잘 이끌어 보라고 김경석 동무에게 말하였다.
김경석 동무는 알겠다고 대답하면서도 별로 시답지 않아 하였다. 신자들이라면 덮어놓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때여서 우리가 그렇게 누누이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을 경원시하는 폐단이 쉽사리 없어지지 않고 있었다. 몇 달 후 김경석 동무는 나에게 안신호가 입당하였다는 것과 그가 성경책 속에 당증을 넣어 가지고 다니면서 새 조선 건설에 헌신분투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안창호의 애국혼은 결코 지하에만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조국과 인민을 위해 성실하게 일하는 안신호의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는 독립인사로서의 안창호의 파란 많은 일생을 생각했고 생전에 그가 민족을 위해 바친 노고를 더듬어보며 감개무량해지는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일생을 반공으로 살아온 김구는, 남북연석회의때 북반부에 들어와 안신호를 만나보고 놀랐다. 공산주의자들이 상해 임시정부 거물의 누이동생을 중앙여맹부위원장으로 등용시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모양이다.
안신호는 그의 젊은 시절의 애인이며 약혼녀였다. 안신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곧 안창호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것은 또한 이념이나 신앙을 초월하여 민족이라는 하나의 울타리 속에서 애국애족이 유대에 의해 혈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독립운동의 모든 선배들에 대한 우리의 예절이며 인사이기도 하였다.??
이야기는 거창하다.. 이 글은 김일성의 죽기전 회고록이다. (『세기와 더불어』)1, 조선로동당출판사, 1992년.. 의 글에 한 부분이다. 이 글들이 과연 진실인가? 거짓인가? 만약 진실이면 진실이 몇% 일까? 여러가지로 생각할수있다. 그런데 중요한것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학자나 전문가들의 글 이나 논문등을 보면 사실에 가깝다. 아예 사실이다.. 이런 흐름으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고 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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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김일성의 회고록을 공개적으로 선전허시네요.
이런걸 공개하는 이유가 뭡니까?
혹시 김일성 가문의 반일정신과 위대성 선전이라도 하실 작정입니까?
탈북자들은 북한에서 부터 다아는 내용이니 이런짓거리 그만 두시오.
마침 내가 북한학과를 전공하고, 내가 대학을 다녔던 시대는 특히 김일성과 관련하여 대부분 배웠으므로 이렇게 아는대로 작성하는데..
이게 나쁜겁니까? 나는 당당합니다. 당신이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할 권리는 없는 것입니다. 이게 자유민주주의 의 어론자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