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의 전반화 팩트) 이승만이 살아온 길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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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정확한 지식. (이승만이 걸어온 삶) *** 반공 잘하면 친일까진 용서해 준 이승만, 친일파는 등용하고 일본은 싫어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자기에게 득이 되는 길만 찾았던 최악의 대통령. 미국 체류시절엔 국적 일본으로 표기 제3대 국회의원 총선거 즈음부터 시작합니다. ? 자유당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이승만이지만 1954년 5월 20일 있을 총선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자유당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이미 두 차례의 총선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 이승만은 이번에야말로 완승을 거둬 국회라는 입법 기관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고자 했지요. 그러나 자유당의 공천을 받은 신입당원들은 정치적 역량이 미약했고, 더군다나 친일파 출신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이범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출신 인사들이 이승만의 측근 세력을 형성했기에 친일파가 권력의 핵심으로 진입하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하부조직에는 경찰을 필두로 한 친일파가 우글우글하기는 했으나 공개적으로 이들을 정계에 입문시키는 것까지는 무리였지요. 초대 내각 중 친일경력을 가진 이가 윤치영 하나뿐이었던 건 이 때문입니다. ? 그러나 이승만 스스로가 명망 있는 인사들을 내친 만큼 자유당 내에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자유당의 총선 승리를 위해선 만연한 반일감정을 어떻게든 억눌러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이승만은 친일파와 관련된 하나의 담화문을 발표합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왜정시대에 무엇을 한 것을 가지고 친일이다 아니다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때 뭘 했든지 간에 그때 친일로 지목된 사람이 지금부터 무엇을 할 것인가를 그 사람의 의사와 행동으로 표시되고 안 되고에 친일이다 아니다 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이다. 가령 이전에 고등관을 지내고 또 일본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일한 사적이 있을지라도 그 사람이 지금 와서는 그 죄를 탕감 받을 만한 일과 사실이 있어 가지고 모든 사람이 양해를 받을 만한 일을 해서 그 사람이 진정으로 친일 아니다 하는 것을 증명 받을만하면 전에 일은 다 불문하고 애국하는 국민으로 인정하고 대우해 줄 것이다.) 이제까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알게 모르게 친일파들과 협력관계를 구축했고, 이승만도 그런 독립운동가 중의 하나였지만, 이처럼 국민 앞에서 분명하게 면벌을 천명한 사례는 이 담화문이 최초입니다. 물론 이 담화문에서 말하는 ‘죄를 탕감 받을 만한 일’ 과 ‘양해를 받을 만한 일’은 그 친일파가 얼마나 정부의 요구에 부응했느냐입니다. 즉 반공이지요. 동시에 이승만은 장차 대통령 선거에서 경쟁자가 될 만한 상대의 정치생명을 끊어버리려는 노력도 병행했습니다. 원내자유당의 리더였던 오위영, 한때 이범석과 함께 이승만 정권의 양대 세력으로 칭해졌던 허정이 선거활동 방해를 당한 대표적인 예입니다. 울산에서 입후보했던 오위영은 경찰의 지속적인 방해로 중도에 선거활동을 포기해야만 했지요. 허정은 집요한 공격을 당하면서도 선거활동을 이어가고자 했는데, 선거 운동원 중 한 사람이 의문사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난 뒤에야 선거활동을 포기하게 됩니다. 아예 후보자 등록 단계부터 방해활동을 한 예도 있습니다. 민국당의 당수인 신익희가 이런 일을 당한 케이스인데, 그의 상대는 훗날 내무부 장관에 오르는 최인규였지요. 흥미로운 건 최인규가 사전 여론조사를 한 일이 있는데, 자신이 신익희보다 우세하다는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이 결과를 보고 안심한 최인규는 더 이상의 선거 방해를 지시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여론조사 결과가 무색하게 실제 선거 결과 신익희가 승리하게 됩니다. 여론조사가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지요. 오위영, 허정, 신익희 이상으로 선거 출마를 방해하고자 했던 이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2대 대통령 당시 이승만에 이어 득표율 2위를 기록한 조봉암입니다. 그 또한 선거 출마 자체가 봉쇄된 경우에 해당했습니다. 본래 자신의 출생지인 인천에서 출마하고자 했으나 조봉암의 후보등록 서류는 자유당의 개입으로 탈취당하지요. 조봉암은 차선책으로 부산과 서울 서대문, 두 지역에 동시에 등록하는 양면작전을 구사했으나 이 또한 경찰의 방해로 실패합니다. 이처럼 제3대 국회의원 선거는 경찰이 노골적으로 개입했기에 ‘곤봉선거’라고도 불립니다. 선거의 향방을 결정짓는 것은 유권자들의 표심이 아니라 경찰이 휘두르는 곤봉이었지요. 결국 이 선거에서 이승만의 자유당은 114석의 의석을 확보하며 국회 내 과반석을 차지하는 승리를 거둡니다. 제1야당인 민국당의 당선자는 이전 선거보다 더 줄어 15석에 불과했지요. 무소속 당선자 또한 이전에 비해 절반 수준으로 감소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원내자유당은 자연스럽게 이승만의 자유당에 흡수되고 그 의미를 잃어버리지요. 자유당의 독주 체제가 드디어 완성된 것입니다. ** 원조경제와 정경유착 권력을 잡은 이승만과 자유당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정상수준으로 돌려놔야 할 책무가 있었습니다. 정치권의 권력 다툼과는 별개로 국가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었지요. 한국전쟁 말기에 미국으로부터 거액의 경제 원조를 약속받은 만큼 이 과업을 해결할 선결과제는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 또한 어떻게든 한국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혈안이 된 상태였습니다. 가난한 국가일수록 공산주의가 침투하기 쉬운 만큼 미국은 한국의 열악한 경제상황이 장차 정치적 안정을 위협할 것이라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국전쟁을 통해 전쟁에 의한 승리가 사실상 불가능함을 깨달은 만큼, 자본주의 진영의 경제 부흥을 통한 체제적 우위를 증명하는 것만이 냉전의 승자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될 것이 자명했습니다. 냉전의 최전선이자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의 부흥이 가능하다면 장차 한국은 자본주의의 성공적인 모델로 홍보할 수 있게 되지요. 이를 위해 미국은 막대한 경제원조 외에도 수많은 경제 전문가를 고문으로 파견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외국의 다른 어떤 나라보다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를 최우선으로 심의했지요. 이 시기 미국의 경제 지원 정책은 과거 행정적으로 무능했던 미군정 시기와는 달리 양은 물론 질적으로도 차이가 컸습니다. 평화선 이승만은 전 생애에 걸쳐 일본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한 인물입니다. 친일파 처벌을 반대한 그간의 모습과는 괴리감이 심하지만 이승만이 친일파를 비호한 건 어디까지나 친일파, 특히 친일출신 경찰들이 자신의 권력 유지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지 딱히 친일적인 성향이 있어서는 아닙니다. '이승만 라인’이라고도 불리는 ‘평화선’ 선언은 이승만의 반일적 성격이 가장 극명하게 들어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선언의 기원은 1951년 9월에 서명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당시까지 사실상 미국의 식민지 상태였던 일본은 이 조약을 통해 1952년 4월에 독립국의 지위를 얻게 될 예정이었지요. 이때 쟁점이 되는 것은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제가 무단으로 강탈한 독도 문제입니다. 일찍이 연합군사령부는 ‘연합군 최고사령관 각서 677호’를 발령해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분리시켰고, ‘연합군 최고사령관 각서 1033호’에 따라 일본 선박은 독도 해역 근처에 얼씬도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연히 한국 어민들은 독도 근처에서 마음껏 어로활동을 할 수 있었고 패전국 입장인 일본은 이걸 지켜봐야만 했지요. 그러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면 일본은 주권을 회복하게 되고 미군정기에 발효된 최고각서의 내용도 무효화 됩니다. 게다가 최종 서명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는 일본이 포기해야 하는 한반도의 부속도서 중 독도에 대한 언급이 아예 빠져있었습니다. 물론 이게 독도가 일본에 귀속됨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나 분쟁의 여지를 남겨준 것은 사실이지요. 이 소식은 한국 정부의 귀에도 들어갔지만 전쟁으로 인해 제대로 된 개입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이승만이 나섭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3개월을 앞둔 1952년 1월, ‘한일 간의 평화유지를 목적으로 한다’는 명목 아래 독단적으로 평화선을 선포한 것입니다. 평화선 선포에 따라 독도는 한국령에 속하게 되지요. 하지만 평화선은 이승만이 일방적으로 선포한 것이고 당시 국제법의 규정에 기인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국제법상 영해의 기준은 해안선에서 3마일(약 4.8km)입니다. 반면 이승만이 선언한 평화선은 그 범위가 무려 60마일(96.5km)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전의 시점이기에 주권이 없는 일본은 아무런 반발을 할 수 없었지요. 그나마 이승만의 결정이 지나치다 여긴 미국이 ‘평화선을 인정할 수 없음’이란 통보를 내리지만 이승만은 미국의 통보마저 완벽하게 무시합니다. 3개월 뒤인 4월, 주권을 회복한 일본은 본격적으로 독도에 대한 도발을 시작했으나 전범 국가라는 한계 때문에 무력 도발까지 가능했던 건 아닙니다. 반면 이승만은 곧바로 가용 가능한 해군을 몽땅 동원하여 독도 해역은 물론 평화선을 침범한 300여척의 일본 선박을 나포하지요. 일본은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오히려 당시 유엔군사령관이었던 마크 클라크 대장은 해상을 통한 인민군의 침투를 막는다는 목적 아래 ‘클라크 라인’이란 것을 설정해버립니다. 그런데 이게 평화선과 사실상 동일하게 그어져버리고 감히 미국에게 뭐라 할 수 없었던 일본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지요. 이로써 평화선은 암묵적으로 인정되고 1965년 ‘한일어업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지속됩니다. 이승만의 평화선 선언은 한국 정부가 독도를 실효 지배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지요. 다만 이승만이 꼭 일본 문제 하나만으로 경제고문들의 요구를 거부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미국이 원하는 수출주도형 경제 자체를 도입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일례로 제1공화국 시기 원화와 달러화의 고정환율은 1:500이었습니다. 안정적인 수출을 위해서는 환율을 올릴 필요가 있었고 경제고문들 역시 1:1000이 바람직하다고 여겼지요. 그러나 이승만은 끝내 이 요구를 무시하고 저환율 정책을 유지합니다. 이승만의 저환율 정책은 수출업자들에게 큰 타격이었습니다. 반면 수입업자들은 최대의 호황을 누릴 수 있었지요. 그리고 이승만은 자신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업자들에게 수입허가권을 나눠주었습니다. 때문에 이 시기의 기업은 철저하게 국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요. 삼성의 창업자인 이병철이 대표적인 사례로, 대구의 중소사업자에 불과했던 그는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지원받던 설탕의 원재료를 제공받아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토지자본을 상실하며 제대로 기를 펴지 못했던 친일 자본가 박흥식은 국가의 지원 아래 면직물 사업을 시작,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었지요. 한국 경제의 특징 중 하나인 정경유착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안 그래도 가난한 나라인데 이렇게 이승만이 수입 일변도의 정책을 펼치니 한국의 무역수지는 나날이 적자였습니다. 이승만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화폐를 무분별하게 찍어냈지요. 이승만의 근시안적 결정으로 인해 한국은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미국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달러보다는 현물을 직접 지원하는 형태로 정책을 수정하지요. 그러나 이승만은 이것까지 손을 댑니다. 한 가지 예로 미국은 농산물 생산 증대를 위해 매년 4,500만 달러 수준의 비료를 무상으로 제공했는데 여기서의 비리가 상당했습니다. 비료업자와 결탁하여 비료를 싼 값에 넘기고 농민들에게는 비싸게 팔아넘기는 작업을 반복한 거지요. 덕분에 1950년대의 농업생산량은 미군정기는 물론 일제강점기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농지개혁의 성과는 제대로 반영될 수 없었고 민생은 더더욱 악화되었지요. 이 사실을 파악한 경제고문 에드윈 크롱크는 “미국이 한국을 원조하더라도 정치가와 관료들은 자기들의 이익부터 먼저 챙기기 때문에 정치적 영향력이 약한 농민이나 가난한 국민들은 이를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라고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이승만이 민생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자신의 치적을 홍보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장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겉으로 그럴싸해 보이는 대규모 건설 사업에 치중했지요. 탑골공원과 남산 위에 세워진 이승만의 동상, 그리고 ‘서울시민회관’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서울시민회관은 원래 이승만의 호인 우남회관으로 이름 지어질 예정이었으나 서울시의원들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지요. 탑골공원의 이승만 동상. 4.19혁명 후 철거됐다. 최근 다시 이승만 동상 건립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이승만 동상의 건립은 진보진영의 반대를 극복해야 가능할 것이다. / 사진출처 = 국가기록원 미 국무부 소속으로 한국 문제에 깊은 관여를 했던 도널드 스톤 맥도날드는 총체적인 난국에 빠진 한국 경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렸습니다. 재정 및 신용 정책이 비정상적이며, 정치적 영향력에 의해서 좌우되는 외국과의 교역 통제와 연결되어 최악의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한편 국내 산업과 외국 투자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의 인플레이션을 양산했으며, 이로 인해서 외국의 투자가 점차 감소했다. 또한 정상적인 가격 경제가 붕괴하여 자본 축척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러서, 전반적으로 생산 과정이 완전히 마비될 지경이다. 그 결과 미국이 제공하는 대규모 경제 원조로도 경제 재건과 부흥에 별다른 효과가 없다. -도널드 스톤 맥도날드, 『U.S.-Korea Relations from Liberation to Self-Reliance』 그의 지적처럼 이승만의 경제정책은 국가 발전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미국의 원조액이 워낙 압도적이었기에 나름의 양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기는 했으나 그마저도 북한보다 떨어지는 수준이었지요. 더군다나 자립 가능한 경제를 육성하려던 경제고문들과의 의도와는 다르게 한국 경제는 날이 갈수록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는 성향이 짙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미국 정부는 이승만에 대한 압력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한국의 경제 상황이 악화되는 도중에도 이승만을 동아시아 안보를 위한 핵심적인 존재로 여겼고, 자칫 이승만을 잘못 건드렸다간 미국의 이익에 악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승만은 미국 이상으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냉전 구도를 효율적으로 이용했고, 별다른 저항 없이 정치자금을 쌓아올릴 수 있었지요. 그 결과 한국의 경제 발전이 지지부진한 것과는 별개로 정권의 재정기반은 더욱 탄탄해졌습니다. 훗날 크롱크는 인터뷰를 통해 제1공화국의 경제정책 실패 원인을 다음과 같이 밝혔지요. 미국 정부가 이승만을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처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전혀 민주주의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에드윈 크롱크의 구두 인터뷰, 『Frontline Diplomacy』 참조 ; 박문석의 현대사 특강에서 참고했습니다.. 제1공화국에 대해 가장 쉽고 객관적 근거를 통해 글을 올렸습니다. 이념과 주관에 치우치지 않고 방대한 현대사 자료를 바르게 정리하였고 적어도 확실하고 제가 아는 선에선 그냥 그대로 있었던 사실만 올렸고 앞으로도 그럴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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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지금 이시각도 나의 고향이 있는 북한에서는 나의 친척들과 추억을 함께 쌓은 소싯적친구에서 학창의 친구들, 힘들었지만 활기에찼던 군복무시절에 우정을 쌓았던 친구들 그리고 한동네에서 같은 삶의 터전에서 스쳐간 수많은 인연들이 돌통이 색퀴가 흠모하여 칭송하고 빨아대는 김일성과 그 자손들에 의하여 현대문명을 향유하기는 고사하고 인간의 초보적 권리인 하루 세끼 끼니조차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또한 김일성과 그의 후손들의 사리사욕과 이기심으로 말미아마 핵전쟁의 위협속에 늘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상황이다.
이러한 인간쓰레기들을 빨아대는 돌통이의 행위는 그러지않아도 충분히 어려운 북한사람들의 삶에 보다 더 큰 고통을 가증시키는 행위이며
그러지 않아도 김정은의 핵위협속에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삶에 더큰 고통을 가증시킨다
이 쓰레기색퀴는 이런 김씨 인간백정들을 항일영웅이라 추앙한다
이 쓰레기 새퀴는 탈북자들이 이런 쓰레기같은 김씨일가들보다 못하다고 지꺼렸다
그리고 이 쓰레기 색퀴는 그 목적은 알수 없으나 간첩들도 들여다보는 공개적인 이 창에다 주민번호를 올리라고 탈북자들을 유도한다
돌통이 쓰레기 색퀴는 이 창에서 지놈 주제가 동국대 대학원생 이라고 지놈 아가리로 지꺼렸다 ....근데 대학원생이란 색퀴가 얼마나 무식한지 댓글하나 지어내질 못해서 탈북자 쌜러리맨 아스피린의 댓글을 카피 위조하여 본인의 댓글인양 버젓이 뻔뻔스럽게 올린다
대한민국 대학원생 중에 댓글문장도 제대로 못만드는 대학원생도 있는가?
대가리가 댓글 하나도 제 대가리로는 지어낼수 없는 아메바 대가리 주제에 .....그 수준 그 정도에 누굴 가르친다고 매일같이 김씨찬양 종북 선전선동의 글들을 퍼다가 싸지른다
돌통이색퀴는 그런 주제임에도 창피나 부끄러움을 절대 모르는 미개한 하등 생명체이다
그래서 아스피린은 돌통이를 종북 바퀴벌레,혹은 종북 오물 쓰레기라 부른다
이러한 연고로 아스피린은 돌통이를 인간쓰레기, 바퀴벌레색퀴라고 부른다
돌통이색퀴야 이중에 네놈이 한짓이 아닌것이 있으면 당당하게 말해봐라
오늘 지금 이시각도 아스피린의 고향이 있는 북한에서는 그의 친척들과 추억을 함께 쌓은 소싯적친구에서 학창의 친구들, 힘들었지만 활기에찼던 북조선 남파 간첩대 동무들의 우정을 쌓았던 동무들 그리고 한동네에서 같은 삶의 터전에서 스쳐간 수많은 인연들.. 흠모하여 칭송하고 빨아대는 위대한 김일성이와 그 자손들에 의하여 현대문명을 향유하지 못하고 있으며 인간의 초보적 권리인 하루 한끼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며,
김일성 일가의 사리사욕과 이기심으로 말미아마 핵전쟁의 위협속에 늘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상황이다.
이러한 인간쓰레기들을 빨아대는 아스피리의 행위는 기본적인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비참한 북한사람들의 삶에 보다 더 큰 고통을 가증시키는 행위이며
그러지 않아도 김정은의 핵위협속에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삶에 더큰 고통을 가증시킨다
이 쓰레기색퀴는 이런 김씨 인간백정들을 항일영웅이라 은근히 추앙한다
이 쓰레기 새퀴는 탈북자들이 이런 쓰레기같은 김씨일가들보다 못하다고 지꺼렸다. 자기도 탈북한 고정 간첩이면서..
그리고 이 쓰레기 색퀴는 아스피린 지 가 직접 공개하겠다고 하더니 이제와서 이 창에다 주민번호를 올리지 못하겠다고 우긴다. 그럼 나는 뭐가되나?
하긴 중국을 통해서 온 남파 간첩이 공개하는건 꺼리겠지..
하여튼 이러한 연고로 나,돌통은 아스피린이를 인간쓰레기, 바퀴벌레색퀴라고 부른다
아스피린색퀴야 이중에 네놈이 한짓이 아닌것이 있으면 당당하게 말해봐라
이 놈은 민족반역자이며 김부자3명을 합한것보다 더 인간 쓰레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