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편.
이 글을 쓰기전에~~
북한의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활용되고 있는 선군정치는 항일무장투쟁에서 그 정당성의 뿌리를 찾고 있다. 북한은 선군정치가 항일무장투쟁의 전통을 계승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선군정치가 단순히 체제위기 상황에서 임시변통으로 만들어낸 계엄정치가 아니라 항일무장투쟁시대, 김일성 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항일무장투쟁은 북한에서 정권초기부터 지금까지 가장 중요한 통치이데올로기로써 기능하고 있다. 항일무장투쟁은 김일성 정권에서 가장 많이 활용된 통치이념의 소재였다. “사상도 학습도 항일유격대식으로”라는 구호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북한주민들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주요한 세계관, 가치관의 근거로 활용되었으며 일상생활에서뿐만 아니라 북한의 문화와 예술의 소재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정권초기부터 지금까지도 북한주민은 온통 항일무장투쟁의 신화(神話) 속에 살고 있으며, ?항일무장투쟁 참가자들의 회상기?가 성경처럼 읽혀졌다.
탈북자들이 100명이면 100명이 모두 한결같이 하는 말이 북한체제를 등지고 남한에 왔지만 김일성만큼은 평생 뇌리에서 지울 수 없는 숭배의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김일성이 그렇게 위대하다고 판단한 이유는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을 하여 일제에서 조선을 해방시켜 주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을한 것은 사실이지만 조선을 해방시킨 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미국과 소련의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였고,
참조 * 김인옥,{ ????김정일장군 선군정치리론}(서울: 평양출판사, 2003)
소련과 미국의 한반도 점령에 따라 일본이 퇴각하였기 때문이며 김일성은
1940년 10월부터 소련에 피신하고 있다가 조선이 해방한 이후인 1945년 9월말에 소련함대를 타고 원산항을 통하여 귀국하였다는것은 역사적 정설이다. 북한주민들이 믿고 있는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역사는 너무 많이 왜곡되어 있다. 과장·왜곡된 역사를 북한의 국내정치에 과장되게 활용하였다.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연구는 많이 이루어졌다. 지금까지 한국, 중국, 특히 연변지역, 일본 역사학자들에 의해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 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실상이 비교적 자세히 그리고 정확하게 알려지게 되었다.
서대숙, 김준엽과 이창순, 와다 하루키, 신주백 등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특히 서대숙의 연구가 가장 개척자적이며, 가장 최근까지 진행된 신주백의 연구가 가장
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종합적으로 분석된 연구이다. 우리 학계에서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경력이 진짜냐 가짜냐 여부를 주장하는 논쟁시기가 있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논쟁은 종결된지 오래다.
그런데 북한의 항일무장투쟁 역사 왜곡에 대한 연구는 미흡하다. 가령, 와다 하루키는 북한에서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을 신화화(神話化)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사실을 사실대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에 관한 집중적인 분석서를 내었다.
참고 : 서대숙, 현대사연구회 역, 한국공산주의 운동사}(서울: 화다신서, 1985); 원
본: The Korean Communist Movement, 1918~1948, (Princeton Univ. Press,
1967);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제5권}(서울: 청계연구소, 1986);
와다하루끼, 이종석 역, 김일성과 항일만주투쟁}(서울: 창작과비평사, 1992);
와다하루끼, 서동만?남기정 역, 북조선: 유격대국가에서 정규군국가로 (서울:
돌베개, 1998); 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 1920~1945}(서울: 아세
아문화사, 1999); 신주백, 1920~30년대 중국지역 민족운동사}(서울: 선인,
2005).
그러나 매우 객관적인 연구라고 평가되고 있는 와다 하루키의 연구도 김일성 만주파만을 분석의 대상으로 하였으며 김일성의 행적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하였기 때문에 결국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을 신화화하는데 일조한 측면이 있다.
새로운 연구방법이 필요하다. 실제로 기존연구에서는 북한 역사서들이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왜곡하였는지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제 북한이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경력을 어떻게 왜곡하여 국가이데올로기로 활용하고 있느냐에 관심을 돌릴 필요가 있다. 중국의 중원에서 일본과 대적하여 싸운 조선의용군의 역사는 북한의 역사에서 지워져버린 역사이다.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2군 6사가 거의 궤멸되어 소련으로 피난간 뒤에도 조선의용군은 항일무장투쟁을 지속하여 해방시점까지 투쟁을 지속한 부대이다.
그들의 항일무장투쟁의 업적은 결코 김일성이 활동하였던 만주지역에 못지않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해방이후 북한에 입북하여 연안파라는 엘리트 집단을 형성하였고, 조선인민군 창설의 주력이 된 집단이며 6·25남침의 주력부대로 참여한 부대이다. 또한 1920년~1930년대의 민족주의 계열의 역사도 북한의 역사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의 역사에서는 만주지역에서 활동한 수많은 조선족 무장대와 유격근거지의 사람들의 역할도 역사로 존재하지 않고 김일성 혼자만의 역사로 기록되어 있다.
북한 역서서에 대한 왜곡의 실상을 정확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지나친 왜곡은 남한에게까지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북한에서의 왜곡된 역사가 우리 사회에 큰 악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남한과 북한을 이질화시키는 핵심적 요소로 작용해왔다.
참조 * 와다 하루키,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서울: 창작과비평사, 1992)
우리 학계에서는 김일성의 항일운동에 대한 분석이 상당히 객관적으로 이루었고 그 전모가 드러났지만 북한학계와 북한당국이 행한 역사의 왜곡, 조작, 날조의 실상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때문에 우리학계에서 이루어진 객관적인 분석마저도 혹시 북한의 주장이 맞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근원이 되고 있다. 우리사회의 국가 정통성 논란뿐 아니라 정치균열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우리사회의 혼란과 갈등을 증폭시키는 요인으로도 작용하고 있다. 통일 이후 남북한 사회통합에도 문제가 될 것이다. 가령, 최근 부산 전교조 교사들이 왜곡된 북한의 역사서를 거의 그대로 베껴 써서 통일교육 교재로 사용한 사례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둘째, 오늘의 북한을 변화시키는데도 필요하고, 통일미래에서 남북한 사회통합을 위하여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하다.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없이는 현재의 통합이 어렵다. 북한의 역사책이 무엇을 어떻게 왜곡하였는지를 분석하는 것이 남북통일의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이 연구는 이전의 역사학적 분석과는 다른 방법으로서 남한, 중국, 일본역사학자들의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에 관한 분석과 북한 역사학의 항일무장투쟁에 관한 분석을 비교하는 방법을 취한다. 김일성 항일무장투쟁 활동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되, 왜곡된 역사, 삭제된 역사를 바로잡고 복원하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 북한 역
사학계가 유일한 항일무장투쟁으로 규정한 만주파 뿐만 아니라 김일성의 경쟁집단이었기 때문에 북한의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에서 멸실시켜버린 조선의용군의 투쟁실적이나 1910년대부터 1930년 후반까지 가장 장기적으로 지속된 민족주의계열의 항일무장투쟁 실적과 비교하는 방식으로 접근한다.
그리고 직접 전장에서 싸우지는 않았지만 유격대원들에게 식량과 의복을 조달해준 유격근거지 조선인들의 기여도 간과할 수 없는 업적으로 부각한다.
이 연구는 만주지역 항일무투와는 다른 지역에서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행한 독립운동에 정당한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도 시도한다. 왜냐하면 독립을 위해서는 무장투쟁만이 유일한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에서의 외교도 매우 중요한 수단이다. 일제에서 우리가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무장투쟁을 통하여
저항의지를 보인 것도 중요했지만, 제2차세계대전 전후처리 과정에서 열강들이 한국을 일본에서 독립시키기로 결정함으로써 독립하게 되었는데, 열강들의 그러한 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은 외교적인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글은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우리 역사학계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김일성의 자력혁명 vs. 소비에트화 문제에 대한 새로운 주장을 시도한다.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에 관한 역사왜곡은 일제의 퇴각과 해방의 과정에 관한 부분까지 걸쳐있기 때문에 해방이후 김일성의 권력 장악과정에 관해서도 논
란이 되고 있다. 즉, 항일무장투쟁과 북한정권과의 연계성에 관한 논란이다. 항일무장투쟁의 연장선상에서 김일성이 일제에서 독립을 쟁취하여 북한정권을 수립하였다는 인식(자력혁명 시각)이 있는가 하면, 소련이 북한체제를 만들었다는 인식(소비에트화 시각)이 있다. 자력혁명시각은 연안파나 민족주의계열의 항일독립전쟁등의 실체를 무시하기 때문에 나온 인식일 수 있다.
당시 조선의용군의 세력과 위세가 얼마나 컸는지를 모르고 하는 주장이다.
이 글은 항일무장투쟁이 통치이념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소련이 행한 역할에 대하여 심층적 분석을 실시한다.
소련이 김일성을 북한의 최고지도자로 옹립하고 김일성의 빨치산파를 주류 엘리트 집단으로 육성하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항일무장투쟁을 활용하게 된 내용을 심층 분석한다. 끝으로, 이 글은 항일무장투쟁이 단순히 역사적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통치이념적 측면임을 강조한다. 와다 하루키는 북한을 유격대 국가라고 했다. 1948년 건국이래 1967년부터 1972년에 걸쳐 2차적으로 형성된 체제를 유격대국가로 불렀다. 이제 김정일 정권을 정규군 국가로 이행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관성을 상실하고 있다. 항일무장투쟁의 흔적은 아직도 온존하고 있다. 이것은 와다 하루키가 파워엘리트적 측면만을 부각한 때문이다. 항일무장투쟁의 통치이념적 측면을 간과하였다. 이 보고서는 북한체제의 특징을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과잉 통치 이념화로 규정하고자 한다.
북한은 김일성의 만주 항일전쟁을 김일성 개인숭배의 소재로, 절대적 신화로 만들었다. 이 신화는 너무 절대화되었기 때문에 깰 수 없게 되었다. 가령, 항일무장투쟁의 신화 때문에 일본과의 국교수교가 아직 안되고 있다. 북한이 성립된지 60년, 식민지 지배도 전쟁도 진작에 끝났는데 민주화된 일본과 화해도 소련의 배후 조종이 없었다면 김일성은 국내파와 연안파를 제치고 권력을 독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북한 정권이 수립되고 항일무장투쟁이 국가 이데올로기로 채택되는 과정과 항일무장투쟁이 신화화되는 과정이 제대로 규명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논란은 원점에서 맴돌고 있다.
이 글은 항일무장투쟁의 통치 이념화 과정에서 소련이 행한 역할에 주목하여 이 쟁점의 답을 제시한다. 소련군정이 김일성에게 최고지도자로서의 안정된 권력기반을 마련해주기 위하여 총들고 일본과 싸운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김일성이 최고지도자로 옹립되는 명분을 만들었고, 김일성의 이너서컬이었던 빨치산파들도 같은 명분으로 다른 파벌들을 제치고 권력 핵심으로 양성했다.
소련파들이 각 부처의 2인자의 자리에 있으면서 최고위직에는 주로 빨치산파들을 앉혔다. 이로써 북한은 와다 하루키 교수가 주장한대로 유격대 국가가 되었다.
참조 * 와다 하루키,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서울: 창작과 비평사, 1992).
* 와다 하루키, 북조선: 유격대국가에서 정규군국가로}(서울: 돌베개, 2002).
이상.. 03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