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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는 남북정권,적대적이면서도 서로 공생관계..
Korea, Republic of 돌통 0 214 2020-07-15 16:33:02

【1】 1972년 평양에서 2차례 열린 비밀회담에서 만난 김일성 당시 북한 내각수상(오른쪽)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2】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의 내용을 발표하는 이후락 부장. 【3】 7·4남북공동성명의 합의사항을 추진하기 위해 1972년 11월 4일 평양에서 열린 제2차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회의가 끝난 뒤 합의서를 교환하고 있는 이후락 부장(왼쪽)과 박성철 북한 내각 2부수상. 뒷줄 왼쪽부터 최규하 당시 청와대 특별보좌관, 장기영 전 부총리. 동아일보 자료 사진

 

■ 北외교문서로 드러난 남북접촉… 전문가들이 본 의미
“국제정세 급변속 남북대화를 권력강화에 활용
朴정권, 유신에 대한 北 오해 살까봐 사전통보
北도 유신 두달뒤 헌법 바꿔 ‘수령절대체제’로”


 

박정희 정부가 1972년 10월유신을 선포하기 전 두 차례에 걸쳐 이를 북한에 예고했다는 내용 등을 담은 동유럽 외교문서들은 남북 관계사의 이면을 규명하는 중요한 사료(史料)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했다. 학계는 당시 남북한이 모종의 사전 교감을 가졌을 것으로 짐작해 왔지만 구체적인 증거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10월유신 선포, 北에 2차례 미리 알렸다”
남 "1시간 뒤 비상사태 통보 잘 들어보라" 북에 전화통보
 "7.4혁명은 대남혁명을 위한 평화공세"


 

이번에 발굴된 문서들은 남북관계뿐만 아니라 1970년대 초반 북한 및 남한 현대사의 서술 작업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

 

 

1971년 이후 대화를 진전시켜온 남북한 정권은 당시 은밀한 교감을 통해 분단 이후 가장 가까운 관계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 바탕 위에서 남한은 통일과 남북관계를 명분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정치를 강화하는 새로운 역사를 시작했다.

 

문서들은 우선 1970년대 초 남북한이 대화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원인에 대한 국제정치나 국내정치 차원의 규명 작업에 훌륭한 자료를 제공한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했다. 류길재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1970년대 초반 급변하는 국제정세(동서양 진영 간 데탕트) 속에서 북한은 중국을, 남한은 미국을 절대적으로 믿지 못하는 비슷한 처지에 처했다”며 “두 나라는 남북대화와 독재 권력의 공고화라는 비슷한 형태로 대응했다는 사실이 문서를 통해 확연하게 드러났다”고 말했다.

 

 

강규형 명지대 교수는 “문서들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서로를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던 김일성, 박정희 정권의 ‘적대적 공존관계’를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남북한 당국은 국제정치 환경의 변화에 따른 남북대화와 통일논의를 각자 자신의 권력 강화에 최대한 활용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10월유신 선포 하루 전인 16일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질서가 먼저 구축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질서’란 박 대통령이 선거와 야당, 언론에 휘둘리지 않고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강력한 독재구조였다. 북한도 두 달 뒤인 같은 해 12월 새 헌법을 만들어 김일성 당시 내각수상을 주석으로 추대하고 ‘수령 절대주의 체제’를 강화했다는 점에서 남북은 같은 길을 걸었다.

 

홍석률 성신여대 교수는 “당시 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 수립의 명분으로 남북대화와 통일을 제시했기 때문에 북한의 오해로 남북대화가 끊어지는 것을 우려했던 것”이라며 “박정희 정권에 남북대화의 유지는 유신체제를 안착시키는 수단이었다는 점이 이 문서들을 통해 드러났다”고 평가했다.

 

남한이 북한에 10월유신을 예고한 것은 박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이후락 부장의 행위가 분명하다는 점에서 문서들은 1970년대 남북대화에서 이 부장 개인의 역할을 더욱 부각하는 사료라는 평가도 나온다.

 

우드로윌슨센터와의 문서발굴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신종대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개인적인 위험을 감수하고 북한을 방문해 7·4공동성명을 이끌어낸 이 부장이 10월유신에 대한 북한의 오해로 남북대화가 끊어질 것을 우려해 사전에 알려준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이 부장이 스스로 박 대통령의 2인자라고 생각했으며 남북대화라는 업적을 통해 정치적 야망을 키웠던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당시 평양 주재 동독과 불가리아대사관이 본국에 보고한 문서에 따르면 이 부장은 북측과의 대화에서 북측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종종 과감한 양보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72년 10월 12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장회의에서 남측 위원장이던 이 부장은 박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통일”을 언급한 것을 북측이 따져 묻자 “그 표현은 언론인들이 넣은 것”이라면서 남측의 실수임을 인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이 1971년부터 겉으로는 대남 평화공세를 폈지만 속으로는 남한 정권의 국내외적 고립과 내부의 혁명 역량 강화를 통한 적화통일을 노렸다는 사실도 북한의 진술을 통해 확인했다. 신 교수는 “당시 박 대통령과 정책결정 라인에 있었던 정부 당국자들이 북한 평화공세의 의도와 배경 등에 대해 비교적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는 점이 확인됐다”고 평가했다.


 

서재진 통일연구원장은 “북한은 국내외 정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할 때 과감하게 평화 공세를 펴 왔다”며 “최근 북한이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유화 공세를 펴는 것도 당시 상황과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북한이 대외 정세를 오판 또는 왜곡했던 흔적도 이번 문서에 드러났다. 서 원장은 “남한 주민들이 7·4공동성명에 환호하면서 ‘김일성 만세’를 외치고 있다는 대목과 남측이 적십자회담을 판문점에서 열자고 한 것이 서울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북측 대표단을) 환영하는 사람들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해석한 부분 등은 남한 정세에 대한 무지 또는 의도적 왜곡”이라며 “김일성 수상을 기분 좋게 하려는 사실 왜곡이 역설적으로 지도자의 판단을 흐렸고 지금도 북한 지도부 내에서는 같은 상황이 계속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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