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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의 독재자 김일성의 인생 팩트. 06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71 2020-07-19 17:26:30

06편..



그는 중국 공산당이 영도하는 팔로군 지구로 경솔하게 향하지 않은 것이다.


조선의용대의 대다수 대원이 중국 공산당 팔로군으로 이탈해 가자 조선의용대 총대부는 인원이 없고 전투력이 약화되었으며, 더욱이 중경의 중국 국민당 정부는 많은 조선의용대원이 북상하여 중국 공산당 지역으로 이탈해간 것에 대하여 불만을 표시하였으며 팔로군 활동에 참가하는 조선의용대원들에 대하여 지명수배령을 내렸다. 1942년 5월 15일 중국 국민당 정부 군사위원회는 조선의용대를 개편하여 한국광복군에 편입할 것을 명령함에 따라 김원봉 등 18명의 조선의용대는 1942년 5월 중경에서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었다. 조선의용대 대장 김약산(김원봉)은 한국광복군 제1지대장 겸 부사령으로 되고, 광복군 총사령은 이청천이다.
다.


광복군의 활동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창설되어 1941년 12월 9일 대 일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군 합동작전, 국내에 공작대를 파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또한 1938년 10월 10일 창설된 조선의용대를 1942년 5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케 하였다. 광복군은 교육과 훈련기관으로 한국청년훈련반과 한국광복군
훈련반을 두었으며 주로 일제에 의해 학도병과 징병으로 중국에


참조 :  楊昭全?李輔溫, 조선의용군 항일전사}(서울: 도서출판 고구려, 1995),p. 193.
이현희, “대한민족 임시정부의 광복운동,” 한국사연구회 편, 한국사연구입문,
p. 537.
32 楊昭全·李輔溫, 조선의용군 항일전사, p. 201.


온 한국인 병사 가운데, 탈출병과 투항병 등을 중국 군사당국을 부터 인수받아 이들을 일정한 교육과 훈련을 시킨 후, 광복군에 편입케 하였다. 장준하, 김준협이 이 곳에서 혼련을 받았다. 광복군의 선전활동은 광복군의 활동상을 국내외에 알리고 국내외 동포들의 참여와 지원을 촉구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한 것이었다. 광복군은 1941년 2월에 선전활동을 위한 일종의 선전지로 ‘광복’을 창간하였다.



광복군은 연합군과 함께 대일 작전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인도,버마 전선에서 영국군과 함께 활동한 것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광복군은 미국군과도 연합작전을 추진하였는데 중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의 전략첩보기구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와 합작하였다.
광복군은 서안에서 실시한 OSS훈련이 완료되면서 국내 진입 작전을 추진하였다. 1945년 8월 7일 작전 출발 대기중에 일제가 항복하여 국내 진입작전이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였다


참조 : 한시준, 한국광복군 연구, (서울: 일조각, 1993), pp. 246~247.



***  1930년~1940년대 동북항일연군 및 김일성부대의 항일운동


1. 1920년대 만주지역 민족운동에서 사회주의계열의 형성과 중국공산당 입당


가. 사회주의사상의 만주지역 유입


1920년대는 사회주의사상이 동만지방에 유입되어 북만과 남만으로 확산된 시기이며 일부 민족주의계열에까지 확산되어 민족 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시기이다?
러시아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 조선민족의 최초의 공산주의적 혁명조직은 소련경내에서 탄생하였다. 1918년 6월 초기공산주의자 리동휘가 소련 극동지구 하바로브스크에서 맑스-레닌주의 단체인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다. 그 이듬해 1919년 9월에 일본유학 출신의 김철훈이 소련 이르쿠츠크에서
‘전로씨아 한인공산당’을 건립하였다. 한인공산당은 중국 상해로 건너와 리동휘, 박진순, 려운형 등 초기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1921년 5월 ‘고려공산당’으로 개편됨으로써 재중 조선민족이 최초로 건립한 공산주의 단체가 되었다. 사회주의사상이 급속히 확산하게 된 몇가지 중요한 요인들은 다음과 같다.


째, 당시 동북지방에서 살고 있던 조선민족은 안
으로는 중국의 지주로부터의 착취, 밖으로는 일제의 침략과 억압
의 이중의 고통을 받는 열악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
의 10월혁명과 사회주의사상에 매료되었다. 만주로 이주하였던
한인들 중에는 이미 1910년대부터 일본의 약탈을 받았던 사람들

국내에서는 1925년 4월에 서울에서 북풍회, 화요회, 조선로동당, 무산자동맹
회 4개의 공산주의 단체가 합병하여 조선공산당을 창건하였다. 강기주, 중국
조선민족 항일투쟁사 연구, pp. 187~189.


로서 농민소작쟁의까지 하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미 노농 혁명사상을 경험해 보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또한 당시 민족주의의 결함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민족주의파들은 유학사상의 영향 때문에 농민을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었으며, 농민들을 지배의 대상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사회주의사
상은 청년학생층과 소작농민들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사회주의자들은 1910년대의 근대화론에서 노농운동으로 이행하고자 하였다. 이들에게 앞으로 닥쳐올 사회는 일본자본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나라, 착취와 압박이 없는 체제여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민중들이 이제야 우리가 주도하는 세상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둘째, 1910년대부터 동북지방에 민족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사립학교 설립과 근대적 교육운동의 혜택을 받은 새로운 지식인들이 1920년대에 대두하였다. 1912년이후 동만 즉, 연변 각 지방들에서는 각종 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하였는데 1916년까지만해도 연변에 조선족학교가 158개소가 있었으며 학생수는 3,879명
이었다. 남만의 경우, 1922년 통계에 의하면 각종 조선학교가 165소가 있었으며 학생수는 1,715명이었다. 북만의 경우, 22개소의 학교가 설립되었다. 1931년 통계에 의하면 전 동북지구에 조선족 반일지사와 민간이 꾸린 학교는 280여개소가 있었고 학생수는 7,070명에 달하였다. 종교계통에서 설립한 학교는 103개소가 있
었고 학생수는 6,433명이었다. 이 두가지 유형의 학교를 합하면 학교 수는 388개소에 달하고 학생수는 13,503명이었다.


이것은 1916년에 비하면 배나 증가한 셈이다. 연변지구는 동부지구 조선족 집거지구 가운데서 교육사업이 가장 활발한 지구였다.


이러한 교육사업의 결과, 청년학생층이 사회주의사상을 전파하는 주도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청년학생층 사회주의자들은 농촌에 들어가서 노래를 배워 주면서 맑스주의를 선전하였기 때문에 문맹자도 사회주의를 알았다고 한다. 가령, 연변대 박창욱교수는 어머니가 86세에 사망할 때 “너는 이제 맑스를 아느냐, 우리는 어려서부터 안다”고 말하였을 정도이다. 그 정도로 맑스주의가 광범위하게 침투되었다.


셋째, 이 시기 항일무장투쟁 일변도의 독립운동 전략에 한계가 있다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던 상황에서 민족진영 각 독립운동 단체들의 무리한 독립자금 징수나 강요는 사회적 갈등의 한 요인으로 되고 있었다. 실제로 1926년 4월 길림성 아성현의 주민들이 정의부의 무리한 의무금 징수에 대항하여 “정의부는 민중의 적합한
기관이 아닌 동시에 무산대중의 당면이익에 하등의 효과가 없는 것을 관찰하였기 때문에 단연 정의부에서 탈퇴할 것을 만천하에 성명한다”는 내용의 정의부탈퇴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넷째, 코민테른의 반제노선과 한국의 독립에 대한 관심과 지지 천명 때문에 사회주의 사상은 민족해방의 수단으로 인식되었다.1920년 10월부터 시작된 일제의 간도출병은 만주지역 민족진영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가하였으며, 1921년 11월 개최된 이른바 워싱턴회의에서도 임시정부의 외교적 노력이 별다른 성과를 거
두지 못하자 민족진영의 정치적 입지는 상대적으로 좁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코민테른에서는 1920년 9월, 제1회 동양제민족대회

참고..황용국외, 조선족혁명투쟁사, pp. 175~177.
 황민호, 일제하 만주지역 한인사회의 동향과 민족운동}(서울: 신서원,
2005), pp. 92~93.


와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던 극동인민대표자대회를 통하여 한국의 독립에 대하여 적극적인 관심과 지지를 천명하고 있었으며, 이렇게 되자 코민테른은 한인들에게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국제적 지원이 가능할 수 있는 새로운 대상으로 부상하였다.


실제로 당시 한인사회의 동향에 대한 일제의 정보분석에서도 조선인 적화운동이 점차 왕성하게 된 것은 간도토벌 이후, 특히 워싱턴회의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당시 한인사회주의자들에게 공산주의는 민족독립을 위한 사상이었다. 러시아 10월혁명은 반제국주의 운동으로서 조선민족의 독립운동의 모델이라고 생각하고 맑스주의와 사회주의사상은 동북아 지역에서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가령, 여영준 노인은 1930년대 만주에서 전령병으로서 항일혁명참가에 참가했는데 왜 혁명에 참가했느냐는 질문에 민족독립운동을 위해 참가했다고 응답하였다. 자신은 공산주의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민족독립을 위하여 공산주의에 참가했다고 한다.
사회주의 사상의 확산 결과, 만주의 노농대중은 계급의식, 민족각성이 현저히 제고되었고 반일회, 반제동맹, 로동조합, 농민동맹, 청년동맹, 부녀동맹 등 수많은 단체들이 결성되었다. 동만지구만 보더라도 1930년 10월까지 5,000여명의 조선족 군중들이 각종 반일단체에 결속되었고 그들의 영향하에 있는 군중은 약 5만
명에 달하였다. 이리하여 동북지구의 공산주의운동과 반일투쟁은광범한 군중적 토대가 다져지게 되었다.

참조 : 여영준, 동북항일연군 2군 6사 전령병, (2004년 2월 연변에서의 인터뷰 내용).
40 강기주, 중국조선민족 항일투쟁사 연구, p. 191.


사회주의 사상이 조직적으로 발달하게 된 것은 조선공산당만 주총국과 고려공산청년회만주총국을 통해서이다. 1926년 5월, 조선공산당의 ‘조직전권위원’으로 중앙에서 파견된 조봉암과 만주의 상해파 및 화요파는 영안현 영골탑에서 조선공산당만주총국과 고려공산청년회만주총국을 결성하였다. 1926년 가을, 당만주총국은 동만지방 등지에서 큰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던 만주공청파와 결합하였다. 하지만 1927년 10월 ‘제1차 간도공산당 검거사건’을 계기로 만주지역의 사회주의운동 세력은 크게 화요파, ML파, 상해파로 분열되었다. ML파는 1928년 10월 제2차 간도공산당 검거사건‘도 겪었다.




나. 사회주의계열과 민족주의계열과의 관계




1929년, 1930년 시기는 만주지역에서 전개된 한인 민족운동의 주도권이 민족주의운동에서 사회주의운동으로 바뀐 시기였다. 민족주의계열과 사회주의계열은 적대관계라기 보다는 협력과 경쟁 관계였다. 만주총국이 결성된 이후 1928년 말경까지 만주지역의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들과 연합하여 민족유일당을 결성하
고자 하였으며, 한인의 사회경제적 안정과 튼튼한 민족운동 기지를 구축하고자 자치기관을 결성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로서 사회주의 계열은 광범위한 인텔리층의 지지를 확보하는 한편 사회주의 사상은 농민층에게까지 전파되었다. 정의부, 신민부와 같은 민족주의 운동 단체내에서도 사회주의 이념이 전파되어
분화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1929년까지 민족주의계열,사회주의계열은 상호 협력, 경쟁하는 관계였다.



이상..               07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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