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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없는 북한이 무너지지 않은 이유는 그 놈의 주체사상 때문이다”
Korea, Republic of 돌통 0 255 2020-07-29 00:29:25

김일성 없는 북한이 무너지지 않은 이유는 그 놈의 주체사상 때문이다”

 

 


***  북한 티브이·라디오·달력에까지

어버이수령 찬양·김일성 유훈 가득

무심코 듣다 보면 찬송가·설교 느낌

 

“종교성 있지만 기독교와 성격 달라”

기독교는 현세 부정하고 내세 지향

주체사상은 현세 긍정 내세관 없어

 

‘김일성의 영혼과 함께 영원히 산다’

영생론은 정치적 리더십 유지 목적

‘김일성 우상화 도구’ 해석도 오류

 

1994년 클린턴 ‘북한붕괴론’ 착각

“김일성 사망 이후 석 달 못 버틸 것”

 

‘주체사관’ 역사의 주역 ‘인민’ 강조

“김일성 공화국 아닌 인민 공화국”

 

그 놈의 주체,주체사상..

 

 

 

박*식 교수라는 사람은, 학계나 기독교계에서 북한의 영생탑, 태양상, 동상 등을 들어, 주체사상을 ‘김일성 우상화 수단’으로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라고 지적한다.

 

 

북한은 1997년 김일성 생일인 4월15일(4·15절)을 ‘태양절’로, 2012년 김정일 위원장의 생일인 2월16일을 ‘광명성절’로 정하고, 전국 각지에 부자 동상과 영생탑, 초상화인 ‘태양상’을 세웠다.

 

 

나는 1990년부터 북한을 본격적으로 방문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한 해 평균 2회꼴로 방문했고 그 이상을 다녀온 해도 있었다. 내가 주로 묵는 평양의 호텔 방에 들어서면 익숙한 티브이, 라디오, 달력 등이 여느 때처럼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미국에서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도착한 나에게 밀려오는 피로감도 익숙했다. 침대에 누우면 적막강산이 따로 없었다. 티브이 방송은 저녁 6시부터 방영했기 때문에 그때까지 고요한 시간을 견뎌야만 했다.

 

 

침대 옆 서랍을 열어보면 일력이 있다. 일력을 넘겨보면 하루도 빠짐없이 적혀 있는 김일성 유훈이 눈에 띈다. 예컨대 농번기 때는 농사일을 지도하는 구절이 적혀 있다. 북한에서 일력은 일종의 경전과 같은 것이었다.

 

저녁 6시가 되면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티브이를 켰다. 그러면 역시나 익숙한 노래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버이수령을 찬송하고 김일성 유훈을 설명하고 주체사상을 강조하는 노랫말, 애절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선율, 그 노랫말과 선율을 화려하게 형상화한 티브이 화면 등이 펼쳐졌다. 라디오를 틀어도 유사한 노래가 들렸다.

 

 

수령시 3가지 명심하라!

 

 

박*식 교수는 북한에 머물 때마다 김일성의 유훈과 찬양을 새긴 일력을 보며 ‘주체사상의 종교성’을 실감하곤 했다. 사진은 평양 옥류관의 대표 음식 사진을 소개한 2020년 북한 달력. 사진, 아태평화교류협회 제공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는 나는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들을 무심코 듣다 보면 마치 교회에 와서 찬송가를 듣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티브이, 라디오, 일력 등에서 김일성 유훈을 반복적으로 만나다 보면 교회에서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것 같았다.

 

 

북한을 간간이 방문하는 내가 이런 느낌을 받을 정도라면 일상적으로 듣는 북한 인민에게는 어떨까?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가 내가 도달한 결론은 ‘주체사상이 종교적 성격을 지녔다’는 것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내가 이해하는 주체사상의 종교성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주체사상의 종교성은 1994년 김일성 사후 등장한 ‘영생론’에서 분명하게 확인해볼 수 있다. 북한에 가면 “위대한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표어가 적힌 영생탑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2011년 김정일 사후에는 표어에 김정일도 추가되었다. 또한 예수 탄생을 기점으로 해서 기원전과 기원후로 나누듯, 김일성이 탄생한 1912년을 주체 원년으로 설정했다.

 

 

그런데 주체사상의 종교성을 관찰한 학자들이 그 성격을 기독교와 비교해 해석하는 논문이나 책자를 쓰는 사례가 종종 있다. 그러나 거듭 강조하지만 주체사상의 종교성은 기독교와 완전히 다른 성격을 지녔다.

 

 

예컨대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현세를 부정하고 내세를 지향하는 종교다. 따라서 기독교 특유의 내세관이 존재한다. 그러나 주체사상은 기독교와 달리 현세를 종교적으로 긍정하기 때문에 내세관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주체사상에서 강조하는 영생이란 지금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민이 김일성의 영혼과 함께 영원히 산다는 뜻이었다.

 

 

주체사상이 종교성을 담고 있는 궁극적 이유는, 김일성 사후에도 김일성 생전의 카리스마를 보존해서 북한의 정치적 리더십을 변함없이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야만 북한의 정치적 생존과 번영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사회학적 시각에서 볼 때 기독교는 현세를 정치적으로 거부하면서(the anti-political rejection of the world) 끊임없이 내세를 지향하는 종교다. 만일 주체사상을 기독교와 비교할 수 있다면 미국과 한국의 군사적 위협에 항시적으로 노출된 북한이 정치적 생존을 포기하고 내세에서 영생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인데,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주체사상의 종교성과 관련해서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쟁점이 또 하나 있다. 현재 많은 학자, 언론인, 정치인 등은 주체사상의 종교성의 요체를 김일성 우상화로 해석하고, 그런 해석에 따라 북한을 ‘김일성 공화국’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서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서 주체사상이 동원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런 견해는 북한을 바라보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내면화된 확고한 신념이다. 바로 그런 신념으로부터 김일성만 제거하면 북한은 곧 붕괴할 것이라는 믿음이 파생되었다.

 

 

북한은 김일성 탄생 100돌을 기념해 2012년 4월 평양 장대재언덕에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태양상 모자이크 벽화를 세웠다.

 

 

주지하듯, 김일성은 1994년 7월8일 사망했다. 뒤이어 1994년 10월21일 1차 북핵위기를 종식시킨 북-미 기본합의서(제네바 합의)가 작성되었다. 합의서에는 북한에 100㎿ 용량의 경수로 2기와 산업용 중유 50만t을 제공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미국이 김일성 사후 약 3개월 보름 만에 합의서에 전격적으로 서명한 까닭은 무엇일까?

 

 

내가 그때 협상에 참여했던 미국 쪽 인사로부터 직접 확인하기로, 클린턴 행정부에서는 김일성이 없는 북한은 3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붕괴할 것이라 확신했다고 한다. 북한은 어차피 붕괴할 테니까 미국으로서는 어떤 내용이 담긴 합의서에 서명을 해도 추후 책임질 일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당시 대한민국 국민과 정부에서도 대부분 그렇게 인식했다.

 

 

그러나 북한은 붕괴하지 않았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확신한 ‘북한붕괴론’이 오류였다는 사실이 현실적으로 검증된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검증이 있었음에도 북한붕괴론은 여전히 폐기되지 않았다. 2015년 10월 오바마와 박근혜는 전시에 북한 김정은과 수뇌부 참수를 골자로 하는 ‘작전계획 5015’를 작성했다. 이것 역시 북한은 김정은 1인이 독단으로 지배하는 체제라는 신념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이라크의 후세인을 제거했지만 이라크가 붕괴하였는가? 북한에 대한 환상이 한반도의 파멸을 초래할 정책을 끊임없이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을 김일성 공화국으로 이해하는 통념은, 정치학 교과서에서 맨 먼저 소개되는 정치의 기본 원리와 정면으로 상충한다. 국가는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지배관계를 의미한다. 지배자는 권력을 수단으로 지배한다. 국가가 존속하려면 피지배자가 지배자에게 반드시 복종해주어야 한다.

 

 

그러면 피지배자가 지배자에게 복종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피지배자의 마음속에서 지배자의 권력 행사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해주기 때문이다. 정치학에서는 그런 인정을 ‘정당성’(legitimacy)이라고 한다. 지배자의 권력 행사가 피지배자의 마음속에서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지 못할 때는 ‘정당성 위기’(legitimacy crisis)가 벌어진다.

 

 

국가는 정당성이 흔들리게 되면 곧바로 붕괴의 길을 걷는다. 북한이 1948년 건국 이후 2020년 현재까지 무려 70년이 넘도록 존속했다는 사실은, 북한의 지배자가 피지배자로부터 정당성을 획득했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말해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정치학의 기본적 이론은 북한이 김일성 공화국이 아니라 인민의 지지를 받는 ‘인민 공화국’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1930년대 후반 김일성은 만주지역에서 한인과 중국인의 연합부대인 동북항일연군으로 활동했다. 사진은 1949년 북한 최초 개발 기관단총 생산 기념식 때 군 수뇌부들로, 동북항일연군교도려 출신들이다. 왼쪽부터 최용건 김책 김일 김일성 강건. (사진은 제외 처리했음)

 

 

북한이 인민 공화국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단초는 많다. 김일성이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시기, 나는 그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내 아버지는 1912년생으로 김일성과 동갑이다. 물론 부친과 김일성은 전혀 모르는 사이였지만, 아버지의 친구들 중에는 김일성과 알고 지내는 분이 적지 않았다.

 

 

나는 그분들에게 김일성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보곤 했다. 그러면 그분들은 김일성이 “100명의 군인보다 1명의 인민을 친구로 두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고 답해 주었다.

 

 

1930년대 김일성은 김책, 최용건, 최현 등과 함께 동북항일연군에 참여해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그런데 동북항일연군에서 펼친 게릴라전은 마오쩌둥의 독특한 ‘인민’ 개념에 기초를 둔 전략이었다. 마오쩌둥은 ‘인민을 물에 비유할 수 있다면 게릴라는 그 물에서 사는 물고기에 비유할 수 있다’, ‘인민이 바다라면 혁명가는 그 바다에서 헤엄치는 존재다’ 등등의 얘기를 하곤 했다.

 

 

마오쩌둥은 바로 그 인민 개념에 기초해 계급투쟁이 아닌 인민전쟁(People’s War)을 전개함으로써 장제스(장개석)를 물리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박*식 교수는 김일성이 마오쩌둥의 ‘인민’ 개념을 수용해 주체사상에 반영했다고 설명한다.  중국 인민지원군 화보사가 펴낸 <영광스러운 중국 인민지원군>(1959년)에 실린 것으로, 한국전쟁 말기 중국군들이 북한 주민의 농사를 돕는 모습등의 사진등과 글 이 있다..

 

 

김일성은 모택동의 인민 개념을 창조적으로 수용했다고 할 수 있다.

 

김정일의 <주체사상에 대하여>에서는 김일성의 인민 개념을 이렇게 설명했다.

 

“192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민족해방운동을 한다고 하던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은 인민대중 속에 들어가 그들을 교양하고 조직화하며 혁명투쟁에 불러일으킬 생각은 하지 않고 대중과 리탈되어 령도권 싸움과 말공부만 하고 있었으며 대중을 단결시킨 것이 아니라 파벌싸움으로 분렬시켰습니다.

 

 

수령님께서는 혁명투쟁에 나서신 첫 시기부터 이들의 잘못을 꿰뚫어보시고 이들과는 다른 길, 인민대중 속에 들어가 대중에게 의거하여 투쟁하는 참다운 혁명의 길을 걸으시였으며 혁명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며 인민대중 속에 들어가 그들을 교양하고 조직동원하여야 혁명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진리를 밝히시였습니다. 이것이 주체사상의 출발점의 하나입니다.”

 

 

북한에서 인민을 중시하는 정신은, 역사의 주역을 인민으로 파악하는 주체사관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예컨대 <조선통사>의 머리말을 보면, 김일성의 다음과 같은 교시에 따라 역사를 서술했다고 밝혔다.

 

 

“우리가 력사를 학습하자는 것은 왕이나 봉건통치배들의 력사를 알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민의 투쟁의 력사, 창조의 력사를 알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민의 투쟁과 창조의 력사를 잘 알아야만 조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의 감정을 소유할 수 있으며 민족적 긍지와 혁명적 자존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조선통사> 목차를 보면 모든 전쟁의 주역을 인민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수, 당 침략자들을 반대한 고구려 인민들의 투쟁” “거란 침략군을 물리친 고려 인민들의 투쟁” “13세기 몽골 침략군을 물리친 인민들의 투쟁” 등등. 을지문덕이 수나라 침략을 물리친 부분은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료하류역과 료동성을 방어하던 고구려의 애국적인 군인들과 인민들은 을지문덕의 지휘 밑에 수십배에 달하는 침략군을 상대하여 결사적인 방어전과 유인 및 기습전을 벌려 큰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이 전쟁의 최후승리를 앞당기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내가 볼 때 북한에서 주체사상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북한의 정치적 생존은 불가능했다. 북한이 건국 이후 온갖 형태의 국제정치적 도전과 경제적 난관 등을 극복하면서 지금까지 정치적으로 존속할 수 있었던 비결은 주체사상 때문이었다. 주지하듯 미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이해해야 한다. 마찬가지 논리로 얘기한다면, 북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체사상을 이해해야 한다.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루드비히 포이어바흐는 기독교와 헤겔철학에 대한 비판을 통해 유물론적인 인간 중심의 철학을 주창해 마르크시즘의 형성에 큰영향을 줬다. 박*식 교수는 북한 시절 황장엽과 포이어바흐의 사상을 두고 토론했다.

 

 

황장엽은 1999년 펴낸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에서 1948년 북한 중앙당학교 재학시절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끝으로 내가 북한에서 황장엽과 보낸 시간을 잠시 회고해보고 싶다.

 

나는 북한에서 황장엽과 약 8년 동안 여러 차례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때마다 황장엽은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얘기를 많이 했다. 포이어바흐는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는 유물론자였다. 포이어바흐가 볼 때 기독교에는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교리가 적지 않은데, 대표적 사례로 부활·구원·성령 등을 꼽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포이어바흐는 기독교에서 그런 교리를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기독교 그 자체의 존속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 자신이 합리적 설명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황장엽은 포이어바흐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주체사상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는 황장엽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와 장시간 토론했다. 그러나 황장엽과 나는 서로 간의 생각의 간격을 끝내 좁히지 못했다. 내가 볼 때 황장엽은 포이어바흐처럼 이성으로 무장한 합리주의자였다. 그러나 나는 종교적 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형이상학적 사유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황장엽은 1997년 남한으로 건너온 이래 여러 책을 펴냈다. 나는 그중에서 1999년 그의 첫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에 주목했다. 그 제목을 보는 순간 포이어바흐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황장엽이 해결한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펴보니 전혀 다른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 내용은 무엇일까? 나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책에도 그건 노코맨트란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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