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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사료집<자료>》. 일제와 항쟁 역사 01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93 2020-09-10 08:13:55

 01편?


1930년대 초 중국공산당은 소위 李立三(리립삼) 노선과 王明(왕명) 노선으로 불리는 잘못된 방침을 채택하여 당시의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좌경화된 전술을 채택하여 큰 어려움을 겪었다. 예를 들면 만주지역에서 ‘한인자캄나 ‘간도독립’·‘한인 소비에트’ 등의 독자적 요구와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중국공산당 중앙은 이를 반대하고 관내지방과 마찬가지로 민중자치정권인 소비에트정권과 紅軍(홍군)을 세우라고 무모하게 지시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항일투쟁이  고양되는 정세하에서 중공당 만주성위원회는 각종 항일부대를 적대하고 모든 지주나 자본가를 타도하여 그들의 재산을 몰수한다는 그릇된 방침을 세웠다. 그리하여 자신의 적을 만들어 입지를 약화시켰고, 곤란한 정세를 자초하였다 <참고>{ 김동화,<중국조선족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민족정책의 력사적 고찰>(≪당대 중국 조선족연구≫, 연길:연변인민출판사, 1993), 15쪽.}

 
그러나 이러한 잘못은 1933년 1월 말부터 어느 정도 시정될 수 있었다. 중국공산당 중앙은 만주성위원회에 지시한<만주의 각급 당부 및 전 당원에게 주는 편지-만주의 상황과 우리 당의 임무에 대하여>에서 노동계급의 영도권 견지를 전제로 한 반제통일전선의 형성을 제기했던 것이다.<참고> { ≪東北抗日聯軍史料≫編寫組 編, 앞의 책, 41∼57쪽. }
 
중공당 만주성위는 이에 따라 좌경오류의 시정, 모든 반일역량을 연합한 반일반제투쟁의 전개, 선출된 민중정부 및 인민혁명군의 건립 등을 긴급한 당면 과제로 설정하고 이를 위해 분투하였다. 이 과정에서 각 지역에 있던 반일유격대를 기초로 하여 항일민족통일전선의 성격이 강화된 ‘동북인민혁명군’을 건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중공당 만주성위의 이 같은 방침에도 불구하고 ‘좌경’의 오류는 1935년 경까지 완전히 극복되지 못했다. 특히 동만(연변) 지역에서 전개된 ‘반민생단 투쟁’으로 1932년 말부터 1935년 중반까지 이 지역에서 무고한 한인 독립운동가 431명이 밀정혐의를 받고희생되는 참변이 있었던 것이다  한인들은 ‘중국혁명’에 직접 참가하는 것을 통해 ‘조선혁명’, 즉 조선(한국)의 독립과 민족해방이 이룩된다는 신념으로 반제투쟁에 참가했으나, 이 시기에는 중국인들의 배타주의와 중공당 만주성위 내부의 좌편향으로 자신들의 궁극적 이상인 ‘조선혁명’을 제기할 수조차 없었다. 그 결과 성립 초기 중공당계 무장조직의 핵심을 이루었던 한인 세력은 민생단 사건 이후 현저히 위축되고 영도간부의 다수가 漢族(한족)으로 교체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 무렵 상당수의 한인들이 박해를 피해 도주하거나 변절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중공당 만주성위는 이러한 사정에서도 중앙의 지시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을 건립하고 만주 각지에서 봉기한 항일의용군 등과 연합작전을 추진하였다. 그 사례가 바로 앞에서 밝힌바 한국독립군도 참여한 1933년 가을의 동녕현성 전투이다. 이 전투에는 왕청·훈춘유격대원 100여 명이 참여하였다.
 
중국공산당 반석현위원회와 남만유격대는 항일투쟁이 점차 격화되고 유격대의 역량이 성숙함에 따라 1933년 8월 남만유격구와 유격대대표자회의를 열어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를 건립키로 했다. 그리하여 일제의 만주침략 2주년이 되는 그 해 9월 18일 반석에서 이 부대의 성립을 정식으로 선포했다.
 
이 무장세력은 만주에서 가장 먼저 결성된 중공당 계통의 정규군인 셈이었다. 때문에 성립선언과 정강, 사병우대 조례, 각종 선언문 등을 발표하여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밝혔다. 그러나 이들 문건 가운데 한국(조선) 독립(해방)이나 혁명의 지원을 직접 표방한 내용은 없었다. 사실 1931년 5월 중공당 만주성위원회는<만주 한국민족문제 결의안>을 통과시켜 한국혁명을 원조해야 한다고 했지만, 1930년대 초의 좌경화된 분위기하에서 위의 원칙은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
 
1군 독립사는 1934년 11월에 2개 사로 분화·발전하였다.
 
창건 당시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는 300여 명 규모였는데, 師長(사장)겸 정치위원은 한족 양정우였다. 반면 참모장 이홍광과 소년영장 朴浩(박호), 3단 단장 韓浩 (박호)등 주요간부가 한인이었다. 이 조직의 1/3 가량은 한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군 독립사는 1933년 말에서 이듬해 초까지 많은 전투를 치렀으나, 이 가운데 유하현 三源浦(삼원포) 공략전과 凉水河子(량수하자)·八道江(팔도강)전투 등이 유명하다. 
 
특히 1935년 2월 13일 새벽 이홍광이 2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을 습격한 전투는 국내외에 큰 반향을 일으킨 국내진입작전으로 유명했다. 이는 1930년대 만주 항일무장투쟁 세력 최초의 대규모 국내진입작전이라 할 수 있다.
 
한편 1934년 동만주에서 한인 朱鎭(주진)을 사장으로 성립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는 안도현과 왕청현 일대에서 한 해 동안 900여 회의 전투를 치르며 유격근거지를 방어하였다. 이른바 일제의 ‘제3기 치안숙정계획’을 무산시킨 것이다. 
 
2군 독립사는 1,200여 명의 병력과 980여 정의 총을 갖고 있었는데, 그 병력의 2/3가 한인이었다. 따라서 사실상 이 항일부대는 조선혁명군이나 한국독립군과 같은 민족주의계 독립군과 이념을 약간 달리할 뿐, 일제타도라는 목표와 그를 위한 역할의 수행은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중공당 반석현위원회는 1934년 3월 경 신빈일대에서 강고한 세력을 형성하며 완강히 일제와 싸우고 있던 조선혁명군과 국민부에 사람을 파견하여 병사들을 중심으로 한 연대공작을 진행하라고 1군에 지시했고,이후 양 부대는 일정한 연대를 모색하였던 것이다.
 
북만주의 密山(밀산)에서는 1934년 3월 40여 명의 밀산 반일유격대가 조직되었는데, 역시 한인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 유격대는 그 해 9월 중국의용군과 연합하여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으로 편성되었다. 또 1932∼1933년 경 탕원현에서 발족한 탕원유격대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여러 차례 전투를 거치며 그 대원이 6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후 이 유격대는 1936년 초 주변의 자위단·경찰 등을 흡수하여 동북인민혁명군 제6군으로 편제되었다.
 
이상에서 서술한 것처럼 남만지방을 활동기반으로 하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과 동만지방을 근거로 하는 2군은 한인이 주력을 이루었고, 사실상 이 시기 중공당계 산하부대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1930년대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에서 재만 한인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은 많은 어려움을 수반했다. 더욱이 1933년에서 1935년 사이에 일제는 자체의 무력과 괴뢰 만주국 군경·관헌을 동원하여 혹심한 탄압을 자행했다. 이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은 적의 포위공격을 돌파하기 위해 남만과 북만의 평야지대로 진출하여 유격전을 벌이는 전술을 모색하게 되었다.
 
1935년 8월 1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국민당정부군의 공격을 받고 쫒겨가고 있던 도중에 소위<8·1선언>을 발표하고 내전중지와 거국적 국방정부의 구성을 제안했다. 또 이듬해 12월 장학량이 蔣介石(장개석)을 구금하는 ‘西安事變’(서안사변)이 발생하여 관내에서 제2차 국공합작이 성사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8·1선언>은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을 구체적으로 제안하고 있었는데, 각 당파와 민족, 모든 계층을 망라한 항일연합군의 조직을 명시했다.
 
이 선언에 따라 중국공산당 만주조직은 1936년 1월 회의를 소집하고 각 항일부대를 ‘東北抗日聯軍’(동북항일련군)으로 재편성키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종래의 동북인민혁명군과 여러 항일부대가 결집되고 중국공산당 만주조직이 영도하는 동북항일연군이 제1군부터 11군까지 결성된다.
 
이후 만주지역 무장투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즉 중공당 만주조직은 항일투쟁을 위해 각계 각층과 연대하는 것은 물론, 재만한인들의 조국광복운동 직접원조와 자치구 건설, 한인을 위한 항일전쟁의 원조를 결의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한인으로만 조직된 독립부대의 창설도 고려되었지만, 한인 간부들 스스로 활동상의 어려움을 들어 이를 반대하고 종전처럼 중국인과 함께 혼합부대를 편성·유지키로 하였다. 동북항일연군 가운데 한인이 많았던 1군과 2군, 특히 2군은 한·중 양 민족의 연합을 실현한 ‘독립군’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는 일본 관헌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3개 師(사)와 교도대, 기타 연계세력을 합쳐 2,000여 명으로 추정되던 동북항일연군 제2군의 경우 절반 가량이 한인이었고, 특히 金日成김일성이 이끄는 제3사 병력의 대부분이 한인이었다는 점으로 뒷받침된다.
 
 
그러나 일제의 ‘토벌’이 강화되자 동북항일연군 1군과 2군은 1936년 7월 통합되어 양정우를 총사령으로 하는 제1로군으로 재편성되었다. 이 때 제2군 1·2·3사는 각각 4·5·6사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 가운데 한인이 많은 6사(사장 김일성)와 4사는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백두산 일대로 진격하여 유격구를 건설하였다. 그 뒤부터 長白縣(장백현) 등 백두산 일대는 1940년 경까지 재만한인 항일무장투쟁의 주요 중심지가 되었고, 항일민족통일전선 조직을 표방하며 조직된 ‘在滿韓人祖國光復會’(재만한인조국광복회) 건설 및 국내진입작전의 근거지가 되었다.
 
특히 6사는 1937년 6월 80여 명의 병력으로 함경남도 혜산군 普天堡(보천보)를 기습하여 일제 통치기관을 파괴하는 등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전투 이후 동북항일연군내 한인 부대의 활약이 국내 대중들에게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조국광복회의 조직이 일제에 탄로되어 붕괴되는 손실을 초래했고, 일제 군경의 집요한 추격을 촉진하는 역기능을 가져오기도 했다.
 
1936·1937년 경 동북항일연군은 동·남·북만 등 각지에서 큰 세력을 이루고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물론 재만한인들도 여기에 대거 참가하여 많은 활약하였다. 이무렵의 주요 한인간부 현황을 살펴보면<표 3>과 같다.
 
<표 3>1936·1937년 경 동북항일연군내 주요 한인 간부 현황
부 대결성날짜주요 한인 직책과 명단제1로군1군1936. 7참모장 安光勳(안광훈), 1사 참모장 李敏煥(리민환), 2사 참모장 李希敏·李
興紹(리희민?(리흥소)정치부 주임 全光(전광)(본명 오성륜), 8단장 玄基昌(현기창)3사
정치부 주임 柳萬熙(류만희)2군1936. 3정치부 주임 전광, 4사 사장 安鳳學(안봉학), 참모장 朴得範(박득범), 1단장
崔賢(최현), 정치위원 林水山(림수산), 제6사 사장 김일성, 7단장 金周賢(김주현),
정치위원 洪範(홍범)·金在範(김재범), 독립려 1단장 崔春國(최춘국)제2로군4군1936. 4정치부 주임 黃玉淸(황옥청), 정치주임 康山(강산), 2사 부사 장겸 4단장
李學福(리학복), 정치부 주임 崔榮華(최영화), 참모장 崔庸健(최용건), 4사 정치부
주임 朴德山(박덕산,,김일)5군1936. 22사 4단 정치위원 金光俠(김광협), 5단 정치위원 朴東和(박동화), 3사 8단
정치위원 姜信泰(강신태), 경위려 1단 정치위원 姜信一(강신일)7군1936.11대리군장 최용건, 군장 이학복, 군·당 위원회:집행위원
金鐵宇(김철우)·특별위원 金品三(김삼품), 1사 정치위원 李佾平(리일평), 3단장 金昌
海(김창해), 2사 참모장 金鐸(김탁), 4사장 金世昌(김세창)8군1937. 71사 정치위원 및 3사 정치부 주임 金根(김근)제3로군3군1936. 8군장 許亨植(허형식), 정치부 주임 金策(김책)9군1937. 1정치부 주임 허형식11군1937.10정치부 주임 金正國(김정국)
1938년 경 동북항일연군의 규모는 1,850명 정도였다. 여기에는 중국공산당 계통 직속부대 외에도 다수의 각종 항일부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상당수의 대원이 희생되었고, 일제의 탄압과 회유공작이 극심해짐에 따라 차츰 어려운 국면에 처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의지가 굳지 못한 일부 참가자들이 변절하거나 도주·투항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어려움에 처하여 항일연군 제1로군은 警衛旅(경위려)와 3개 方面軍(방면군)으로 편제를 바꾸어 무장투쟁을 계속했다. 이 가운데 4사와 5사가 통합되어 편성된 제3방면군은 60% 정도의 대원이 한인이었고, 역시 종래의 제6사가 개편된 제2방면군은 대부분의 구성원이 한인이었다.
 
이 부대는 남만주와 백두산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며 적에게 큰 타격을 가하였다. 남만주의 조선혁명군이 1937년 초·중반 일제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결국 1938년 2월 동북항일연군에 편입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한인이 다수를 이루는 이 시기의 항일연군 제2·3방면군은 사실상 독립군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일본 관동군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에 한인 영도간부가 많고 특히 한인들을 대상으로 선전활동을 전개하는 등 민족주의성향이 농후하다고 평가하였다. 
 
이 때문에 한국인들은 물론 중국인들도 가끔 이 부대를 ‘조선인민혁명군’이나 ‘조선혁명군’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이상..
 
<참고> 
 
※김동화,<중국조선족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민족정책의 력사적 고찰>(≪당대 중국 조선족연구≫, 연길:연변인민출판사, 1993), 15쪽. 
※ ≪東北抗日聯軍史料≫編寫組 編, 앞의 책, 41∼57쪽.
※ 김동화, 앞의 글, 16쪽. 
※  孫繼英·周興·宋世章, 앞의 책, 46∼47쪽. 
※  楊昭全·李鐵環 編, 앞의 책, 733쪽. 
※ ≪조선일보≫, 1935년 2월 15일.
 ※<中共磐石中心縣委員會給人民革命軍第1軍獨立師全體黨·團同志的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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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스피린 ip1 2020-10-11 22:02:18
    아스피린이 돌통이를 인간쓰레기 혹은 바퀴벌레색퀴라 부르는 것은

    돌통이가 대한민국과 북한에 특대형 재앙을 가져다주고

    어마어마한 특대형 경력위조, 현대사 위조를 자행한 김일성과 그의 자손들을

    칭송하고 빨아대면서 그놈들의 범죄에찬 역사와 경력들을 슬쩍 슬쩍 은근히

    선전선동, 찬양하고 있기때문이다.

    오늘 지금 이시각도 나의 고향이 있는 북한에서는

    나의 친척들과 추억을 함께 쌓은 소싯적친구에서 학창의 친구들,

    힘들었지만 활기에찼던 군복무시절에 우정을 쌓았던 친구들

    그리고 한동네에서 같은 삶의 터전에서 스쳐간 수많은 인연들이

    돌통이 색퀴가 흠모하여 칭송하고 빨아대는 김일성과 그 자손들에 의하여

    현대문명을 향유하기는 고사하고 인간의 초보적 권리인 하루 세끼 끼니조차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또한 김일성과 그의 후손들의 사리사욕과 이기심으로 말미아마

    핵전쟁의 위협속에 늘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상황이다.

    이러한 인간쓰레기들을 빨아대는 돌통이의 행위는 그러지않아도 충분히 어려운

    북한사람들의 삶에 보다 더 큰 고통을 가증시키는 행위이며 그러지 않아도

    김정은의 핵위협속에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삶에 더큰 고통을 가증시킨다

    이 쓰레기색퀴는 이런 김씨 인간백정들을 항일영웅이라 추앙한다

    이 쓰레기 새퀴는 탈북자들이 이런 쓰레기같은 김씨일가들보다 못하다고 지꺼렸다

    그리고 이 쓰레기 색퀴는 그 목적은 알수 없으나 간첩들도 들여다보는

    공개적인 이 창에다 주민번호를 올리라고 탈북자들을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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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통이 쓰레기 색퀴는 이 창에서 지놈 주제가 동국대 대학원생 이라고 지놈 아가리로 지꺼렸다

    근데 대학원생이란 색퀴가 얼마나 무식한지 댓글하나 지어내질 못해서 탈북자 쌜러리맨

    아스피린의 댓글을 카피 위조하여 본인의 댓글인양 버젓이 뻔뻔스럽게 올린다

    대한민국 대학원생 중에 댓글문장도 제대로 못만드는 대학원생도 있는가?

    혹시 돌통이가 다닌다는 그 대학원은 바로 공자대학 대학원인가?........

    대가리가 댓글 하나도 제 대가리로는 지어낼수 없는 아메바 대가리 주제에 ............

    그 수준 그 정도에 누굴 가르친다고 매일 같이 김씨찬양 종북 선전선동의 글들을 퍼다가 싸지른다

    돌통이색퀴는 그런 주제임에도 창피나 부끄러움을 절대 모르는 미개한 하등 생명체이다

    그래서 아스피린은 돌통이를 종북 바퀴벌레,혹은 종북 오물 쓰레기라 부른다

    이러한 연고로 아스피린은 돌통이를 인간쓰레기, 바퀴벌레색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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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통이색퀴야 이중에 네놈이 한짓이 아닌것이 있으면 당당하게 말해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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