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녕현성 전투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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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녕현성 전투
1933년 9월 6일 나자구에서 이동해 온 한국독립군은 오의성 휘하에 시세영, 사충항, 김산 등의 부대 및 중국공산당의 혼춘 왕청 유격대 한인 부대와 연합하여 동녕현성을 공격하였다. 이 전투는 익일 까지 지속되었는데 한때 현성 안으로까지 진격했으나 일본군과 만주군 증원군의 도래를 우려하여 철수하였다.(참고), 「한국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364~365쪽. 이 전투에 대해서는 조경한이 집필한 1942년의 『광복』의 글이나 『백강회고록』에서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전투에 김일성이 참가했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장세윤에 의하면 북한에서는 왕청 유격대의 대장은 김일성이고 더 나아가 1500여의 반만항일군이 연합하여 전개한 이 전투 자체를 김일성이 지휘했다고 “왜곡하여 선전”하고 있다고 한다.(참고) 위의 논문, 365쪽. 북한의 논저에서는 물론 김일성이 총지휘했다는 동녕현성 전투에 한국독립군의 존재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박환, 「항일력사문제 제3차 국제학술토론회 참관기」『한국민족운동사연구』 38, 2004, 333-334쪽 참조. 북한의 앞과 같은 주장은 (1989) 중국 측의 여러 기록들에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고 하였다. 오히려 중국측의 여러 단행본에는 왕청유격대 대장이 양성룡이었고 그 규모도 겨우 40-50명에 지나지 않는 미약한 세력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참고) 장세윤, 위의 논문, 365쪽. 그러나 중국측 연구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김일성이 참전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장세윤은 중국측의 역사 저서로 『조선족약사』나, 『연변당사 사건과 인물』, 『조선족 백년사화』제2집 등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중국 학계에서는 동북항일련군의 일개 간부로 활동했지만, 그러나 8·15후 동맹국의 수령인 김일성을 역사서에 어떻게 반영해야 하는지 늘 고민해야 하였다. 『조선족약사』(1986)의 경우에는 조선족의 항일투쟁을 중국 항일투쟁의 일환으로 간주하고 있으나 김일성을 비롯해 북한으로 8·15후 돌아간 사람들의 활동은 중국의 항일투쟁이 아닌 국제 지원활동으로 정리하였으며 따라서 그들의 활동은 기본적으로 다루지 않고 본문이 아닌 서문에서 그 의의를 서술해두는 것으로 정리하였다.(참고)이에 대해서는 염인호, 「재만 조선인 항일투쟁사 서술과 ‘중국 조선족’의 탄생」『한국학연구』 28,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2, 156~167쪽. 『조선족간사』 초고본(1964)에는 북한이 중시하는 보천보전투 사실은 빠져 있다. 한편 한국 학계의 일각에서는 조경한의 회고와 북한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여 동녕현성 전투에서 이청천의 한국독립군과 김일성의 왕청 유격대가 함께 참가한, 이념을 초월하여 단결하여 전개한 항일투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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