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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한반도의 근현대사 역사) 시리즈. 02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73 2020-10-25 14:27:42

02편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을 살펴보면..

 

 

세계대전의 종전과 민족자결주의 제1차 세계대전은 독점적 자본주의체제가 형성되면서 나타난 서구 자본주의국가들 사이의 불균등 발전으로 인해 식민지와 시장확보를 둘러싸고 폭발한 제국주의전쟁이었다. 

 

 

전쟁의 결과 열강간의 힘의 관계가 재조정되고 세계자본주의체제가 재편되었다. 세계경제의 지도적 지위에 있었던 영국이 몰락하고 미국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또한 전쟁 중에 일어난 세계사상 최초의 사회주의혁명의 성공은 러시아를 전쟁에서 이탈하게 하여 제국주의전쟁을 전면 부정하고 사회주의혁명과 약소민족의 해방운동을 촉진시킴으로써 자본주의체제를 위협했다.※ (참고)《이지원,〈3?1운동〉(《한국사》15, 한길사, 1994), 83~84쪽》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서구열강이 유럽의 긴장고조로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소홀해진 틈을 타 신속하게 이 지역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굳혀갔다.그들은 동맹국인 영국이 독일과 교전상태에 들어간 것을 구실로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독일령의 남양군도뿐만 아니라 靑島(청도)를 비롯한 중국 산동반도 일대의 독일 租借地(조차지)까지 점령했다. 

 

 

나아가 일본은 袁世凱(원세개) 정권에 ‘21개조 요구’를 제시하여 만주와 산동성, 그리고 복건성 및 내몽고지역의 식민화까지 기도했다.※ (참고)《이정식,〈1910년대 국제정세〉(《한민족독립운동사》3, 국사편찬위원회, 1988), 19쪽.》

 

 

전쟁의 결과 세계사의 중심무대는 유럽?대서양에서 미국의 전략적 이익의 관건이 되는 아시아?태평양지역으로 이동했다. 미국은 중국 본토와 만주에  대한 경제적 팽창을 도모하고 독일의 점령지였던 남양군도의 전략적 가치를 중시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장차 일본과의 대립이 필연적이었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한편으로 소련의 사회주의 혁명노선이 동아시아로 확산되는 것을 막고, 파리강화회의에서 국제연맹의 창설을 순조롭게 하기 위해 일본의 협조가 필요했다. ※ (참고)《조민,〈제1차 세계대전 전후의 세계정세〉(《3?1민족해방운동연구》, 청년사, 1989), 59~60쪽. 4) 김용구,《세계외교사》(서울대 출판부, 1998), 539~540쪽.》

 

 

식민지의 지위에도 중대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17년 11월 러시아혁명을 일으킨 뒤 레닌(V. Lenin)은 자국 내 100여 개 소수민족에 대해‘민족자결’을 원칙으로 하는〈러시아 제민족의 권리선언〉(1917. 11. 15)을 선포함으로써,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지배로 신음하고 있던 아시아의 피압박민족을 고무시켰다.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W. Wilson)도 전쟁 중에표출된 피압박민족의 독립 열망을 반영하고, 전후 식민지 문제 처리방안으로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다.※ (참고)《김용구,《세계외교사》(서울대 출판부, 1998), 539~540쪽.》

 

 

레닌과 윌슨이 표방한 ‘민족자결’은 전후 식민지 약소민족 문제의 처리에있어서 표면상 동일한 원칙을 제시한 것이었으나 함축하고 있는 내용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윌슨은 열강간 국제협약과 국제연맹하의 ‘위임통캄라는 형식으로 식민지 약소민족의 문제를 점진적?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했던 것이고, 레닌은 궁극적으로 사회주의혁명에 의한 제국주의 타도만이 식민지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한국민족운동세력은 미국이 일본과 잠재적인 적대관계에 들어갔다고 간주하고 미국의 대외정책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이 보유했던 식민지를 처리하기 위한 원칙으로 제시된 것이므로 승전국인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한국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뒤에 3?1운동을 추진한 ‘민족대표’들도 이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민족자결주의를 독립운동에 유리한 조건으로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참고)《李炳憲,(이병헌)《三一運動秘史》(삼일운동비사) (시사시보사 출판국, 1959), 514쪽.》

 

 

***  정부수립운동과〈대동단결선언〉

 

 

1910년의 ‘한일합방’부터 3?1운동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전개된 정부수립운동의 무대는 미주와 노령, 북경과 상해 등 세계정세의 변동에 민감한 지역이었다. 이 시기에 전개된 정부수립운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은 역시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따라서 1910년대 정부수립운동은 전쟁이 발발하는1914년을 전후로 하여 두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처음 정부수립이 제창된 곳은 미주 한인사회였다. 1911년 초 ‘미일전쟁’설이 유포되자 박용만은 이를 조선이 독립할 기회로 포착하여 사회조직인 대한인국민회를 정치조직인 ‘無形國家’(무형국가)로 건설할 것을 제창했다.※ (참고) 《

《新韓民報》(신한민보), 1911년 3월 29일.金度勳(금도훈),〈1910년대 초반 미주한인의 임시정부 건설론〉(《한국근현대사연구》10, 1999), 258쪽.》

 

 

이를 위해 대한인국민회를 국가인민을 대표하는 총기관인 ‘임시정부’로 설립, 3권 분립에의한 자치제도를 실시하며, 병역과 납세의무를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 주장은 1910년대 전반기 한국민족운동의 주된 방략인 독립전쟁론을 미일전쟁이라는 가정하에 제시한 것으로 당시 노령과 만주의 무장독립운동 세력과 연계된 것으로 주목된다.※ (참고) 《尹炳奭(윤병석),《增補(증보) 李相卨傳》(이상설전) (일조각, 1998), 159쪽.》

 

 

그러나 전쟁설의 誤判(오판), 대한인국민회를 임시정부보다는 한인의 ‘자치기관’으로 위치지우려는 온건론에 밀려 더 나아가지못했다.반면에 노령 연해주는 만주와 함께 ‘독립전쟁론’에 따라 독립운동기지화가 추진된 독립전쟁의 주요 거점이었다. 

 

 

여기에서 勸業會(권업회)는 1914년 러시아에서‘제2 러일전쟁’설이 팽배한 가운데 大韓光復軍政府(대한광부군정부)의 설립을 주도했다. 대한광복군정부는 노령과 중령을 세 개의 군구로 나누고 사관학교를 설치, 운영하는 한편 독립전쟁에 대비하여 노령과 만주에서 양성된 ‘광복군’을 망라하는 전투편성계획까지 수립했다.※ (참고) 《리영일,《리동휘 성재선생》(필사본), 201쪽.》

 

 

      이상..          0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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