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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북전쟁 북침설 음모론
Korea, Republic of 돌통 0 310 2020-12-30 14:12:50




연평도 포격, 연평도 해전, 동


해 잠수함 침투, 민항기 폭파, 


대통령 암살기도등 세계가 깜


짝 놀랄 군사적 이벤트를 동족


끼리 종종 벌이는 한반도에서 


음모론의 최고봉은 단연코 한국전쟁 북침설일 것이다. 


지겹도록 북한이 주장하고 일부 외국 한반도 전문가들이 거들며 남한내에서도 제기되는 한국전쟁 북침설에 대해 알아보자.

 

먼저 여기 적은 북침설은 음모


론의 한 예로서 왜 이런 주장이 


나오는 지를 분석한 것으로 절


대 개인적으로 신봉하는 이론


은 아니니 좌빠나 빨갱이 이론 


추종자라는 오해는 말아주길


바란다. 


요즘은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


권의 치적을 강조하거나 복지, 


평등 정책을 논하거나 예전 4대


강 사업에 반대하면 좌빨이고, 


반대이면 보수 꼴통으로 매도


되는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웃


기는 세상인지라 최소한 80 까


지는 무탈하게 살아야 되는 내 


입장에서 글 쓰기도 부담스럽다.





한국 전쟁 발발 전인 1949년 1월 18일부터 1950년 6월 24일까지 옹진반도, 개성, 의정부, 춘천, 강릉지역을 중심으로 한 휴전선 전역의 국지전은=(소규모전투) 총 874회에 달한다. 


이중 북한 주장으로 432회는 남한의 북진으로 야기된 국지전으로 일부 사실로 인정받는 부분이다.

 

실제 1949년 6월 7일 남한 병력은 38선 북쪽 2km지점을 선제 공격해서 고지를 점령했고 6월 17일에는 8km 북쪽 태탄을 공격했으며 6월 18일에는 은파산을 점령했다. 


남한군 및 북한군 모두가 적극적(?)으로 상대를 기습 공격한 이들 국지전에는 대포와 탱크까지 동원되기도 했다. 


남한 기준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한 날은 1950년 6월 25일이고, 북한 기준으로는 1949년부터다.





해방 후 소련의 군정을 받다 소련군이 1948년 12월에 철수한 북한이나 1949년 6월 29일 미군이 철수하면서 미군 군정에서 벗어난 남한이나, 서로를 무력 통일하려는 강한 의지를 불태우던 시기가 1940년대 한반도 정치 상황이었다. 


당시 북한의 독자 전쟁 수행능력이 없다고 오판한 CIA를 포함한 미 행정부는 한국, 대만을 제외한 일본-필리핀으로 아시아 방어선을 확정한 애치슨 라인을 1950년 1월 발표한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을 포함한 국방장관들(이범석, 신성모)은 북한의 전력을 얕잡아보고 미군

도 빠진 상황에서 언제든 기회가 오면 자력으로 북진 통일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여러차례 천

명한다.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은 심지어 라디오 인터뷰에서 "북진명령만 내리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라는 명 대사를 칠 정도로 남한 정부는 전력에 자신있어했다. 


실제로 남한대비 군사력에서 열세였던 북한은 소련의 무기 지원과 중국군내 조선군 병력 3만을 흡수해서 1950년 초에는 남한보다 월등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남침 유도설과 북침설이 나오게 된 배경상황이 펼쳐진다. 


남북한 전력차를 오판하고 있었던 남한의 군부나 집권당이 당시 874회에 달했던 국지전 상황에서 일부 전투를 이용 북한군의 대규모 공격을 유도하고 그를 기회로 휴전선 일대의 전투가 아닌 전면전 형태로 반격하려 했다는 의견이 남침 유도설이다.

 

유도한대로 남침은 했으나 의도한대로 반격을 하지 못하고 속절없는 후퇴만 거듭했다는 이 주장은 해외 한반도 군사 전문가들이나 남한 군 전문가들중 일부에서도 깔끔하게 부인하지 못하는 가능성중 하나로 남아있다.


 
 


남한이 먼저 선제공격했다는 북침설의 배경은 아이러니하게도 남한내에서 만들어졌다. 1950년 6월 25일 옹진반도를 지키고 있던 한국군 17연대가 당시 북한군 제3 여단의 공격을 받게되고 이후 한국전쟁으로 이어지게 된 이 날의 개전 초기까지만 해도 이 전투는 무수한 국지전중 하나로 취급되어 늘상 있는 소규모 전투로 인식되었다. 

 

문제는 다음 날 일어났다. 개전 다음 날인 6월 26일 KBS, 동아, 경향, 조선, 서울신문 및 뉴욕 타임스, 워싱턴포스트등은 26일 오전 8시 30분 전황으로 남한 17연대가 해주를 점령했다고 보도했다. 


이 뉴스는 지금까지의 국지전 보도와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남한의 군대가 과감히 북진하여 북한의 주요 거점이자 대도시중 하나를 점령했다는 의미로 드디어 칼을 빼든 용감한 결단으로 비쳐졌고 국민들은 열광했다.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오보인 셈이다.





하지만 이는 해주까지 진격할 계획이라는 반격 의지를 잘못 보도한 명백한 오보로 이를 믿은

서울 및 경기도 시민들은 서울이 함락될때까지도 피난을 가지 못하게 됬고 이후 이 자료를 기준으로 국군이 해주를 먼저 공격해서 점령했으나 북한군의 강력한 반발로 후퇴하게 되고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는 북침설의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이전에 발생한 900여건의 전투에서 있었던 일부 남한 병력의 북진 사례들도 1949년을 한국 전쟁의 원년으로 보는 북한 관점에서 북침설의 근거로 제시되곤 한다.  

 

이후 한국전쟁의 전개 양상은 우리 모두가 아는 바대로 남측의 무기력한 패배로 이어졌으나 다행히도 북한군은 박헌영이 공헌한 20만 남로당 게릴라의 봉기를 기다리며 서울에서 수일을 지체하게된다. 박헌영은 당시 실제 봉기가 일어나지 않은 책임을 지고 이후 숙청된다.

 

북침설은 사실상 북한의 우방에서도 폐기된 이론이고 1949년의 국지적 북진은 전면전이 아니었으며 남한의 해주 점령 오보는 말 그대로 오보였던 관계로 북침설의 근거로서의 설득력이 미약하다. 


하지만 여전히 논쟁중이며 검증이 어려운 부분은 당시 이승만정권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남침 유도설'이다. 




"우리는 무력으로 조국을 통일할 준비가 되어있다" 라고 공언했던 당시 정권 지도부와 실제로 전쟁을 원했으며 국지적 도발을 지시하기도 했던 이승만 대통령 덕분에 남침 유도설은 명확히 부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주장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음모론으로 남아있게 될 운명인것 같다.

 

당시 정권이 '북진 통일'보다는 친일파의 처단, 파탄난 민생 경제의 회복, 500명 군사 고문단만 남긴채 철수한 미군의 전력적 공백의 보완등에 더 고심했다면 아직까지도 찜찜한 '남침 유도설'에서 자유로울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백성들의 고충보다 정치적 업적 달성에 더 집중하는 정치인들의 행태는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 같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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