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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정치사의 실체)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의 역사적 사료로 살펴본..그는 누구인가?
Korea, Republic of 돌통 0 362 2021-01-23 15:42:03
***  김일성의 父  김형직..

 

 

** 평양 만경대라는곳에 김형직의 묘 앞에 있는 김형직, 강반석 부부 동상이 있다고 한다.

 

 

*  1932년 7월 모친 강반석 사망

 

김형직(金亨稷, 1894년 7월 10일 ~ 1926년 6월 25일)

 

강반석 (康盤石, 1892년 4월 21일 ~ 1932년 7월 31일)

 

 

 

       백산무사단      : 김일성의 외삼촌 강진석도 여기 단원이었음.

 

     [ 白山武士團 ]

 

유형 단체 시대 근대 성격 독립운동단체 설립일시 1921년 5월

 

 

 

**  1921년 5월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이다.

 


백산무사는 백두산의 무사를 의미한다. 이 단은 임강현 모아산(帽兒山)에 근거를 두고, 1921년 5월에 조직되었다. 각 지방에 조직망을 펴 6,000여 명의 단원을 확보한 만주 내의 가장 대규모의 독립운동단체였다.

 

 

간부진은 단장 이두성(李斗星), 총무 김보환(金寶煥), 서기 김성진(金成晉), 내무 이영빈(李永彬), 통신원 김득종(金得宗)이었다. 조직으로 5부를 두어 재무·경호·통신·외무 등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제1부 부장은 알 수 없으나 재무는 김시우(金時禹)였고, 상해임시정부의 명에 의해 평북독판부(平北督辦府)라 칭해졌다.

 

 

제2부는 부장 임선화(任善化), 이사원 최정(崔貞), 경호원 김정삼(金貞三), 서기 김준삼(金俊三), 통신원 조성록(趙成祿), 외무원 김석춘(金石春)·강진석(康晉錫)이었고,

 

제3부는 부장 남기락(南基洛), 이사원 김종주(金宗柱)였으며, 제4·5부는 알 수 없다.

 

 

전투부대인 독판부(督辦府)는 독립군을 편성해 만주와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구성원은 대개 평안남도와 평안북도 출신으로 활동범위도 평양·순천 등지였다. 강진석은 평양 등지에서, 유경운(柳璟雲) 등은 순천 등지에서 지단을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금하였으며, 김예진(金禮鎭)·이춘성(李春成)은 주로 상해(上海)에서 활동하였다.

 

 

1922년 4월 평양에서 활동 중이던 강진석, 신훤(申?)·신근(申槿) 형제와 그 어머니 이경임(李敬妊), 아내 유사로(兪似老), 이정선(李丁善)과 황용호(黃龍浩)가 조선총독부경찰에 잡혔다. 그 뒤 이두성 등은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참의부(參議府)·의용군(義勇軍)에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참고문헌

  • 『朝鮮獨立運動』 Ⅱ(金正明 編, 原書房, 1967)
  • 『한국독립운동사』 3·4(국사편찬위원회, 1967·1968)
  • 『독립운동사』 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第三 移住朝鮮人中 有力者 調査表
長白縣 部
(住所)八道溝 (職業) ?[醫]者 (氏名年齡) 金亨稷 當三十三年 (親排日別) 排日 (資産) 1,000円
(摘要) 平南平壤出身 漢學 素養 大正八年三月 朝鮮獨立騷擾事件 主謀者 官憲 逮捕 恐 同年五月 對岸 走 當時 不逞輩...改悛後 ?業從事

 

 

(해석)  제삼 이주 조선인 중 유력자 조사표
장백현 부


(주소)팔도구 (직업) ?[의]자 (씨명 연령) 김형직 당 삼십삼년 (친배일별) 배일 (자산) 1,000엔


(적요) 평남 평양출신 한학 소양 대정 팔년삼월 조선독립소요사건 주모자 관헌 체포 공 동년오월 대안 주 당시 부령배...개전후 ?업종사

 

 

관련 사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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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재산 1000원의 크기는?

 

在滿避亂同胞(재만피란동포) 慰護金品遝至(위호금품답지)

 

1931.12.06. 동아일보 6면 사회 기사(사고)
 
金日成一金(김일성일금) 十(십) 錢也(전야) 全文順一金(전문순일금) 十(십) 錢也(전야) 金昌根一金... 金龍三一金(김용삼일금) 十(십) 錢也(전야) 裴光學一金(배광학일금) 十(십) 錢也(전야) 曺斗貞一金二十錢也...

 

 


김일성考...소위 만경대 집구석의 혁명가계도 진명행



1925년 일본의 기록을 보면 김형직은 3.1운동때 중강진에 있으면서 만세사건을 주도함.

 

그러나 그는 그후 일제에 체포될까 두려워해 만주 임강(臨江)으로 도망간 후 귀의하고 의원 짓을 하고 있었음.

 

김형직은 무면허 의원을 차린후  (무면허는 김일성도 인정함) 엄청난 돈을 벌어들임. 그리고 1919년~1925년 6년 사이에 중국 장백현에서 제일 가는 재산가가 됨. 그의 자산은 당시 무려 1천원이 되었다고 함.

 



김일성의 할머니 리보익에 대해서도 김일성 전기에 이르기를, 일제의 귀순공작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거절하며 절개를 지킨 대쪽 할미로 나옴, 그러나 일본측 기록을 보면 리보익은 야부 토벌대의 숙정공작에 불려다니며 김일성 귀순작전에 적극 협조한 적이 있음. 만주의 첩첩산중에 숨어있는 김일성을 귀순시키기 위해 "성주야~ 내다, 할미야. 어디있니. 고생하지 말고 어서 내려와. 부탁이야." 라며 처량한 목소리로 방송 라이브를 하였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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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에 소장된 김형직 독립운동 사료


북한 고(故) 김일성 주석의 부친이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조부인 김형직이 항일 비밀결사를 통해 독립운동을 펼쳤음을 입증하는 사료가 독립기념관에 소장돼 있는 사실이 확인됐다.

 

왼쪽은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현대사 자료"(강덕상 편저.1967) 조선편 1권, 1918년 2월 18일 일제에 의해 체포된 조선국민회 회원 명단 속에 김형직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

 

오른쪽은 1918년 9월 12일자 신한민보의 조선국민회 관련자 체포 기사.//북한/ 2005.3.23. (서울=연합뉴스)

姜德相 編, 『現代史資料』(第25~30卷:朝鮮篇), みすず書房, 1967~1976.

 

번역: 강덕상 편, 『현대사자료』 (제25~30권:조선편),  미스 쇼보서방, 1967~1976.




(서울=연합뉴스) 함*현 기자 = 북한 고(故) 김일성 주석의 부친이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조부인 김형직(金亨稷.1894-1926)이 항일 비밀결사를 통해 독립운동을 펼쳤음을 입증하는 사료가 독립기념관에 소장돼 있는 사실이 확인됐다.

23일 독립기념관측에 따르면 소장된
'현대사 자료'(강덕상 편저.1967) 조선편 1권에 따르면 김형직은 항일 조직인 조선국민회에서 활동하다 1918년 2월 18일 평안남도 일경에 의해 검거돼 형사소추를 받았다.

'평안남도 경무부장 보고요지'는 김형직이 서당교사이며, 평안남도 강동군 정읍면 동3리에 거주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보고요지에는 또 회장 장일환(1886-1918)을 포함해 백세빈, 배민수 등 조선국민회 회원 25명의 본적, 주소, 나이, 역할 등이 상세히 나와 있다.

조선국민회는 1917년 3월 23일 장일환의 주도로 평양 숭실학교와 평양신학교 출신, 교사와 재학생 등이 결성했으며 비밀리에 전국적인 조직망을 확대하던 중 이듬해 2월 일제 당국에 발각됐다.

북한은 조선국민회를 3ㆍ1만세운동을 전후해 가장 큰 반일 지하혁명조직으로 평가하면서 김형직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지만 국내 학계에서는 그 진위를 놓고 논란이 계속돼 왔다.

이날 독립기념관이 함께 공개한 재미 항일단체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1918년 9월 12일자)에도 회원 체포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신문은 "(일제 당국이) 2ㆍ3월부터 평양, 경성, 공주 등 각처에서 다수 한인 인사를 (조선국민회 관련자로) 포박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강영심 박사(이화여대 사학)는 논문 '조선국민회연구'(1989년)를 통해 "일제에 의해 밝혀진 조선국민회 회원은 25명이지만 이와 관련된 지역과 인물이 적지 않았다"며 조선국민회는 다른 비밀결사보다 더욱 치밀하게 비밀을 유지하면서 조직을 확대하고 무력양성 계획까지 세웠다고 말했다.

그는 또 김형직이 조선국민회 사건 이후 중강진으로 이사해 3ㆍ1만세운동을 지도하고 1925년에는 지린성 푸송(撫松)현으로 옮겨 정의부(正義府)계 백산무사단(白山武士團)과 연계ㆍ활동하다 이듬해 사망했다고 전했다.

강 박사는 그러나 현재 국내에는 김형직에 대한 사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활동상을 밝히기는 힘들다고 덧붙였다.

 

 


**  신한민보 1918년 9월 12일자 2면 : 內報(내보) 국립중앙도서관
    국민회와 련락이 잇다고...평양 공쥬 지사를 포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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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학우보 [ 新興學友報 ]

문헌이며 기관지의 형식이며 1913년 07월에 세워졌으며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1913년 7월에 창간된 신흥학우단()의 기관지.

 

 

신흥학우단은 1913년 3월신흥중학교의 교장 여준(呂準), 교감 윤기섭(尹琦燮) 등과 졸업생 김석(金石)·강일수(姜一秀)·이근호(李根澔) 등이 중심이 되어 서간도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서 조직한 독립운동단체였다.

 

신흥중학교는 1910년 국권피탈 후 무관학교의 설립을 목적으로 서간도 지역으로 망명한 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이상룡(李相龍) 등 신민회 회원들이 1911년 여름 유하현 삼원포에 설립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의 후신으로 무관학교였다.

 

신흥학우단에서는 군사 학술의 연마로 실력 배양, 간행물로 혁명이념의 선전과 독립사상의 고취, 한인 마을 각지에 노동강습소의 개최로 청년에게 초보적 군사 훈련과 계몽교육의 실시, 그리고 소학교의 설립으로 아동교육의 담당을 주요사업으로 하였다.

 

따라서 이 기관지는 그 같은 독립운동 활동의 일환으로 1913년에 창간되었던 것이다. 그 구성은 광고·논단·학원(學苑)·문림(文林)·소설·잡조(雜俎)·사전(史傳)·잡보 등의 항목으로 되었다.

 

특히 <보병전투연구 步戰鬪硏究>와 같이 군사학에 관한 연구가 게재되었던 점은 주목된다. 그리고 <역사(歷史)를 빗냅세다 대동청년(大東靑年)아>나 <안중근전(安重根傳)>을 비롯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내용의 글들이 여러 번 수록되었다. 아울러 신흥학우단과 관련된 사항들을 게재하였다.

 

대체로 혁명이념의 선전과 민족의식의 고취에 진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기관지가 언제까지 발행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현전하는 제2권 제2호는 1991년에 발행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5집에 영인되어 수록되었다.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 「신흥무관학교」(원병상, 『독립운동사자료집』 10, 1976)
  • 「만주지역의 신흥무관학교」(박훤, 『만만한인민족운동사연구(滿滿韓人民族運動史硏究)』, 一潮閣, 1991)


 

 

 

**  김형직은 1917년 3월 23일 평양 숭실학교 재학생과 졸업생을 중심으로 ‘조선국민회’라는 비밀결사대를 조직, 결성하였다. 김형직은 1918년 2월 18일 조선국민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다른 동지들과 함께 1918년 12월까지 10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김형직 독립운동 사료에 의하면 ‘평안남도 경무부장 보고 요지‘는 ‘김형직이 서당 교사이며, 평안남도 강동군 정읍면 동3리에 거주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 장일환(1886~1918)을 포함해 박세민, 배민수 등 조선국민회 25명의 본적, 주소, 나이, 역할 등이 상세히 나와 있다.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을 보면, 김일성이 다섯 살 때 김일성 일가가 만경대에서 강동군 봉화리로 이사했는데 조선국민회 문제로 일본 경찰이 김형직을 체포하자 봉화리의 기독교인들이 김형직의 석방을 위해 김형직이 교편을 잡고 있던 명신학교에 모여 새벽기도를 드린 일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김형직은 봉화리에서도 신앙생활을 한 것이 분명하다.

그는 옥고를 치르고 나온 다음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였고, 3·1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그러자 일본의 감시와 핍박이 더해지고, 조직원들이 대거 일본에 체포되자 더 이상 국내에 머물 수 없어 식구들을 데리고 압록강을 넘어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일본 조선군 사령부의 1925년 조사 보고에 따르면 ‘그는 3·1운동을 주도하고 일제 관헌의 체포를 피해 1919년 5월 압록강을 건너간 것’으로 나와 있다.

그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의 통화현 임강과 우리나라 중강진을 중심으로 친척에게서 배운 한의학 지식을 바탕으로 한의원을 운영하여 가족들의 생계를 꾸렸고,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자녀로는 김일성(1912년생)을 비롯하여, 김철주(1916년생), 김영주(1920년생) 삼형제를 두었다. 아들 김일성이 어렸을 때 임강에 있는 모아산숙(소학교)에 보내 자녀의 교육에도 힘썼고, 그후 1921년 임강에서 100여 리 떨어진 팔도구로 이사하여 아들을 팔도구소학교에 보냈다가 2년 후인 1923년 3월 16일 12살이던 아들 김일성을 외갓집이 있는 평양 만경대로 보냈다.

 

 

이는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 김형직의 큰 결단에서 비롯되었다. 계속된 피난생활로 아들의 장래를 걱정한 아버지의 마음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조국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과 함께 자녀의 장래를 위해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배민수의 농촌운동과 기독교 사상」본문 中 1. 朝鮮國民會 朝鮮支會(조선국민회 조선지회)  운동과 ... - 55페이지
[종교] 방기중 저 연세대학교출판부 1999.10.30

운동을 김일성 혁명운동의 前史(전사)로 설정하여 김형직의 위치와 운동의 의미를 과장하고 있음은 주지하는... 1990:高理熱,(고리열), r大韓民國臨時政府默美委員 部(대한민국 임시정부 묵미위원  부 )(1919-1925) 硏究(연구)J(고려대 박사 학위논문. 1991). 13-30쪽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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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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