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정치사의 실체)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의 역사적 사료로 살펴본..그는 누구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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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의 父 김형직..
** 평양 만경대라는곳에 김형직의 묘 앞에 있는 김형직, 강반석 부부 동상이 있다고 한다.
* 1932년 7월 모친 강반석 사망
김형직(金亨稷, 1894년 7월 10일 ~ 1926년 6월 25일)
강반석 (康盤石, 1892년 4월 21일 ~ 1932년 7월 31일)
백산무사단 : 김일성의 외삼촌 강진석도 여기 단원이었음.
[ 白山武士團 ] 유형 단체 시대 근대 성격 독립운동단체 설립일시 1921년 5월
** 1921년 5월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이다.
백산무사는 백두산의 무사를 의미한다. 이 단은 임강현 모아산(帽兒山)에 근거를 두고, 1921년 5월에 조직되었다. 각 지방에 조직망을 펴 6,000여 명의 단원을 확보한 만주 내의 가장 대규모의 독립운동단체였다.
간부진은 단장 이두성(李斗星), 총무 김보환(金寶煥), 서기 김성진(金成晉), 내무 이영빈(李永彬), 통신원 김득종(金得宗)이었다. 조직으로 5부를 두어 재무·경호·통신·외무 등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제1부 부장은 알 수 없으나 재무는 김시우(金時禹)였고, 상해임시정부의 명에 의해 평북독판부(平北督辦府)라 칭해졌다.
제2부는 부장 임선화(任善化), 이사원 최정(崔貞), 경호원 김정삼(金貞三), 서기 김준삼(金俊三), 통신원 조성록(趙成祿), 외무원 김석춘(金石春)·강진석(康晉錫)이었고,
제3부는 부장 남기락(南基洛), 이사원 김종주(金宗柱)였으며, 제4·5부는 알 수 없다.
전투부대인 독판부(督辦府)는 독립군을 편성해 만주와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구성원은 대개 평안남도와 평안북도 출신으로 활동범위도 평양·순천 등지였다. 강진석은 평양 등지에서, 유경운(柳璟雲) 등은 순천 등지에서 지단을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금하였으며, 김예진(金禮鎭)·이춘성(李春成)은 주로 상해(上海)에서 활동하였다.
1922년 4월 평양에서 활동 중이던 강진석, 신훤(申?)·신근(申槿) 형제와 그 어머니 이경임(李敬妊), 아내 유사로(兪似老), 이정선(李丁善)과 황용호(黃龍浩)가 조선총독부경찰에 잡혔다. 그 뒤 이두성 등은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참의부(參議府)·의용군(義勇軍)에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참고문헌
第三 移住朝鮮人中 有力者 調査表
(해석) 제삼 이주 조선인 중 유력자 조사표
관련 사료(자료) 당시 재산 1000원의 크기는?
그러나 그는 그후 일제에 체포될까 두려워해 만주 임강(臨江)으로 도망간 후 귀의하고 의원 짓을 하고 있었음.
김형직은 무면허 의원을 차린후 (무면허는 김일성도 인정함) 엄청난 돈을 벌어들임. 그리고 1919년~1925년 6년 사이에 중국 장백현에서 제일 가는 재산가가 됨. 그의 자산은 당시 무려 1천원이 되었다고 함.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김형직 독립운동 사료
왼쪽은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현대사 자료"(강덕상 편저.1967) 조선편 1권, 1918년 2월 18일 일제에 의해 체포된 조선국민회 회원 명단 속에 김형직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
오른쪽은 1918년 9월 12일자 신한민보의 조선국민회 관련자 체포 기사.//북한/ 2005.3.23. (서울=연합뉴스)
번역: 강덕상 편, 『현대사자료』 (제25~30권:조선편), 미스 쇼보서방, 1967~1976.
(서울=연합뉴스) 함*현 기자 = 북한 고(故) 김일성 주석의 부친이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조부인 김형직(金亨稷.1894-1926)이 항일 비밀결사를 통해 독립운동을 펼쳤음을 입증하는 사료가 독립기념관에 소장돼 있는 사실이 확인됐다.
문헌이며 기관지의 형식이며 1913년 07월에 세워졌으며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1913년 7월에 창간된 신흥학우단(新興學友團)의 기관지.
신흥학우단은 1913년 3월신흥중학교의 교장 여준(呂準), 교감 윤기섭(尹琦燮) 등과 졸업생 김석(金石)·강일수(姜一秀)·이근호(李根澔) 등이 중심이 되어 서간도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서 조직한 독립운동단체였다.
신흥중학교는 1910년 국권피탈 후 무관학교의 설립을 목적으로 서간도 지역으로 망명한 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이상룡(李相龍) 등 신민회 회원들이 1911년 여름 유하현 삼원포에 설립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의 후신으로 무관학교였다.
신흥학우단에서는 군사 학술의 연마로 실력 배양, 간행물로 혁명이념의 선전과 독립사상의 고취, 한인 마을 각지에 노동강습소의 개최로 청년에게 초보적 군사 훈련과 계몽교육의 실시, 그리고 소학교의 설립으로 아동교육의 담당을 주요사업으로 하였다.
따라서 이 기관지는 그 같은 독립운동 활동의 일환으로 1913년에 창간되었던 것이다. 그 구성은 광고·논단·학원(學苑)·문림(文林)·소설·잡조(雜俎)·사전(史傳)·잡보 등의 항목으로 되었다.
특히 <보병전투연구 步戰鬪硏究>와 같이 군사학에 관한 연구가 게재되었던 점은 주목된다. 그리고 <역사(歷史)를 빗냅세다 대동청년(大東靑年)아>나 <안중근전(安重根傳)>을 비롯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내용의 글들이 여러 번 수록되었다. 아울러 신흥학우단과 관련된 사항들을 게재하였다.
대체로 혁명이념의 선전과 민족의식의 고취에 진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기관지가 언제까지 발행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현전하는 제2권 제2호는 1991년에 발행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5집에 영인되어 수록되었다.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 김형직은 1917년 3월 23일 평양 숭실학교 재학생과 졸업생을 중심으로 ‘조선국민회’라는 비밀결사대를 조직, 결성하였다. 김형직은 1918년 2월 18일 조선국민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다른 동지들과 함께 1918년 12월까지 10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는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 김형직의 큰 결단에서 비롯되었다. 계속된 피난생활로 아들의 장래를 걱정한 아버지의 마음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조국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과 함께 자녀의 장래를 위해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배민수의 농촌운동과 기독교 사상」본문 中 1. 朝鮮國民會 朝鮮支會(조선국민회 조선지회) 운동과 ... - 55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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