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에 대한 북한과 중국(모택동)과의 외교관계..01편 시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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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편.
※ 한자는 번역한 한글로만 올리고 한자는 뺐다.
● 북한의 한국전 준비와 모택동
Ⅳ. 모택동의 모스코바 방문
Ⅴ. 맺음말 Ⅰ. 글 읽기전에..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에서 비밀문헌들이 공개되고
※(참고)《 이글에서 사용한 구소련문헌은 러시아 연방 대통령 문서 보관서와 러시아 외무성 외교정책 문서 보관서로부터 김영삼 대통령에게 1994년 6월 2일 전달된 1950-1953년 한국전쟁에 관한 기본문헌자료(100건 279 페이지와 보충문헌자료(116건 269페이지중 일부를 이용하였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 자료를 공개할 것으로 발표하였으나 아직 완전히 공개되지는 않았다. 위의 자료는 번역이 다소 미숙하다. 하지만 위에 포함된 대부분의 자료들이 미국에서 젊은 학자들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었기에 영어본과 한글본을 비교하면 자료의 신빙성을 평가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영어와 한글본 모두 신뢰할 수 있는 자료로 생각하고 사용하였다. 영어본의 일부는 한국전에 관한 논문과 함께 아래의 잡지에 출판되어있다.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Issue 5: Spring, 1995, 1-9 쪽, (Issue 6-7: Winter 1995/1996,3-125쪽, (Issue 8-9: Winter 1996/1997, 220-269쪽.『러政府 제공 6.25戰爭관련 基本文獻자료 (번역본 (기간: 1949.1 - 53.8』는 『基本文獻』으로 『러政府제공 6·25戰爭관련 補充文獻 資料(번역본-1949,1-53,9』는 『補充資料』로 표기함. 인용한 자료는 표현이 다소 어색하여도 그대로 인용하였다. (기울인 글자는 나의 첨가임을 밝힌다.》
등소평 집권이후 한국전과 관련한 자료 및 저술들이 ※ (참고) 《 중국의 새로운 자료들은 이병주의 『중공군 개입과 새로운 전쟁』 한국전쟁사 제5권 (전쟁기념사업회, 1992년의 1장 「중공의 한국전개입과 그 영향」의 <주>: 593-601쪽을 참조할 것.》
출판된 이후 한국전쟁의 기원에 관한 새로운 연구가 가능해 졌다. 이러한 공산측 자료의 공개가 몰고 온 가장 큰 결과는 한국전기원에 관한 수정주의자들의 주장, 즉 전쟁의 발발을 남한과 미국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참고) 《 대표적 연구로 Bruce Cumings 의 두 저작,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ume I & II (1981, 1990이 있다.》
근거를 잃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쟁의 기원을 공산측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공산측, 즉, 소련, 중공, 북한측에서 한국전의 기원을 찾고자하는 노력하에 이미 많은 연구들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기존연구들을 정리를 하면; 1) 스탈린-모택동 음모설;
2) 중-소-북한 협력설;
3) 중-북한 음모설로 정리할 수 있다.
※(참고) 《 이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이병주 위의 책 10-17쪽을 참조. 한국전연구사 정리로는 김학준의 「6.25 연구의 국제적 동향」, 김철범 책임편집, 『한국전쟁을 보는 시각』1장, (을유문화사, 1990이 있다.》
이러한 연구들의 공통된 문제점은 3국 또는 2국의 관계를 협조일 변도만 설명하고 있으며, 당시 공산권내부의 복잡한 갈등관계에는 충분한 고려를 하고있지 않다는 점이다. 냉전시대 동안 공산권을 하나의 집단으로만 보아왔던 우리의 편견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 《 박명림은 최근연구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I, 결정과 발발』 (나남, 1996에서 전쟁의 결정은 스탈린-모택동-김일성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3장 133-179쪽 박은 한국전쟁에 관한 세계의 모든 연구성과를 그의 저서 속에 흡수하는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으나, 이 업적이 자신의 주장의 명료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하는 의문을 일으키게도 한다 》
이러한 문제점은 한국전쟁연구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점, 즉 사료의 부족과도 연관이 있다. 중-소의 새로운 자료가 일부 공개되었지만 여전히 충분한 것은 아니다. 등소평 집권이후 중국에서 흘러나온 자료들은 대부분 1950년 10월 이후 중국의 개입과 그 이후 전투에 관한 것들이다. 한국전쟁발발이전과 관련된 자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중국자료가 일부학자에 의해 진위여부가 의문시되기도 하였다.
※ (참고) 《 Alexandere Mansourov는 1950년 10월 2일 모택동이 스탈린에게 보낸 중국의 개입결정통보전문의 (『建國以來毛澤東文稿』 1권 539-51쪽 「關于決定派軍隊入朝作戰給斯大林的電報」진위여부에 의문을 던졌고 Shen Zhihua은 이를 부정하였다. Bulletin, CWIHP, Issues 8-9 (Winter 1996/1997 (237-240쪽. 》
또한 한국전쟁에 관한 자료들은 전쟁책임이라는 도덕적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만큼, 독자를 오도할 가능성이 있는 자료들도 있는 것이다. 여러 자료의 비교와 철저한 사료비판을 통해서 정보의 진위여부를 가리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진위여부가 확인된 사료 일지라도 모든 사료는 사료작성자의 편견이 담겨있을 수 있다.
※(참고) 《 박명림이 의존하고있는 <소련자료>1, 2, 3은 분명한 쪽 번호, 문서의 작성날짜, 문서번호, 또는 문서이름을 밝히지 않아 확인하기 어려웠던 점이 아쉽다. 이 또한 박명림의 업적이 제기하는 문제 중의 하나이다. 박명림의 3장을 뒷받침하는 중요자료 중의 하나는 소련문서의 영어번역본, mb-04339/gs “On the Korean War, 1950-53, and the Armistice Negotiations” 『Bulletin,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Issue 3 (Fall, 1993: 15-17 이다. 이 문서는 한국전쟁 당시의 문서가 아니라 소련의 지도부들에게 과거의 일을 회상시키기 위해 1966년에 만들어진 소련내부 문서이다. 전쟁 발발 15년 이후에 만들어진 문서인 만큼 이 문서의 史料적 가치를 평가하는 작업이 필수적 일 것이다. 여하간 기존의 모든 한국전에 관한 연구를 한곳에 모은 그의 노력은 가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료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단순한 사료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전쟁연구에서 어떠한 질문을 제기하고 어떠한 해답을 얻을 수 있나하는 문제를 결정하는 관건이기도 함이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논문은 한국전쟁연구의 주요문제중의 하나, 즉 중국이 왜 1950년 10월 한국전쟁에 개입하게 되었나하는 문제의 일부를 고구하려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김일성이 1949년 5월 북경을 방문하였을 때부터 1950년 5월 김이 재차 북경을 방문하였던 약 1년간의 짧은 기간을 분석하여 김일성이 왜 북경을 방문하였으며, 어떠한 문제들을 제기하였고, 이러한 김일성의 방문에 모택동은 어떻게 반응하였으며, 모-김의 접촉은 어떠한 환경 속에 이루어 졌나하는 문제들을 규명하고자 한다. 이에 대한 해답은 중국이 북한의 남침준비에 얼마나 기여를 하였으며, 한국전쟁의 발발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고, 결국에는 한국전쟁에 개입하게 되었나 의문에 하나의 설명을 제공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Ⅱ. 김일성의 북경 방문: 1949년 5월
1949년 3월 김일성은 모스코바를 방문하여 스탈린과 한반도에 관하여 여러 가지 문제를 상의하였다. 그 중 최대의 문제는 한반도통일을 위하여 무력을 사용하는 방안이였다. 이 무력통일방안에 관한 논의 중의 일부는 중국과 북한의 관계에 관한 것 이였다. 이 사실은 구소련의 문헌에 의해 확인할 수 있으나,
스탈린이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김일성에게 충고하였는 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문헌자료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김과 스탈린과의 비밀회동에서 김이 중국에 있는 조선인병사들을 북한으로 송환하는 것과, 앞으로 계획중인 한반도무력통일에 어떻게 모택동의 지지를 이끌어 낼까하는 문제에 대하여 스탈린의 충고를 얻고자 노력한 것은 확인된다.
※(참고) 《 『러政府 제공 6.25戰爭간련 基本文獻자료 (번역본 (기간: 1949.1 - 53.8』, (이하 『基本文獻』으로 「1949년 3월 5일 20시에 있었던 북한의 내각대표인 김일성을 선두로 하는 북한의 정부 대표단과 스탈린과의 회담」, 1쪽. 이 문건의 부록으로 「스탈리 동지와 해결해야 할 김일성의 질문」을 포함하고 있다. 이 부록의 3항은 중국-북한관계 1마오쩌둥과의 회담에 대해 2중국과의 협상에 대해 3 중국에 살고있는 한국인(sic들과 북한에 살고있는 중국인에 대하여 라고 쓰여있다.》
모스코바에서 평양으로 돌아온 김일성은 북경방문길에 오른다. 김의 북경 방문에는 북한 노동당중앙위원회위원이며, 북한인민군 정치위원인 김일이 동행하였다. 이들은 4월 28일 평양을 떠나 심양을 경유하여 북경을 방문하였다. 김일성과 김일은 북경에서 주은래와 주덕을 4번 그리고 모택동은 단 한번 만났다.
북경방문을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온 김일성은 평양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에게 자신의 방문에 관하여 알려주었고, 스티코프는 그 내용을 1949년 5월 15일 소련외무상 비신스키에게 비밀전문으로 보고하였다.
※(참고) 《 『基本文獻』18-20쪽, 「1949년 5월 15이자 슈티코프가 비신스끼에게 보낸 전신」 전문은 필리포프 (스탈린의 암호명 에게 보내어 진 것. 『基本文獻』 21-22쪽, 「1949년 5월 18일자 코발레프가 필리포프에게 보낸 전문, 비밀문서 no.54611」》
이 장문의 보고서는 김일성의 북경방문에 관한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한편 모택동도 북경에 주재하고있던 스탈린의 하수인 코바레프에게 김일성일행의 방문사실과 회담내용을 통보하였고, 코바레프는 스탈린에게 이를 전문으로 보고하였다. 즉 1949년 4월에 있었던 김일성의 북경방문에 관하여 두 개의 보고서가 있다.
이 두 전문은 같은 회담에 대하여 회담의 당사자들이 회담의 내용을 각자 제 삼 자에게 전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쌍방이 전하는 회담의 분위기와 내용은 마땅히 동일하여야하나 두 전문은 북한의 남침계획에 대한 모택동의 태도에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스티코프의 전문, 즉 김일성이 전달한 모택동과의 회담내용은 아래와 같다.
마오저뚱이 대답하기를 조선민족해방군(HOA)에 소속되어 있는 3개의 북한군 사단중 2개 사단은 심양과 장춘에 배치되어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또한 나머지
이상.. 02편에서 계속~~ 143pagㄲ?ㅈ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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