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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때 만주에서 독립투쟁.. 03편. 시리즈 총 06편작
Korea, Republic of 돌통 0 278 2021-02-04 17:52:54
03편



그러나 김일성은 감옥에  그리 오래 있지 않았는데 오늘날 김일성의 공식 전기에서는 그가 1930년 5월에 석방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국민부 내 청년들의 좌경화 현상은 김일성이 길림감옥에서 있었을  당시에도 여전했다. 그래서 국민부 내의 좌파청년들은 공산주의적 성향의 동맹들을 결성했는데 그 중 하나는 '이종락'이 주도적으로 설립한 ‘타도제국주의동맹’으로 약칭인 ‘ㅌ·ㄷ’로 더 잘 알려진 단체이다. 



그런데 타도제국주의동맹의 결성과 관련하여 북한 학계와 북한 외 일반적 학계의 입장이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먼저 김일성은 본인의 회고록에 1926년에 자신이 타도제국주의동맹을 주도하여 결성했다고 기술한바 있다. 북한 학계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타도제국주의동맹은 김일성 회고록의 내용과는 다르게 1929말부터 1930년 초 사이에 결성된 조직인데 18,19살의 소년이, 그것도 당시 감옥에 있던 김일성이 조직했다고 하는 주장은 믿을 수 없다. 


이에 대해 신주백은 타도제국주의 동맹이 국민부 멤버였던 이종락의 주도로 만들어진 것이라 주장 하였고 와다 하루키도 김일성이 타도제국주의동맹을 조직했다는 것은 김일성의 초기 활동을 신화화한 예라 주장하였다. 결국 이러한 여러 학계의 주장들을 조합하자면 김일성은 타도제국주의동맹 결성에 주도적인 인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타도제국주의동맹의 일원으로 참여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낼 수 있다.


1930년대로 넘어가서 김일성의 활동을 보면 먼저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에서의 활동이 있다.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은 "조선혁명당"이 "남만한인청년총동맹", "남만농민동맹", '남만여자교육회'를 합동시킨 단체였다. 이 때 김일성은 지방지부동맹 조직위원 6인 중 무송과 안도지방 담당으로 올라가 있었다. 이는 19살의 김일성이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의 집행위원으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김일성은 국민부의 뜻에만 따르지 않았다.


일제의 기록에 의하면 같은 해 김일성은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에 들어가게 된다. 이는 김일성이 당시 국민부 내 청년 좌경화 현상 분위기에 따라 국민부 지도부와 대립적인 좌파 청년들과 궤도를 같이 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는 1930년 9월에 국민부 보수파에 대해 이종락, 안붕 등 국민부 내의 내 국민부파가 국민부 해체를 주장하면서 조직된 군이다. 김일성은 이곳에서 활동했었다. 이후 같은 해 11월 25일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는 '조선혁명군 사령부'로 이름을 고쳤다. 


그러나 조선혁명군사령부는 1931년 1월에 지도부급 인사들이었던 이종락과 김광렬, 장소봉이 장춘에서 경찰에 체포되면서 괴멸되었다. 그래서 김일성은 홀어머니 강반석이 있던 길림성 안도현으로 거취를 옮기게 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김일성은 민족주의 독립운동가인 아버지 김형직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당시 조선인들의 독립운동기지가 많았던 만주로 유학을 가 그 곳에 있는 육문중학에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김일성은 육문중학에 다닐 때 공산주의 사상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만주의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이 대립하게 되면서 민족주의 성향 단체에서도 청년들의 좌경화 현상이 일어났다. 김일성은 당시 아버지의 영향으로 인해 민족주의 단체인 국민부 소속 멤버였지만 점차 청년 좌경화 현상에 경도되어 공산주의를 수용하였고, 조선공산청년회 및 타도제국주의동맹과 같은 공산주의 성향 단체에 가입하고 활동하였다.

  


Ⅲ. 만주유격대와 동북인민혁명군 활동


 

  金日成(김일성)은 이제 국민부 소속 멤버에서 탈피해 완전한 공산주의자로 변모하였다. 그래서 김일성은 당시 만주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대거로 중국공산당에 입당하는 추세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게 되었다. 김일성이 입당하였을 때 중국공산당은 1931년 9월에 만주사변이 시작된 이래로 현 상황을 일제의 침략이 시작되었다고 간주하고, 항일투쟁에 소극적인 중국국민당을 반대하며 항일무장투쟁을 대중적으로 전개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김일성은 자연스럽게 공산주의 항일무장투쟁에 뛰어들게 되었다.


한편 1931년 12월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동만특별위원회는 연길현 옹 립자 (명월구)에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는 옹성라자 회의 또는 명월구 회의라고 불리는데 여기서 동만주에 항일유격대와 항일유격대의 근거지를 만들 것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동만주에서 조선인 유격대들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명월구 회의에 김일성이 참여했는지 참여하지 않았는지 그 기록이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김일성이 훗날 회고록에서 자신이 명월구 회의에 참가했다고 명시했다. 만일 김일성의 주장대로 그가 명월구 회의에 참여했다고 하면 그는 당시 직책이었던 중국공산당 '안도현 조직위원' 자격으로 참여했을 것이다.


어쨌든 명월구 회의의 결과로 1932년 2,3월쯤에 안도현에서 반일유격대가 조직되었다. 김일성은 이 반일유격대에 들어갔는데 이 유격대를 ‘안도유격대’라 했다. 김일성의 최초 항일무장투쟁 부대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안도유격대에 대한 기록으로는 중국공산당의 기록이 있다. 중국공산당 기록에서는 안도유격대에 대하여 “안도현의 ‘별동대’가 1932년 봄에 金日榮(김일영)을 대장으로 조직되었다.”고 했다. 


김일성이 안도유격대에 있었을 당시 했던 활동을 살펴보자면 그가 남만주 지방으로 남만원정을 떠난 것이 있다. 남만원정 당시 김일성은 민족주의 성향을 띈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을 찾아갔는데, 그에게 자신의 부대와 연합을 제의하고 무기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양세봉은 이념적 이유로 김일성의 제의를 거절했고 무기 지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거절 사유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의 이념 차이뿐만 아닌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양세봉의 입장에서는 당시 20대 초반에 새파랗게 어린 김일성이 몇 안 되는 부대원들을 데리고 연합을 제의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김일성은 양세봉의 거절로 인해 별 다른 소득 없이 다시 안도현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김일성이 안도현으로 돌아왔을 당시 일제는 이곳에서 유격대를 토벌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김일성은 그가 인솔하는 부대를 이끌고 안도유격대보다 더 규모가 큰 유격부대인 길림성 왕청현의 왕청유격대에 합류하게 되었다. 왕청유격대는 대부분이 조선인들로 구성된 약 100명가량의 병력을 지닌 유격대였다. 이들은 소왕청에 근거지를 두었는데 보통은 일제의 토벌을 피해 산속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었다. 김일성은 이러한 왕청유격대에서 정치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상...     0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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