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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에 대한 북한과 중국(모택동)과의 외교관계..05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78 2021-02-12 22:07:31
05편.

 

 

이에 중공은 평양에 있는 중국 무역대표부를 통하여 김일성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중국의 내전이 성공적으로 종결되었다는 것을 알리며 인민해방군

의 조선병사들을 북한의 인민군에게 돌려보낼 준비가 되었음을 알려왔다. 그러나 그 편지는 소련의 중재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송환될 병사의 구체적인 숫자에 대하여도 언급하고 있지 않았다.※(참조) 《  「1950년 1월 11일자 스티코프가 소련외무성에 보낸 전신: 1월 9일에 있었던 김일성과의 회담에 대한 정보」,『基本文獻』, 59쪽. 》

 

모스코바의 지시에 따라 스티코프는 1월 11일 김일성을 만나 이 문제를 상의하였다. 김과 스티코프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3명의 대표단을 북경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대표단의 대표, 김광협은 북경에서 *영진을 만났다. *영진의 회억록에 따르면:

 

“1950년 1월 김일성 동지는 김광협을 파견하여 1만 4천명의 조선인 병사 송환을 요구하였다.……김광협의 도착이후 당중앙은 이 문제를 나에게 위임하였다. 협상후 우리는 이 모든 조선병사를 북한 인민군에 송환하도록 합의하였다. 김광협 동지는 말하기를, ”우리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장비 외에 우리는 잉여 장비가 없다. 이 1만 4천명의 병사들이 조선인민군의 부대로 재편된 후 우리는 소련과 이들을 위한 무기를 사기 위해 소련과 협상을 개시하여야 한다. 

 

그 과정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중국 동지들은 장비를 제공해 줄 수 있는가?” 나는 “조선동지의 필요를 이해한다. 당중앙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후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하겠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1950년 1월 21일 나는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하루 후 당 중앙은 즉각적으로 내 의견에 동의하였다.……1만 4천명의 조선병사들이 귀국한 후 조선동지들은 매우 기뻐했다.※(참조) 《責任編輯, 陳漢民, ?榮臻回檍錄, (下, (북경: 解放軍出版社, 1884年 744쪽.  또한 鄧禮峰,  新中國軍事活動記實, 1949-1959, (북경: 中共黨史資料出版社, 1989,  60쪽 》 

 

이 송환협상이 완성되기도 전에 평양에서 김일성은 이 송환될 병사들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를 결정하고 있었다. 1개 보병사단, 2개 보병연대, 1개 자동차화 연대, 1개 기계화부대로 재편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부대의 송환을 비밀로 하기 위하여 김일성은 이 부대의 송환을 1950년 4월까지 연기하도록 중국측에 요청하였다. ※(참조) 《 앞의 「1950년 1월 11자 스티코프가 소련외무성에 보낸 전신」, 60쪽. 》

 

이들이 북한으로 송환되었을 때 주로 인민군의 7사단과 10사단의 주력이 되었고 일부는 1사단과 4사단에 배속되었다. ※(참조) 《 Whitson, 前揭書, 323쪽. 》

 

이 부대들의 송환은 한국전 발발 2주전까지 계속되었다. ※(참조) 《 이 송환을 위하여 중국은 인민해방군 철도사단의 배치된 모든 조선인 부대들을 규합하였다. 이들은 石家庄에서 독립부대로 재편되었다. 이 부대는 1950년 6월 20일 북한으로 보내졌다. 鄧禮峰, 前揭書 108쪽.》

 

1949년과 50년에 걸쳐 송환된 조선병사들의 정확한 수는 추정하기 어렵다. 한 중국측 자료는 1만 4천명으로 잡고 있으나※(참조) 《  중국측 사료는 1949년에 있었던 송환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

 

소련측 자료는 3만 4천명을 확인해 주고 있다.※(참조) 《 이숫자는 인민해방군에서 송환된 장교와 한국전 발발 직전에 송환된 철도부대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

 

William Whitson은 최소한 4만으로 추증하기도 했다.※(참조) 《  Whitson, 前揭書, 323쪽. 》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이 송환병들이 인민군에 미친 영향은 큰 것이었다. 한국전 개전 직전 인민군의 숫자는 10만이었다. 남침당시 김일성이 북한이 1개월내에 전 남한을 점령하고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한 것은 이러한 북한군대의 증강에 기초한 것이였다.

 

  ●   Ⅳ. 모택동의 모스코바 방문과 김일성의 북경방문

 

 

1949년 12월 21일 모스코바는 축제분위기였다. 도시의 공공건물들은 빨간 깃발로 장식하고 스탈린의 초상화를 내걸었다. 스탈린의 70회 생일이었다. 모스코바는 스탈린의 고희를 기리기 위해 ‘스탈린평화상’을 설립하기도 하였다.※(참조) 《 수상자는 ‘전쟁광과 투쟁한 사람이나 평화를 공고히 한자‘로 10만 루블 상당의 부상을 받는다고 선언하였다.  New York Times, 1949년 12월 21일 1과 7면.》


그날 저녁의 스탈린 생일축하 연회에서 모택동은 13개 공산국가 축하사절단 중 가장 먼저 연단에 올라 스탈린고희 축하연설을 하는 영광을 안았다. “스탈린은 중국인민의 영도자이며 친구”라 선언하고 모택동(마오쩌둥)은 스탈린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며 “스탈린만세“를 불렀다. ※(참조) 《  建國以來毛澤東文稿』, 1949年 9月 -1950年 12月,「在莫斯科慶祝斯大林七十壽辰大會上的祝詞」, 195-6쪽, 中央文獻出版社. 초청을 받은 毛는 매우 기뻐하며  스탈린의 생일선물을 고르는데 많은 고심을 한 끝에 배추 등 山東産 채소 다섯 가지로 결정하였다. 위의 『文稿』, 1949년 12월 1일 자「中央關于爲斯大林送壽禮給山東分局的電報」, 172쪽. 》

 

모택동의 이번 모스코바 방문은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였다. 1948년 4월 모택동은 하북에서 소련국경까지 지프를 타고 소련을 방문할려고 계획하였으나 스탈린은 중국이 내전중이라는 이유로 모택동의 소련방문을 거절한 적이 있었다.※(참조) 《  人物』, 師哲, 「陪同毛主席訪蘇」 (?月刊 1988年 第 5期 (총 51期, 9月,  6쪽 》

 

이번 방문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이후 만주에 남아있는 구러시아의 이권을 철회시키기 위하여 스탈린과 협상하는 것이었다. 또한 아직 점령하지 못한 타이완을 공격하기 위해 필요한 중국의 해군과 공군건설에 필요한 소련의 원조를 얻어내는 것도 주요한 방문목적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본 연구의 대상 밖이며 우리의 관심은 모스코바 방문동안 모택동과 스탈린이 다가올 한국전쟁에 관하여 얼마나 논의하였나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보여주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그러나 생일연에 북한의 축하단을 인도한 김두봉의 언행은 한반도의 통일문제가 생일연에 참가한 공산국가 대표간에 널리 이야기되었는가를 보여준다.  김두봉이 모스코바에서 돌아온 직후인 1950년 1월 17일,  평양에서는 새로운 대사로 임명되어 북경으로 떠나는 이주연을 위한 환송연이 있었다. 

 

이 자리에 참가한 김두봉은 모스코바를 방문한 소감을 이야기하며 모스코바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이 한반도의 조속한 통일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전했다. 이 자리에 참가한 평양주재 중국동북행정지구 대표는 “중국은 방금 중국의 해방을 완성했다. 남한 인민의 해방이 다음 과업”이라고 말하였다. ※ (참조) 《  앞의 『基本文獻』, 「1950년 1월 19일 자 스티코프가 비신스키에게 보낸 전문」, 61-3쪽.》

 

이러한 김두봉과 중국대표의 언행은 1950년 1월 당시 이미 공산권 지도자들 사이에는  북한의 남침계획이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앞에서 이야기한 중국의 인민해방군의 세 번째 조선사단 송환문제가 모스코바에 방문하고 있던 모택동의 지시에 의해 최종 결정되었다는 것을 언급한 바 있다. 이 모든 것이 모택동 역시 북한이 남침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모택동이 남침계획에 관하여 어느 정도 상세히 알고 있었는지, 또 그가 어느 정도 최종남침결정에 참여하였는지는 의문이다. 이 문제는 1950년 5월 김일성이 북경을 다시 방문하였을 때 김일성과 모택동간에 오고간 대화와 모택동의 반응이 이 문제에 대하여 해답을 제시해 준다.

 

1950년 3월 말 북한대사 이주연은 모택동을 만나 김일성과 모택동간의 회담 을 주선하였다. ※(참조) 《  이회담이 김일성의 지시에 의하여 시작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 이 회담주선에 대하여 김일성은 이주연을 평양으로 소환하여 이의 독자적 행동을 질책하였다. 『基本文獻』, 「1950년 5월 12자 스티코프가 비신스키에게 보낸 전문」, 70-1쪽. 》

 

모택동 이대사의 제안에 즉각적으로 대답하며, 회담이 4월말 또는 5월초에 이루어지길 희망했다. 이러한 김일성-모택동 회담계획을 전해들은 평양주재 소련대사관의 무관 이그나찌예프 대령은 아래와 같은 전문을 소련 외무상 비신스키에게 전송하였다.

 

모택동은 예정된 만남을 한국의 통일문제와 연관시키고 만약 한국통일의 구체적인 계획이 있다면 만남은 비공개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고,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면 김일성과의 만남은 공식적인 절차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다고 지시하였다.

 

이주연은, 현재 김일성이 병치료 중에 있음을 이유로, 모택동과의 회담 시기와 절차에 관한 문제에 구체적인 답을 하지 않았다. 이에 모택동은 이주연과의 회담에서, ‘만약 제3차세계대전이 발발하면, 한국은 이 전쟁 참여에서 제외될 수 없다. 그러므로 조선인민공화국은 자신의 군사력을 준비해야한다‘고 말하였다. ※(참조) 《 『基本文獻』,「1950년 4월 11자 이그나찌예프대령 (평양소련대사관의 무관이 비신스키에게 보낸전문: 북한내각 부대표 김책과 자신의 회담에 대한 정보」, 68-9쪽. 》

 

5월 12일, 즉 이주연이 모택동을 만난지 한달 이상이 지난 뒤, 김일성이 북경으로 모택동을 만나기 위해 떠나기 하루 전에 스티코프는 모택동과 김일성간의 회담에 대한 보고서를 비신스키에게 보냈다.

 

김일성의 의뢰에 의해 5월 12일 김일성, 박헌영과 만남을 가졌다. 회담에서 김일성은 모스코바로부터 돌아온 후 이주연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바, 편지에 이주연은 모택동과 초우엔라이와 만남을 가졌다고 통지하였다. 회담에서 김일성과 모택동의 만남 필요성에 관해 토론하였다. 초우엔라이는 공식적인 만남을 갖자고 제안하였다. 모택동은 언제 한국의, 통일을 시작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이주연에게 던지며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만일 가까운 시일 내에 남한을 상대로 전쟁활동을 시작하길 원한다면, 공식적으로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통지하였다.

 

그리고 모택동은 한국의 통일을 평화로운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며, 한국의 통일은 전쟁을 통한 길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미국에 대해서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작은 영토를 위해 미국은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 (참조) 《 基本文獻』, 「1950년 5월 12자 스티코프가 비신스키에게 보낸 전신: 5월 12일 》

 

 

     이상..       06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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