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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특무들...
UNITED STATES 파란하늘 4 417 2006-08-21 07:08:48
두리하나에 양해를 구하고 이글을 탈북자님들께 권합니다....
중국에 게신분들 아무쪼록 유의하십시요....


한 脫北 청년과의 만남과 이별

나는 이번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러 중국 연변지방으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지난번에 만났던 한 脫北者(탈북자)를 뜻하지 않게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 脫北 청년과 얽힌 사연은 이러하다.

작년, 이 교회에서 전도를 하고 있던 내게 한 청년이 살려달라고 찾아 왔다. 그는 脫北者였다. 그 청년은 이곳 교회에서 거의 1년 넘게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올해 4월 初 주변 파출소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그 청년이 거처하는 집에 서 그를 체포해 갔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교인들은 모두 그가 북한으로 잡혀가면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교인들이 공안당국과 여러 가지 교섭도 해보고 그를 구출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런 그가 북한에서 다시 脫出해 나와 우리 교회를 찾아오게 된 것이다. 두 달여만인 그의 모습은 전 같지 않게 많이 야위어 있었다.


침대 모서리에 편지만 남기고…

어느 날 새벽 2시, 별안간 전화 벨 소리가 요란히 울렸다. 脫北 청년을 은신시킨 집의 아주머니 목소리였다.

자기 집에 은거한 脫北 청년이 3층 창문을 열고 베란다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는 것이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불안한 예감이 들어 일어난 아줌마는 청년이 하는 행동을 보고 놀랐다. 베란다 밑을 내려다보니 청년이 어디론가 황황히 가더라는 것이다.

이 시기 연변 형세로 말하면 脫北者들을 사방에서 체포해 송환하며 또 脫北者들을 도와준 중국 조선족들에게도 벌금을 비롯한 각종 제재를 안기는 때였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예감한 나는 즉시 자리를 차고 일어나 택시에 올랐다. 도착하자마자 방으로 들어가 보니 아주머니가 말한 대로 청년은 자기 갈아입을 옷을 챙겨 가지고 완전히 떠난 흔적이었다. 아주머니는 이 청년이 자기 집에 거처하고 있는 동안 저녁 7시면 꼭 어디를 다녀오더라고 말했다.

분명 미심쩍은 일이 청년에게 있다는 의심이 들었다. 흔적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나는 침대 모서리에서 편지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적혀 있었다.



그의 편지를 읽고 나니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그 집 아주머니와 아이를 황급히 다른 곳으로 피신시키는 한편, 다른 脫北者들의 위치도 변경해버렸다. 정말 그날 하루는 무슨 정신에 돌아쳤는지 경황이 없었다. 그날 자정, 난데없이 그 청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선생님 저를 좀 만나 주십시오. 마지막으로 선생님을 뵈옵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이 사실을 동행한 분들과 의논해 본 후 만나 보기로 하였다. 우리가 사전 준비를 하고 약속된 장소에 가 보니 다른 이상한 기미는 없었다. 그 청년도 주변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나를 조심스레 만났다.

눈물지으며 참회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긴 시간에 걸쳐 우리에게 그동안 일들을 이야기했다. 다음은 그 청년의 증언이다.

올해 4월부터 대대적 송환

《배고픔에 견디다 못해 27세의 몸으로 장가도 들지 못한 채 형님과 脫北한 나는 중국 땅에 와서 난생 처음 사람다운 대접과 음식을 마음껏 즐기게 되었다.

특히 교회에서 하나님을 영접하게 되며 많은 도움과 복을 누리게 되었다.나도 뭔가 일을 해 보려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려 형님과 함께 많은 脫北者들과 중국 조선족들을 찾아다녔다. 그동안 중국의 脫北者들은 그다지 심하게 신변의 위협을 느끼지 못했다. 중국 조선족들이 사는 곳 어디나 脫北者들은 이들에게 의지해 살았다.

이러한 실정을 중국 공안당국은 훤히 알고 있으면서도 몇 년 간 눈감아 주었다. 脫北者들의 대다수가 땅이 묵어나가는 중국의 농촌에서 일을 하며 값싼 인력으로 농사에 보탬을 주기 때문이다. 중국측도 이런 면에서 일거양득이라 생각하는지 주민들에게 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건드리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하여 항시 불안감 속에 사는 脫北者들은 이리저리 옮겨 다니던 것을 중단하고 많은 경우 한 자리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조선족들이 많이 도와 주어 간소한 살림살이도 꾸리고 살게 되었다. 그늘졌던 脫北者들의 얼굴이 다소나마 펴지는 듯했다.

그런데 올해 4월에 들어와 불행이 닥쳤다. 중국측이 북한측과 무슨 계약을 했는지 脫北者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여 송환해버린 것이다. 두만강•압록강 지역의 세관에는 4월 중순부터 매일 脫北者들을 실어 북한측에 넘기는 중국 트럭들이 줄지어 섰다. 연길 市에서 이러한 실정을 전해 듣고 나와 형님, 그리고 교회분들은 며칠 내로 우리 자리를 옮기기로 하고 있었다.

우리가 연길 市에서 세들어 살고 있는 집에서 한참 곤하게 잠을 자고 있는데 새벽 6시경에 별안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 보니 집 문 앞에 공안들이 있었다.

밧줄에 묶여 北으로

문을 잡아채며 들어 온 공안들은 다짜고짜로 나와 형에게 족쇄를 채웠다.

끌려간 곳은 市 공안국 청사였는데 이미 잡혀온 사람들이 거의 100명은 되는 듯싶었다. 그 가운데는 가족들도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아이들의 겁먹은 표정은 보기에도 민망스러웠다. 그곳 脫北者들이 수군거리기를 오늘 새벽에 연변지방에는 일대 검거 선풍이 불었다는 것이다. 감방 안에 들어가 있으니 뒤이어 脫北者들이 잡혀오는 모습이 보였다. 불과 한두 시간도 안 되어 근 200여 명이 잡혀 온 것 같았다.

이어 잡혀 온 脫北者들을 몇 명씩 불러낸 공안들은 조선말로 우리에게 중국 땅에서 어떠한 잘못을 저질렀으며 도적질은 하지 않았는가? 체류 기간이 얼마인가? 북한 어디에서 살다가 왔는가?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종이에 적으라고 했다. 모두 쓰지 않으려고 멍히 선 채로 버텼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의 뺨을 때리며 쓰지 않는 사람들은 당장 북肌?넘겨 버리겠다는 것이다. 그 말에 사람들은 모두 너도나도 서둘러 쓰기 시작했다.

이 작업을 마친 공안국에서는 가타부타 아무 말도 없이 감방 안에서 식사까지 시켜주었다. 그런데 형이 이틈에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공안과 같이 나간 뒤 화장실 창문으로 도망을 쳤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천만 다행이었다. 공안국에서도 이 사건을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이날 오후 2시경이었다. 몇십 명씩 왁 몰려든 공안들은 족쇄를 채운 채로 우리들을 몰고 청사 앞으로 나갔다. 그들이 이끄는 대로 끌려간 우리는 대기시켜 놓은 열 대 가량의 트럭에 스무 명 정도씩 나뉘어 탔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보나마나 우리를 북한에 송환해 버릴 낌새라는 것이었다. 순간 사방에서 통곡소리가 울렸다. 가지 않겠다고 소리 지르고, 우릴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청사 마당은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그러나 우리의 요구와 청원은 그들에게 애당초 통할 리가 없었다.

발버둥치는 사람들을 억지로 차에 짐짝처럼 올려 싣고 떠난 트럭은 북한 무산세관 다리를 건넜다. 눈앞이 아찔해졌다. 脫北者들은 모두 공포에 질려 울상이 되었다. 다리 위에서 우리는 마중 나온 무산郡 보위부 요원들에게 넘겨졌다. 그제야 족쇄을 풀어 주며 철수하는 중국 군인들의 모습은 원망스럽기 짝이없었다.

북한측에서는 우리의 손목을 다시 밧줄로 묶어 끌고 가기 시작했다. 걸어서 郡 보위부로 끌려 가는 우리 행렬은 흡사 긴 소 방목 떼 같았다. 우리가 끌려 간 곳은 무산郡 보위부가 특별히 정해 놓은 어느 빈 건물의 창고였다. 남녀를 구분하여 그 안에 우리를 몰아넣으니 남자가 120명 가량 되었고 여자가 80명 가량 되는 듯싶었다. 가족들도 남녀를 구분하여 따로 따로 갈라 놓았다.

우리는 이곳 보위부에서 脫北者 체포 진상 사건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북한측에서는 새해에 접어들어 농사철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데 국경지역인 함경남북도, 자강도, 평북도 등에서 脫北者들 때문에 노동력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이 보고를 받은 당국에서는 脫北者들을 국내로 옮겨오기 위해 중국측에 요청, 대대적인 작전을 펼친 것이라고 한다.

보름 조사 후 보위부 농장으로 끌려가다

하루 밤을 지내니 보위부에서는 중국에서 넘겨 받은 서류에 따라 우리를 한 명 한 명씩 불러내어 신문하기 시작했다.

중국 공안국에서 나의 서류에 기독교라는 글을 써 넣은 것이 큰 말썽거리가 되었다. 보위부측은 바싹 긴장을 하고 나에게 한국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가 따져 물었다. 북한 체제의 특성을 잘 아는 나는 한국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고 잡아뗐다. 두세 시간 정도 그들은 가죽 혁띠 매질과 몽둥이 찜질이 가해졌다. 하지만 한국 사람을 만났다는 말만 터지면 나는 끝장이라는 생각에 끝까지 버텼다. 끝내 나에게서 한국 사람을 만났다는 대답을 받아내지 못한 보위부 사람들은 그럼 교회에서 어떤 어떤 임무를 받았는가고 다시 다그쳐 물었다. 나는 임무를 받은 적은 없다고 말하며 들어가 도움받은 것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들은 교회가 남한 國情院에서 돈을 대 주어 운영하는 것이 아닌가 물었다. 나는 그런 건 전혀 모른다고 대답했고 또 그렇지도 않다고 대답했다. 보위부에서는 며칠 동안 연속 신문만 하면서 우리를 괴롭혔다.

감방 안에서는 脫北者들이 약간만 불응해도 감방 전체 사람에게 「펌프질」이라는 벌을 주었다. 이 벌은 무릎 굽혔다 펴기를 1500개씩 하여야 하는 벌인데 견디다 못해 거의가 쓰러졌다. 그러면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다면서 연속 사람들을 불러내다가 매질과 몽둥이 찜질을 해 곤죽을 만들곤 했다.

감방 안은 돼지우리 같았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갇혀 있어 감방이라기보다 악취가 풍기는 화장실이라 해야 할 것이다.

보름 넘게 신문만 당하며 하루 두 번씩 삶아 주는 통강냉이알 몇 숟가락에 사람들은 모두 영양실조에 걸렸다. 중국에서 잘 먹다가 급작스레 먹지 못하고 매질만 당하는 사람들은 뼈만 앙상해져 서로 쳐다보는 눈빛이 말똥말똥 서리맞은 강아지 격이었다.

우리가 잡혀올 때 보니 중국과 북한 양측에 공약이 이루어져 이 검거선풍이 일어난 것만은 거의 확실했다. 흑룡강에서 잡혀 온 한 脫北者 가정은 그전까지 아무 예고도 없이 주변 공안들과 술도 마시고 물고기잡이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마을 동네를 책임지고 있는 촌장의 도움을 받아 공안국에 등록도 했다고 한다. 공안국에서는 이들에게 말하기를 절대로 잡아가지 않으니 마음 놓고 살라고 이따금씩 와서 격려도 해 주었다 한다. 그러나 그 다음날 새벽에 들이닥친 공안국에서는 위의 지시라며 이미 등록된 사람들을 다 체포하지 않으면 자기네가 벌을 받기 때문이라고 양해를 구하더라는 것이다.

마을 촌장이나 사람들이 나서서 애원했지만 소용없었다. 또, 요녕성 쪽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잡혔는데 그쪽도 사정은 마찬가지라고 한다. 결국 공안당국에서는 이미 파악하고 있던 脫北者들을 거의 다 잡아들인 셈이다.

떠돌아다니던 脫北者들만이 잡히지 않았는데, 脫北者들의 거의 대다수가 이 경우이다. 꼬리를 밟히지 말았어야 했는데 멍청하니 정착해 있다가 밟혔으니 원통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보름 후부터 우리는 이곳 보위부에서 운영하는 농장에 끌려갔다. 여기서 우리는 생 땅을 삽으로 일구어 이랑을 만들고 감자나 강냉이를 심고 호미로 김을 매서 열매를 거두어야 하는 중노동을 해야 했다.

4시간 안에 60명이 밭 한 정보를 일구어야 했다. 이 몫을 다 하자면 한 사람이 줄곧 4시간 동안 몇 천 번의 삽질을 해야 했다. 그러나 먹지도 못하고 일을 하자니 모두 너무 힘들어했다. 잠깐이라도 숨을 돌리려고 하면 『죄인 주제에』 하는 말이 먼저 나오고 다짜고짜로 주먹이 들어온다. 보위부에서는 보위원들이 직접 나서서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호 실장이나 경비장 같은 죄수들 중에서 악착 같은 자들을 선발하여 임명해 놓고 서로 통제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자들은 실적을 올리면 자기네의 죄가 감면된다는 것 때문에 얼마나 악착같이 구는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보는 사람마다 몽둥이질과 주먹질을 하였다. 머슴이 지주가 되면 더 악독하게 군다는 식이다.
보위부의 제안

일이 너무 힘들어 손이 다 터지고 발바닥이 째졌다. 힘들고 배고플 때는 정말 죽고 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열댓 번씩 들었다. 한번은 너무 힘들고 배고프고 기운이 없어 자살하고픈 마음으로 박새풀이라는 독풀을 먹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풀독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도리어 몸이 부었던 것과 설사하던 것도 다 멎었다. 정말 별 경험을 다 해 보았다. 자살을 기도했다가 다시 살고 보니 더 자살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그 후부터 마음을 다잡고 힘들 때에는 중국에 가서 배운 교회의 주례를 따라 주님에게 용서를 빌어 보았다. 또 어쩌다 쉬운 일이 차려지면 하나님께서 쉬운 일을 시키신다고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강제노동 수용소의 생활을 이겨 나갔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 달 간의 강제노동을 겪은 뒤에 또 1년 간 노동 수용소 생활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1년 간의 강제노동 수용소 생활은 함경북도 청진?라남 구역 농포동 수용소에서 한다. 그곳에 가서 죽음보다 더한 수용소 생활을 1년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해 왔다.

그런데 어느 날 보위부에서 나를 따로 불러놓고 무슨 서약서 같은 것을 읽어 보라고 했다. 읽어 보니 중국에 들어가 黨이 맡겨 준 脫北者 체포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여 黨의 믿음에 보답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황당했다. 내가 밀정질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못한다고 도리머리를 젓자 이들은 눈에 독을 품고 위협하였다.

부정하면 나의 죄가 더 가중되어 살아나기가 힘들 것이라는 노골적인 위협까지 들이댔다. 겁이 났다. 한편, 혹시 기회를 봐서 도망칠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잔머리를 굴려 보니 먼저 서약을 하고 나중 일은 후에 보자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래서 계약서에 指章을 찍게 되었다.


한국인과 접촉하면 重처벌

우리와 같이 있던 한 동료는 중국 땅의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일을 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그는 밤에 다른 데로 끌려갔다. 한국인들과 접촉하여 그 과정에서 무엇을 배웠으며 어떤 인식을 받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한다.

그 친구는 보위부에서 자기는 한국인들이 시키는 일만 했을 뿐 아무런 정치적 영향이나 북한에 대한 나쁜 인식을 받은 일이 없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성과를 얻어 상부에 보고하는 데 급한 보위부에서는 그 친구에게서 억지로라도 무엇을 꾸며내려 무던히도 애썼다. 보위부에서는 그 친구가 북한의 군수공장 실태와 배치정형 지역 주둔 군부대의 위치를 한국인들에게 넘겨 주었다고 조서를 꾸며댔다.

그 친구가 그 조서에 서명을 못하겠다고 딱 자르자 보위부 고문실에 건장한 남정 몇이 달려들어 그에게서 강제로 指章을 받아냈다. 이 소식을 들은 감방 안의 脫北者들은 너도나도 이런 일을 당할까봐 무서워서 벌벌 떨었다.그 친구에 대한 처벌은 죽어서도 못 나온다는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는 것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다른 한 가족은 중국 땅에서 한국의 후원을 받는다는 중국 조선족 교회에 다닌 사실을 신문 끝에 고백하게 되었다. 이 고백을 받아낸 보위부에서는 좋다고 누명을 씌우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오는 목사에게서 북한의 現 실태를 아주 나쁜 것만 골라서 카메라로 찍어 오라는 과업을 받았다고 자백하라는 것이다. 또한 북한에서 종교를 비밀리에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는 증거를 만들어 오라는 과업도 받았다고 서약서에 서명하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북한에서 많은 주민들이 모여 강연회 같은 것을 하는 장면을 뒤에서 몰래 찍어 그것을 기도 올리는 모습으로 위장하라는 지시까지 받아 실천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하였다고 자백하라 하였다.

자기네가 시키는 대로 하면 무사히 집에 보내 주겠다고 얼렀다. 하지만 그들이 딱 잘라 거절하자 온 가족 모두를 영원히 나오지 못할 관리소에 따로따로 갈라놓아 버리겠다고 위협하는 바람에 그들도 어쩔 수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거기에 서명하고는 그 죄를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어디론가 끌려가 버렸다.

식량공급 완전 중단

감방 안에서 한 달 반 가량 부대끼며 있던 나에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난데없이 내무원 두 명이 감방 문을 지키는 보위원과 함께 나타나 나의 소지품을 가지고 나오라는 것이다. 그 말은 곧 감방 안에서 退所를 한다는 의미이다. 나 외에도 건장한 청년들 몇이 따로따로 불려 나왔다. 감방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이별했다.

내가 나가니 黨의 배려 하에 진심으로 반성하고 새 출발할 의향이 풍부하므로 退所를 시켜 준다는 관리 소장의 일장 훈시가 있었다.

이어 호송하러 온 내무원 두 명과 같이 살던 郡으로 가니 郡 내무부 정보과장이 나를 맞이해 주었다. 그는 자기가 보증을 서서 나를 불러내왔다며 앞으로 장군님과 黨 앞에 충성을 다하자고 말하였다. 그러며 하는 소리가 郡 내무부 정보과에서 나에게 반성할 기회를 주고 새 생활을 열?주기 위해 중국으로 파견하여 아주 중요한 일을 수행하도록 배려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흔히 말하는 특무로서의 사업인데 그 더러운 밀정질을 해 脫北者들을 붙잡아 오라는 소리인 것이다. 내무부에서는 의아해하는 나에게 내가 기독교와 접촉해 있었으니 한국에서 넘어오는 교회 목사들이나 전도사들의 중국 교회 침투 움직임과 그 동향을 구체적으로 내탐하라는 것이다. 또한 교회에 다니면서 한국측의 목사들이나 전도사들의 영향을 받은 脫北者들의 상황을 일일이 내탐하여 조장에게 보고하고 그들을 송환해오는 체포활동에 성의껏 협력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나에게 임무를 주고 서약서에 지장을 받아낸 정보과에서는 이틀 동안 집에 가서 휴식을 취하고 들어갈 준비를 갖추라고 했다. 정보과에서는 이틀 동안 먹으라고 밀가루 1㎏을 주어 그걸 받아들고 집으로 향한 나는 울적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살던 집에 가니 어머님이 혼자서 겨우 스러져 가는 목숨을 부지하고 계셨다. 올해 북한에서는 가뭄이 들어 씨뿌리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 벌써 흉년을 예고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동네 사람들은 중국으로 뛰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다 굶어 죽을 것이라고 수군댄다 하였다. 정말 5월의 북한 정경은 이 한 해가 주민들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라는 예감이 들고도 남았다. 논과 밭들이 말라 터져 있었고, 식량공급은 완전히 중단되어 있었다. 나는 누워계신 어머님에게 먼저 떡국을 끓여 대접하였다. 어머님은 눈물을 지으며 나의 경위를 듣고 나서 자기는 죽어도 좋으니 중국에 들어가서 살라고 하셨다.

하루 활동비 10원

하지만 아무리 근심해 보아야 이곳에서는 그들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가 없음이 명백했다. 중국으로 들어간 기회에 틈을 보아 달아나야 한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이틀 후 그들과 같이 밤중에 두만강을 넘게 되었고 우리 일행은 두만강을 지키는 경비병들이 직접 안내해 주었다. 밤 12시가 되어 경비병들의 안내 하에 두만강을 넘은 우리 일행은 중국 땅에 들어서게 되었다.

무릎까지밖에 안 오는 두만강의 넓은 여울목을 일행 다섯 명이 건너는 데 불과 몇 분도 안 걸렸다. 뒤에서 경비병들까지 손 흔들어 주니 마치 등산길이라도 오른 듯한 기분이었다.

중국 땅에서 우리는 조장으로 임명된 내무원의 지시 하에 각기 행동을 하게 되었다. 나의 임무는 내가 다니던 교회에 침투하여 정보를 얻어내고 연길市 농촌에 은신해 있는 脫北者들의 상황을 알아보는 것이란다. 일행 중 2명은 脫北者였고 한 명은 중국으로 친척방문을 몇 번 들어갔다가 나와 중국 실정을 아는 사람이었다. 이 외 두 명은 조장과 그를 수행하는 사람인데 그가 우리의 일거 일동을 감시하고 있었다.

조장은 매일 매일의 사업을 우리에게서 보고받고 상황 파악된 것을 직접 공안국에 가서 통보하고 그들의 협력을 얻어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즉 脫北者들의 現 위치와 이름, 특징 같은 것을 전해 주고 그들의 체포 동의안을 받아내는 일이었다.

우리가 움직이는 경비 자금은 조장이 중국 돈으로 하루에 10원씩 직접 주었다. 중국 돈 10원이면 중국에서 한두 끼 밥값밖에 안 되는 것이다. 모자라는 나머지 자금은 자체로 알아서 충당하라는 것이다.

나는 조장이 지적해 준 만남의 장소와 시간을 제공받은 후 그 자리를 떠나 독립 활동을 하게 되었다. 하루 사업보고 시간은 저녁 7시부터 8시 사이였고 만남의 장소는 연길市 교외의 어느 한 다방이었다. 나는 교회 상황에 대하여 묻는 조장에게 차마 그대로 이야기를 할 수 없어 거짓말로 적당하게 둘러댔다.

그런데 그것이 빌미가 되어 조장은 나를 의심하게 되었고 나에게 감시와 미행까지 붙이게 되었다. 내가 아파트에서 베란다를 타고 내린 그날은 분명 미행자가 아파트 입구까지 따라오는 것을 보았다. 하는 수 없이 그날 편지만 남겨두고 탈출하게 되었다. 그동안 그들의 마수에서 한시바삐 탈출하고 싶었지만 북한에 남겨두고 온 어머님이 걱정되어 차마 행동에 옮길 수가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든지 여유를 보아 그들의 그물에서 탈출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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