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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때 북한과 중국(모택동)과의 외교 관계.. 06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77 2021-02-14 15:58:23
06편.


 

위의 두 전문은 당시의 중-북한관계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만약 스티코프가 말한 주은래의 언행이 사실이라면. 중국의 외교부장 조차 왜 김일성이 북경을 방문하는지 몰랐다는 것이다. 다만 김일성이 북경에 와서 앞으로 있을 전쟁에 관하여 토론하기 위해서 온다는 것을 모택동은 알고 있었지만 침공계획의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뿐 아니라 두 전문은 모택동이 가졌던 앞으로 있을 남침에 대한 태도를 엿보게 한다.  만약 김일성이 침공의 세부계획을 가지고 있다면 회동이 비밀이 되기를 원했던 모택동의 바램은 모택동이 남침이후에 중국이 국제사회에 어떻게 비춰질까하는 데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모택동은 분명히, 최소한 공식적으로라도, 한반도의 무력사태와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이기를 원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한반도 통일문제는 무력만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모택동은 한반도 같은 작은 나라를 위해 미국이 세계3차대전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것이라며 미국의 한국전 개입 가능성을 낮게 평가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5월 13일 이른 아침 스티코프가 준비한 비행기에 몸을 싣고 북경으로 떠났다. 그들은 이 회동을 북한노동당정치국위원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다만 만주게릴라 시절의 동료인 김책에게 만 알렸을 뿐이다.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김일성과 박헌영은 모택동에게 안내되었다. 이는 1년 전 김일성이 북경을 방문했을 때 모택동이 보여준 태도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1950년 5월의 회담에서 김일성과 모택동이무엇을 이야기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혀주는  문헌증거는 없다. 그러나 회담 하루전 비신스키에게 보낸 전문에서 스티코프는 아래의 내용을 토론할 것이라고 보고한 바 있다.

 

김일성 등은 다음의 문제들에 대해 모택동과 토론하길 원한다고 통지하였다.

 

1. 무력을 통한 방법으로 한국의 통일을 이룩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도에 대한 정보제공 및 이에 관한 문제에 대한 협상결과를 모스크바로 통지하는 일.

 

2. 북한과 중공간의 무역협정체결문제에 대한 의견교환. 김일성은 가까운 시일 내에 무역협정에 사인하는 것을 제안하길 희망하나, 우호에 관한 협정은 국가 통일 후에 사인하길 원함.

 

3. 스탈린 동지와의 모스크바회담에 관한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 그리고 북한 노동당과 중국공산당과 중앙위원간의 보다 긴밀한 관계성립에 대해서 모택동에 게 자료 정보 제공.

 

4. 한국과 중국의 관심사. 예를 들어 수이호발전소, 중국에 사는 한국인들 기타 등등에 관한 문제들에 대해서 의견교환.※(참조) 《  앞의 「1950년 5월 12자 스티코프가 비신스키에게 보낸 전문」, 70-1쪽. 》

 

 

우리는 모택동-김일성간의 회담 동안 무엇이 일어났는지는 간접적인 증거로부터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회담 분위기는 우호적은 아니였던 것 같다. 회담이 끝난 즉시 모택동은주은래를 주북경 소련대사 로쉰에게 보내 자신이 가졌던 당혹감을 표현하였다.  

 

모택동은 주은래를 통하여 아래의 의사를 표현했고, 소련대사는 그 날 밤(5월 13일) 23시 30분 다음의 전문을 스탈린에게 발송하였다.

 

1. 김일성과 조선인민공화국 외무부장관 박헌영은 5월 13일 북경에 도착하였다.

 

2. 저녁에 모택동 동지는 그들과의 만남을 가졌다. 모택동과의 회담에서, 조선의 동지들은 지금 현재의 상황은 지난 과거의 상황과는 다르고, 북한은 활동을 재기할 수 있다는 필립포프동지 (스탈린-필자)의 지령에 관해 알려왔다. 그러나 이 문제는 중공과 그리고 모택동 동지와 개인적으로 심의되어져야만 한다.

 

3. 조선의 동지들은 북경에 2일간 머물 예정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관련하여, 모택동은 필립포프 동지가 전에 보낸 전신에 동의하며 이 문제에 관해 필립포프 동지의 개인적인 설명을 원하는 바, 가까운 시일 내에 통지바람.   

중국 동지들은 긴급한 답을 요청한다.※(참조) 《 基本文獻』「1950년 5월 13일자 필립포프(스탈린에게 신속히 보고할 것을 요망하는 로쉬나가 소련 외무성에 보낸 전신」, 72쪽. 》

 

 

이 중 다음의 두 문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중공과 그리고 모택동 동지와 개인적으로 심의되어져야만 한다.”라고 모택동이 말한 것과 “필립포프 동지가 전에 보낸 전신에 동의하며 이 문제에 관해 필립포프 동지의 개인적인 설명을 원하는 바”라고 모택동이 기술한 것이다.

 

이 두 문장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 문장은 훗날 중국이 한국전에 개입하게 되는 원인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모택동이 한국에서의 전쟁에 관한 결정은 모택동은중국과 상의해야 된다고 주장할 때는 모택동 자신이 그러한 최종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이 들린다. 

 

그러나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그러한 결정권을 위임할 의사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둘째 문장은 한국에 관하여 모택동과 스탈린간의 모종의 합의가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없다.

 

모스코바는 모택동이 요구한 것처럼 로쉰을 통해 즉각적으로 답신을 보냈다. 스탈린을 대신하여 비신스키는 아래와 같은 전문을 보냈다.

 

마우쩌뚱에게!

 

조선동지들과의 회담에서 필리포프와 그의 측근들은 현 국제상황으로 변한 것을 근거로 조선측의 남, 북한 통일시험을 착수하겠다는 제안에 동의한 것으로 알려짐. 

 

이에 대해 사전에 합의가 된 것은 이러한 사업착수에 있어 발생되는 문제들은 모두 중국측과 북한측의 합의하에 해결되어져야 하며, 만약 북한측과 중국 측이 문제해결 방법에 있어 이견이 생길 경우 새로이 그 문제해결을 위한 회담이 있을 때까지 미루어두어야 함. 

 

이런 회담 내용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조선측에서 당신들에게 자세히 밝힐 것임. ※(참조) 《  基本文獻』,「1950년 5월 14일자 비신스키가 북경의 소련대사에게 보낸 전신」, 73쪽. 》

 

 

이 전문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스탈린이 모택동에게 자신의 남침승인을 밝히는 태도와 그가 왜 승인을 했는지에 대한 애매모호하게 설명한 부분이다. 스탈린은 국제상황이 변하였다고 한마디하였을 뿐이며. 자기 자신이 남침을 승인했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김일성이 설명할 것이라며 회피적 태도를 취하였다.

 

비록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자신의 결정과 남침의 세부계획을 모택동에게 통보하도록 지시한 것 같이 나타나지만, 김일성은 아무것도 모택동에게 알리지 않았다. 따라서 김일성은 분명히 북경에 모택동과 상의를 하고자 온 것은 아니었다. 단지 김일성은 모택동에게 스탈린이 남침을 승인했다는 것을 통보했을 뿐이다. 

 

1950년 9월말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한국전의 정세가 북한에게 불리하게 급변하자 모택동은 북한대표단을 북경으로 불렀다. 인민군 부참모장 이상조가 대표단을 이끌고 모택동을 만났을 때 모택동은 북한측이 침공계획을 소련측과 상의했는가? 하는 힐책의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이상조는 모택동의 그러한 질문을 한국전개전의 최종결정에 모택동을 제외시킨데 대한 모택동의 분노로 받아들였다. ※ (참조) 《 李相朝, 「金日成 이렇게 政權세웠다」<2> , 한국일보 , 1989년 6월 18일, 3면. 》

 

 

이 일화로부터 한 가지 중요한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모택동은 김일성이 1950년 5월 13일 스탈린의 최종승인을 통보할 때까지 한국전 개전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전 개전의 최종결정에서 모택동은 제외되었던 것이다.

 

왜 북경과 모택동은 이 중요한 결정에서 제외되었을까? 곤차로프는 김일성이 중국인을 신뢰하지 않았고 모택동에게 자세한 남침계획을 밝히는것은 남침계획의 비밀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설명하고 있다. 

 

심지어 연안파 출신의 인민군장교들은 중요한 보직에서 제외시키기도 하였다.※ (참조) 《   곤차로프, 前揭書, 153-4쪽.》

 

그러나 한국전 이전 중국과 북한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했던 것은 김일성의 감정만의 문제 만은 아니었다.

 

중국과 북한간의 관계를 형성하는데 스티코프의 영향력은 중요하였다. 소련대사는 북경과 평양간의 관계를 최소화 하고자 시도하였다. 아래의 전문은 이러한 스티코프의 태도를 보여준다. 5월 12일 북경방문에 앞서 김일성은 스티코프에게 자신이 모택동을 만나 어떤 도움을 요청하여야 할지 자문을 구하였다. 스티코프는 아래와 같이 김일성에게 대답하였다.: 

 

김일성에게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으로 중공이 김일성을 도울 수 있는지 명백한가를 물었다. 이에 김일성은 중공에 주둔했던 사단이 보유했던 일본식, 미국식 무기를 위한 탄약과 어느 정도의 말을 원한다고 답하였다. 그러나 3벌 이상 탄약을 보유하고 있다고 보고한 지휘본부관과의 대화 후, 이 문제는 거론 않기로 결정하였다. 

 

이어서, 모스코바에서 그의 부탁이 만족스럽게 이루어지고, 필요이상의 도움을 받은 바, 더 이상으로 모택동에게 요구 할바 가 없다고 알림. ※ (참조) 《 앞의 「1950년 5월 12일자 비신스키에게 보낸 스티코프의 전문」, 70-1쪽.》

 

 

●   끝맺음말

 

 

 

지금까지 두 차례에 걸친 김일성의 북경방문과, 1949년 겨울 모택동의 모스코바 방문동안 진행된 조선인 병사송환 문제를, 문제를 둘러 싼 협상과정을 통하여 모택동이 보여준 북한의 남침계획에 대한 입장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모택동과 중공정권은 북한의 남침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1949년 5월과 1950년 5월 두 번이나 북경을 방문하

게 하여 남침문제에 대하여 모택동과 의논토록 하였다. 

 

이 방문동안 모택동은 ‘조국통일’을 내세우는 북한측의 남침승인요구에 차마 반대한다는 말은 하지 못하였다. 다만 자신의 남침지지에 ‘국제정세’ 또는 ‘일본의 남한측 개입’이 있을 경우 등 여러 전제조건들을 달아 실질적으로 남침반대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나타난다. 

 

무엇보다 1949년 5월 방문시 모택동은 김일성을 상대하지 않았다. 그것은 모택동이 보여준 강한 반대의사의 표현이였다.

 

모택동이 남침에 반대하였지만 중국은 북한의 남침준비를 위해 협조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협조하였다. 이 일년여의 기간동안 중국으로부터 최소한 3만 4천명 이상의 조선인 병사들이 북한 조선인민군으로 편입되어 남침의 주력부대가 되었다.  

 

이 병사들의 송환은 스탈린이 북한의 남한에 대한 군사적 우월성을 확보하도록 강조하였기 때문에  중국측으로서도 송환을 거부할 수 없었다.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실전경험을 쌓은 이 조선인 병사들은 소련이 제공한 무기와 함께 북한이 남한에 대한 군사적 우월성을 쉽게 확보할 수 있었던 원천이였다. 

 

이 훈련된 군사들이 없었더라면, 북한은 군대훈련을 위해 더 오랜 전쟁준비기간이 필요했을 것이고 따라서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이 아니라 그 이후에 발발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김일성과 스티코프는 남침결정과정에서부터 모택동의 의견에 별다른 비중을 두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경향은 스탈린의 모택동에 대한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1950년 5월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지시하여 모택동에게 자신의 남침승인 이유와 남침의 세부계획을 알려주도록 지시하였지만 김일성은 스탈린의 지시를 성실히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탈린과 스티코프는 훗날 이 문제로 인하여 김일성에게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북경과 모택동을 앞으로 있을 남한침공으로부터 배제시키는 것이 스탈린과 김일성의 의도였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경우 모택동과 중국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것은 전쟁개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50년 10월 유엔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격하고 북한정권이 위기에 처한 후에도 김일성이 도움을 청한 곳은 스탈린이였다.  김일성이 모택동에게 원조를 청한 것은 스탈린의 비밀지시로 소련관계자들이 김일성에게 암시를 준 이후이다.

 

  당시의 중-북한 관계를 현재의 입장에서 뒤돌아보면, 두 국가의 수반, 즉 모택동과 김일성의 감정대립 속에 두 공산국은 많은 협조를 하는 기이한 일들이  

벌어졌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중국과 북한의 관계가 양국간 당사자에 의해서만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스탈린이라는 거목의 그늘 아래에서 소련의 간섭과 압력 구도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또 하나 본 연구에서 밝혀진 것 중의 하나는 공산권내부에 있었던 갈등관계이다. 기존의 연구는 이러한 요소를 가볍게 다룬 경향이 있었다. 본 논글에서는 북한과 중국 다시말해 김일성과 모택동간의 갈등문제를 부각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공산권내부의 갈등은  모택동과 스탈린의 관계에서, 모택동과 고강의 관계에서도, 소련군부와 소련외무성의 관계에서도, 그 축소판인 평양의 소련대사관의 문관과 무관사이에서도, 김일성과 박헌영의 관계에서도 존재하였다. 

 

이러한 공산권내부의 갈등에 대한 이해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이다.

 

  이상..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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