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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항일독립운동. 04편 시리즈
Korea, Republic of 돌통 0 277 2021-03-05 20:17:56
 04편.

 

 

 

김일성은 1926년 화성의숙에 들어갔지만 민족주의적 성향의 교육내용에 불만을 품고 혼자 공산주의에 관한 서적들을 접하며 동료 학생들과 청년들을 모아 공산주의 운동 조직을 만들었다고 한다. 흔히 약칭으로 [ㅌ.ㄷ]이라고 불리는 [타도 제국주의 동맹]이다.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지향하며 자주독립을 이루겠다는 목적으로 이 동맹을 결성하였는데,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너무 좌익적인 조직인 것 같다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이름에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넣지 않았다고 한다. 그 때는 민족주의자들과의 협조를 염두에 두었다는 뜻이다. 김일성은 이 동맹이 발전하여 [반제국주의 청년동맹]으로 바뀌고 다시 [공산주의 청년동맹 (공청]'으로 바뀌었다고 말하는데, 북녘에서는 1926년의 이 조직을 "조선로동당의 역사적 뿌리"라고 주장해오고 있다.

 

 

처음엔 청년학생운동으로 시작했지만 점차 노동자와 농민들까지 포섭하면서 활동 범위도 길림을 벗어나 동만주와 조선 북부지방까지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여러 민족해방운동 단체들과 협조하고 중국공산당과 연계하며 국제공산당과 거래할 필요성을 느껴 1930년 6월 만주 카륜에서 [조선공산당]을 결성했다고 한다. 참고로, 북녘에서는 바로 그 때 그 곳에서 김일성이 주체사상을 처음으로 고안했다고 주장하는데, 대부분의 남쪽 전문가들은 이를 조작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조선공산당] 결성에 이어 1930년 7월에는 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위해 [조선혁명군]을 만들었다. 김일성의 말대로 "독립군 출신의 몇몇 동무들과 화성의숙을 다닌 얼마간의 동무들이 있고 몇 자루의 권총이 있을 뿐"이었으니, "조선 부락에나 숨어있을 뿐 다른 데는 얼씬거리지도 못하고 밤에만 몇 사람씩 비밀리에 나다니는 형편이었다"고 한다. 이름이 거창하게 '혁명군'이지, 기껏해야 수십명의 '비밀유격대'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이름붙인 이유는 민족주의자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고 활동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4년 전 [타도 제국주의 동맹]을 만들 때 공산주의 냄새가 나지 않도록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 무렵엔 여러 독립운동 세력들 사이에 이념과 계파에 따라 서로 갈등과 대립이 심했기 때문이다.

 

 

일제가 1931년 만주를 침략한 뒤부터 김일성은 중국공산당 조직과 연계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한 나라에 하나 밖에 둘 수 없다는 국제공산당의 지침에 따라 중국 안에서 [조선공산당]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중국공산당 하부 조직으로 참여했다는 말이다.

 

 

1932년 4월 25일에는 '비밀유격대' 같은 [조선혁명군]을 바탕으로 100여명 규모의 중국공산당 조선인부대 지대를 만들어 대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다. 북녘에서는 이를 [반일 인민유격대]라고 부르는데, 이게 바로 지금 조선인민군의 뿌리라고 주장한다. 북녘에서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을 창설해 이 날을 창군기념일로 삼아오다, 1978년부터 4월 25일로 창군기념일을 바꾼 배경이다. 참고로,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북녘의 공식 환영식이 열린 장소가 옛 이름으로는 2.8문화회관이요 새 이름으로는 4.25문화회관이니, 이 역시 그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는 것이다.

 

 

1934년엔 [반일 인민유격대]를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바꿨다는데 이게 흔히 동북항일련군 조선인부대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 때까지는 주로 만주지역에서 무장투쟁을 벌여왔는데, 1936년엔 [조국광복회]를 조직하고 백두산 곳곳에 밀영을 만들어 조선 안에도 들어와 빨치산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벌인 투쟁 중에 대표적인 것이 앞에서 소개한 적이 있는 1937년 함경남도 보천보전투 및 증평리습격 등이다.

 

 

보천보전투에 대해 앞에서 자세히 소개했는데 여기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조선과 중국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조국광복회]를 비롯한 항일운동 세력이 큰 힘을 얻었다고 한다. 그와 관련하여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보천보전투 이후 갑산지방에 널리 퍼진 노래에 '순사돼지 꿀꿀'이란 것이 있다. 유격대의 기습에 혼비백산한 일본경찰 하나가 돼지우리에 숨었고, 유격대가 퇴각한 뒤에 마을 주민들이 다가가도 겁에 질린 채 돼지인 척 꿀꿀댔다는 것을 풍자한 노래이다.... 보천보사건 이후 순사들은 유격대를 겁내 밤에는 다니지도 못했고, 함경도 일대의 산림 주사와 간수들이 "보통 때는 극성스럽게 산으로 돌아다니며 화전민을 괴롭혔으나 보천보전투 뒤에는 산 근방에 얼씬거리지 못했기 때문에 화전민들이 그 해에는 자유로이 화전을 개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보천보사건 직후 [조국광복회]나 [조선민족해방동맹]이 국경 산악지대에서 놀라울 정도로 급속하게 조직을 확장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

 

 

 

이렇듯 김일성은 1930년대에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항일무장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하다가,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일제의 침략과 약탈이 극도로 심해지자 1940년 말 소련 하바로프스크 지역으로 물러가게 되었다. "대부대 활동으로부터 소부대 활동으로 넘어가기 위한 새로운 전략적 방침"을 세우고 소련으로 옮긴 것이다. 그 후 1942년까지 소규모 유격대를 이끌고 소련 하바로프스크, 중국 만주, 조선 백두산 등을 오가며 간헐적으로 투쟁했다고 한다. 그리고 1942년 7월 "쏘련, 중국의 동지들과 함께 국제련합군을 편성하고 조선혁명의 주체적 력량을 백방으로 강화해 나가면서 국제 반제력량과의 공동투쟁을 통하여 일제의 격멸과 제 2차 세계대전의 승리에 기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확인하고 검증해볼 필요가 있다. 남쪽 정보부나 일부 북녘 전문가들은 김일성부대가 소련으로 후퇴한 후 1945년 평양에 들어올 때까지 항일무장투쟁은 없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상..  05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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