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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락치 사건 성시백 시리즈.04편 (총 07편작)
Korea, Republic of 돌통 0 264 2021-03-16 18:30:44
04편  시리즈     총07편작.

 

 

 

●  김구와 김일성의 만남 대화 몰랐던 사실들

 

 

 

◇  해방공간의 김구       

 

 



2008년 6월 16일자 신용하 백범학술원장이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백범이 광복 후 환국해서 대한민국을 건국할 때, 남·북한의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먼저 ’남북협상‘을 해보자고 주장하며 1948년 4월 평양을 다녀온 것을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했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참으로 큰 오해이다.”

 

 

신용하 씨의 주장은 김구 초상 10만 원권 화폐 도안인물 선정 사건과 맞물려 건국 60주년을 기해 봇물 터지듯 터진, 건국 당시 김구의 부정적인 행적에 대한 비판에 대하여 봉합(封合)하려는 대응으로 보인다.

 

 

신용하 씨의 주장처럼 그것이 과연 전혀 사실이 아닌 순전한 오해인지 당시의 상황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1948년 돌연 선거 반대 표명

 



김구는 1948년초만 해도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에 참여한다는 데에 이견이 없었다. 김구뿐만 아니라 한독당 구성원 다수도 같은 생각이었다.

 

 

유엔위원단의 입북(入北)을 거부한 소련의 입장을 재확인했다는 보도가 있자 한독당은 1월 25일 “소련측이 북조선 입경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부득이 유엔 감시하에 수립되는 정부가 중앙정부라면 38선 이남에 한하여 실시되는 선거라도 참가할 용의가 있다”라고 천명했다.

 

 

그러나 1948년 1월 26일, UN한국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한 후 열린 청문회에서 김구는 돌연 외국 군대의 즉시 철수와 남한만의 선거 반대를 표명하였다.

 

 

이에 외군 철수 후의 무정부 상태와 내란을 생각지 않느냐는 UN위원단의 질문에 김구는 “그것은 유엔한국위원단이 해결할 책임”이라고 답변했다.

 

 

 
이러한 답변에 프랑스의 마네트(Manet) 위원은 “김구 씨는 UN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군대가 없다는 것을 모르느냐”는 핀잔을 했다.

 


유엔위원단을 만나고 나온 김구는 “미·소 양군이 철퇴하지 않고 있는 남북의 현재 상태로서는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가질 수 없으므로 양군이 철퇴한 후 남북요인회담을 하여 총선거로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장덕수 암살후 한민당과 갈등, 돌아서

 

 

비록 조건부였지만 총선 참여를 천명했던 김구와 한독당이 돌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장덕수 암살사건의 영향을 들 수 있다. 1947년 11월 17일 김구가 당수인 한독당이 주축이 된 각 정당협의회는 미·소양군의 철퇴를 요구하며, 남북 정당대표회의를 구성하여 통일정부를 세우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11월 21일, 70여 민족진영 단체들이 이러한 주장은 공산당의 대변자로 밖에 볼 수 없다고 규탄하자, 김구는 이 주장을 보류하고, 12월 1일 UN 결의안과 이승만 박사의 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12월 2일, 김구의 휘하로 알려진 김석황의 주도하에 한민당의 중진인 장덕수 암살 사건이 발생한 후, 김구의 정치노선은 다시 돌변하여 결과적으로는 공산당과 같은 노선으로 들어선 모습이 되고 말았다.

 


미군정에서는 장덕수 암살 배후인물로 김구를 지목했다. 그러자 김구 측에서는 이승만 박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이 박사와 하지의 관계는 견원지간을 방불케 하는 상태였다.

 

 

결국, 비서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상황이 더욱 악화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이 박사에게 전달하지 않았고, 이 박사가 고의로 도움 요청을 회피한 것으로 생각한 김구는 몹시 서운해 하며 두 사람의 관계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둘째, 1936년 임정(임시정부)의 주불(駐佛) 외교위원이었던 서영해의 등장과 성시백의 공작을 들 수 있다. 

 


임정 국무위원을 지냈으며 해방 후에도 김구를 추종해 온 조경한에 의하면 “김구는 처음에는 단선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서영해가 나타나 '남북한을 통털어 총선거를 하면 선생님이 대통령이 되실 텐데 무엇 하러 이  박사가 주도하는 남한만의 선거에 참가하려고 하십니까? 김일성도 김구 선생을 대통령으로 모시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라고 집요하게 설득하는 바람에 변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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