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증언은 하나의 주장이며 사실일수도,거짓일수도,뒤섞여 있을수도 있다. 아직 학계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사료 부족으로)
코바넨코의 KGB 김일성 추대 배후역할 관련 증언1) ...
이같은 사실은 당시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레프스키 원수의 부관이었던 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부 부부장 코바넨코 이반 이바노비치씨( 모스크바거주)가 처음으로 공개한 것이다.
50년 소련군 대좌로 예편, 소 공산당 중앙위 간부로 들어가 88년까지 국제부 극동 담당 부부장을 지낸 코바넨코씨는 『45년 8월 24일 대일전에서 승리한 소련은북한 소비에트화의 조기 정착을 위한 지도자 후보 선정을 놓고 고심했었다』며『45년 9월 초순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레프스키 원수가 「극동군에서 추천한 88정찰여단의 김일성 대위를 비밀리에 모스크바로 보내라」는 스탈린의 긴급 지시를 받고 하바로프스크에서 소련군 특별 수송기 편으로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보냈었다』고 밝혔다.
코바넨코씨는 『스탈린은 모스크바 교외 별장에서 극동군 총사령부와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KGB 극동본부가 보고한 김일성에 대한 평정서를 토대로 김일성을 면접한 후 「군은 이 사람에게 적극 협력하라」고 지시했었다』며 김일성은 사전에 소련으로부터 북한의 지도자로 내정돼 입북했음을 분명히 했다.
코바넨코 씨는 그 경위를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한반도에서 일본 관동군을 몰아내고 북한 지역에 주둔한 소련군 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에게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기 위한 지도자를 빨리찾으라」는 지시가 모스크바에서 하바로프스크 극동군 총사령부를 통해 떨어졌지요. 그러나 25군은 마땅한 인물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25군 지도부는 북한 내부사정을 잘몰라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그러나 25군 지도부의 고민은 며칠 가지 않았다. 극동군 총사령부에서는 KGB 극동본부와 협의해 88정찰여단의 김일성 대위를 북한 지도자 후보로 추천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코바넨코씨의 증언 계속.『모스크바 당 중앙과 극동군 총사령부에서는 한 때 소련에 살고 있는 허가이·박창옥·남일 등이 지도자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소련의 공민이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로부터 많은 저항이 있을 것으로 판단돼 부적합하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북한 지도자는 우선 공산주의자여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지요. 25군은 북한에 믿을 만한 공산주의자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박헌영이 서울에 있었으나 25군은 잘 모르고 있었지요.』코바넨코씨에 따르면 극동군 총사령부가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 후보로 추천한 이유는 그가 3년 여 동안 소련군대에서 정칟군사 훈련을 받았고, 이 과정에서 그의 리더십과 계략이 뛰어나다고 판단됐으며, 30년대 중국과 만주 국경지대에서 중국공산당원으로 항일활동을 했을 뿐 조선공산당 등 종파투쟁에는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 참조 》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하』(중앙일보사, 1993), PP. 202-207.
코바넨코씨의 증언은 이어진다.『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보내라는 스탈린의 지시를 받은 바실레프스키 사령관은 하바로프스크 인근에 있는 군용 비행장에 수송기를 대기시켜놓고 88정찰여단의 김일성 대위를 불러온 후 KGB 극동본부 요원 2명에게 모스크바로 안내토록 했습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김일성은 스탈린의 전용 별장으로 직행, 그곳에서 한참동안 대기하다 스탈린의 「면접시험」을 받은 것이지요. 스탈린은 극동군과 KGB 극동본부에서 올린 김일성에 대한 평정서를 검토한 후 평정서 내용대로 조목조목 질문을 하더라는 겁니다.
간단한 식사를 곁들인 이 면접은 4시간 동안 진행됐습니다. 소련군 대위 견장을 단 김일성은 자리가 자리인 만큼 너무 긴장해 스탈린의 질문이 떨어질 때마다 무조건 「예」「예」만 연발할 뿐 한 마디도 못했다고 훗날 중앙당에서 이 자리에 배석했던 고위 간부에게서 들었습니다.』코바넨코씨는 『김일성을 면접한 스탈린은 배석했던 군 고위 책임자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다. 소련군은 이 사람에게 적극 협력하라」고 지시, 북한정권의 주역이 결정됐다』고 회고했다.
42년부터 43년까지 극동군 구참모부 7호 정치국 소속 소좌(소령)로 김일성이 소속돼 있는 88정찰여단에 가 여러 차례 극동정세 등을 강의하기도 했던 코바넨코씨는 88여단 시절의 김일성을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만 해도 솔직히 대위 김일성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단장주보중(중국인)은 기회 있을 때마다 김일성을 칭찬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김은 매우 엄격하고 친화력이 있는 지휘관이며 대원들과 함께 힘든 저격·정찰 훈련을 받았고,조국해방과 독립에 대한 집념이 강했다는 것입니다.
김일성 부대(제1대대) 강의 때 나의 강의는 중국말로 통역됐습니다. 그러니까 김도 중국말을 알아들었지요.』
코바넨코씨의 증언은 이어진다.『모스크바를 다녀온 김일성은 KGB 요원들과 함께 바실레프스키 사령관에게 인사차 왔습니다. 내가 그를 사령관에게 안내했지요. 그는 여전히 긴장된 표정으로 인사를 하더군요. 사령관은 「평양에 들어가 상관들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라」는 한마디를 건넨 후 악수를 하고 내 보냈습니다.』
코바넨코씨의 이같은 역사적 증언은 「45년 9월 초순 극동군 제1전선군 군사위원스티코프 상장으로부터 김일성을 평양에 들여 보낼테니 주택과 자동차를 지급하고,소련군 장교로 구성된 호위병을 배치토록 하며, 그의 정치활동에 적극 협조하라는 등 긴급 지시를 받았다」
《참조》(326쪽 「베일에 가려졌던 스탈린의 김일성 낙점 내막」참조)
고 밝힌 전 평양 주둔 소련 25군 정치군사위원 레베데프씨의 증언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코바넨코씨는 『레베데프 장군은 극동군 예하의 평양 주둔 25군 군사위원이어서 모스크바와 극동군 총사령부의 분위기를 잘 모를 수 있었기 때문에 스티코프가 사령부 고위 장성들과 협의해 이 같은 지시를 내렸을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티코프가 레베데프에게 그 같은 지시를 내린 배경은 이렇게 봐야 합니다.
스티코프는 당시 제1전선군 사령부가 주둔해 있던 우스리크 지역에 있었지요. 모스크바와 하바로프스크 총사령부의 긴박한 움직임을 뒤늦게 알았을 것입니다. 그 후 하바로프스크에 온 그는 스탈린이 김을 낙점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스탈린의 총애를 받은 그가 북한문제의 전권특사로 지명됐습니다.
물론 그는 훈련된 정치일꾼이었기 때문에 극동군과 KGB의 김 추천 과정 때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김의 모스크바행은 극비 중 극비였기 때문에 모르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어쨌든 그는 스탈린이 김을 면접하고 낙점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평양의 25군에 그 같은 지시를 내렸음이 확실합니다.
아무리 막강한 고위 장성이라도 스탈린의 의중을 정확히 모르고는 함부로 행동할 수 없는 시대였으니까요.』코바넨코씨는 김일성 입북 후 45년 말까지 여러 차례 바실레프스키 사령관의 특명을 받아 평양에 다녀오기도 했었다며 증언을 이어갔다.
『나의 평양 출장은 소련군정 7호(한반도와 극동지역을 가리키는 암호) 정치부의활동에 대한 특별사찰의 성격이었습니다.
김을 평양에 보낸 사령부 고위 지도부는일말의 불안을 갖고 있었습니다. 북한 전 인민들의 절대적인 추앙을 받고 있던 조만식을 비롯한 민주·민족 진영과 국내 공산주의 세력의 틈바구니 속에서 사회주의정치훈련과 경험·이론 등 무장이 채 안된 33세의 젊은 장교를 지도자로 내세우는과정이 순탄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이 과업의 실패는 스탈린의 한반도 「민주기지」건설 노선과 소비에트 정권이식에 차질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 결과를 빚을 경우 스탈린에게 줄줄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극동군 고위 장성들의 이 같은 염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조만식을 비롯한 민주·민족 진영 외에 서울의 박헌영 그룹 등이 만만치 않은 걸림돌로 등장한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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