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결성되기까지 |
---|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현재의 만경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김형직(金亨稷)이고 그의 어머니는 강반석(姜盤石)이었다. 김일성의 어린 시절의 이름은 김성주(金成柱)였다. 그의 아버지 김형직은 김일성이 태어났을 때 평양의 미션스쿨인 숭실중학 학생이었고 나중에 기독교계통인 명신학교의 교사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김일성의 외할아버지인 강돈욱은 교회 장로 로서 김일성의 어머니가 되는 딸 강반석의 이름을 12사도의 첫째인 베드로의 이름을 따서 지어 주었다. 김일성은 그의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평양: 로동당출판사, 1992)에서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에 가던 것을 회상하기도 하였다 김형직의 가족은 1919년 만주로 이주하였다. 김일성은 1923년 홀로 평양으로 돌아와 외가가 있는 용산면 하리의 창덕학교를 다녔으며 1925년 만주로 돌아가 이후 1926년 3월 천도교도인 민족주의자 최동오가 운영하였던 만주의 화전현 소재 정의부 소속의 화성의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6월 아버지의 죽음과 더불어 화성의숙을 그만 두었다.(북한 문헌들은 26년 가을까지 화성의숙에 재학하였으며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였다고 주장한다.) 1927년 길림의 육문(毓文)중학에 입학하였다. 바로 여기서 김일성은 공산주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되었고 조선공산청년회라는 조직에 가입하였다. 1929년 가을에 김일성은 반일활동협의로 중국군벌당국에 체포되어 수개월 동안 가옥살이를 하였고 퇴학처분을 받았다. 1930년 봄 출옥후 길림성 소재 카륜 고유수 지방에서 이종락이 이끄는 국민부 계통의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 대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때 김일성은 당시의 항일운동가들이 그러하듯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김일성(金日成)이었다. 1931년 초 조선혁명군이 붕괴되자 간도지방으로 이동하여 공산청년동맹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일국일당주의의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 항일유격대 김일성이 항일유격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것은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부터였다. 중국공산당은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만주성위에 항일유격대의 창설을 지시하였다. 안도현의 공산청년조직에 속해 있던 김일성도 1932년 4월 반일유격대를 조직하였다. 1978년이래 북한에서 조선인민군의 창군일로 기념하고 있는 4월 25일은 바로 이 날을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안도유격대는 왕청유격대와 합류하였으며 김일성은 유격대 정치위원이 되었다. 이후 동만 각지의 유격대가 단일편제를 갖추어 1934년 3월 결성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에서 1934년 가을부터 3단 정치위원을 맡았다. 한 때 민생단 사건에 연루되어 유격구 내 아동학교의 교사로 강등되기도 하였으나 1936년 3월에 결성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3사 사장이 되었으며 1936년 7월 개편이후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 사장이 되었다. 김일성의 나이 24세였으며 그가 지휘한 유격대 병력은 약 600명 정도였다. 이 병력의 과반수가 조선인이었다. 이 때 해방이후 북한에서의 권력획득과 관련하여 두 가지 중요한 일을 하게 된다. 그 하나는 조국광복회 조직 확대작업을 주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천보 전투를 치렀다는 것이다. ● 조국광복회 임춘추는 1936년 5월 무송현 동강에서 제2군 고급간부회의가 열렸는데 여기서 재만한인조국광복회의 결성이 결정되었다고 한다. 이어 열린 하리회의에서 위증민은 '한인공작의 부활문제'에 대하여 몇 가지 지시를 하였다. 그 내용 가운데는 韓人대중에게 조국광복의 반일정신을 고취하라는 것, 만주의 반일운동은 한인의 조국광복운동을 직접 원조하고 중한 비압박민족의 해방을 위해 공동전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시키라는 것 등이 들어 있었다.(림춘추, {항일무장투쟁시기를 회상하여} 평양, 1959; 와다하루끼 143-44). 1936년 6월 10일자로 된 [재만한인 조국광복회 선언](발기인 오성륜(전광의 본명), 엄수명, 이상준(이동광의 본명)) [재만한인 조국광복회 목전 10대 강령] 등의 문서는 이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내용들은 하리회의의 결의를 받아들인 것이지만 실제로 재만한인 조국광복회라는 중앙조직이 만들어 졌는가에 대해서는 불확실하다. 와다하루끼는 만들어졌을 리 없다고 보며 김일성의 제6사가 만주 쪽 장백현의 조선인과 압록강 대안의 조선 쪽 함경남도 갑산군의 주민을 대상으로 공작하여 만든 것이 유일한 조직실태라고 한다.(와다 148-156) 조국광복회의 조직 구축은 36년 9월부터 김일성이 장백현에 정치공작원을 파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3도구 도천리에서 최초의 조국광복회 지회가 설립되었다. 이러한 작업은 갑산군에서도 진행되었다. 조국광복회 확대작업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당시 함남북부지방의 공산주의자들과 연계를 맺게 되었다. 박금철, 박달, 이송운, 허석선, 김왈룡, 허학송, 이효순 등이 바로 그들로서 이들은 이른바 갑산파로서 김일성의 집권을 뒷받침하는 인적 집단이 되었다. 박달은 1931년 갑산적색농민조합운동을 조직하고 야학을 통하여 프롤레타리아 문화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그들 스스로가 김일성과의 연락을 모색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1937년 1월 장백현의 산중에서 김일성과 박달 등과의 회견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갑산공작위원회라는 공산주의 단체가 결성되었다. 조국광복회는 장백현 내에 조국광복회 장백현 공작위원회를 조직하고 각 지부를 만드는 한편 당세포, 부녀부, 생산유격대의 조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들 지부는 아무런 활동을 한 흔적이 없다. 명목상의 조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보천보전투 동북항일연군은 일본군과 경찰을 상대로 하여 계속적으로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들은 조선국내 진공작전을 논의하였다. 김일성의 주도하에 조선의 보천보에 대한 공격이 결정되었다. 보천보 즉 보천면 보전은 일본인 50명, 조선인 1323명 중국인 10명 등 합계 308호 1383명이 거주하고 5명의 경찰이 주재소에 있는 작은 시골 도시였다. 그러나 혜산으로부터 2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습격의 소식은 삽시간에 조선 전역으로 전해질 수 있는 곳이었다. 보천보전투는 1937년 6월 4일 김일성이 지휘하는 약 100명의 항일유격대가 동원된 진공전투로서 일본 경찰지서 관공서를 파괴 방화하였다. 미리 협력을 하기로 약속을 해둔 조국광복회의 청년 80여명도 가담하였다. 기관총 2정의 공격을 피해 경찰 5명은 모두 도망갔으나 주재소의 총기고에서 경기관총 한 자루, 소총 6자루, 권총 2자루, 탄약 수백 발을 탈취하였으며 약간의 점포 주택에 침입하여 현금과 물자를 탈취하였다. 습격대는 오후 11시 철수하였다. 혜산진서에서는 5일 오까와 경부가 인솔하는 31명의 경찰병력과 수비대 60여명, 헌병대 8명 등이 출동하여 김일성부대를 추격하였다. 김일성부대는 오까와 부대와 접전하여 전사지 7명과 부상자 14명을 내었다. 당시 국내 언론들은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동아일보는 1937년 6월 5일자로 두 차례에 걸쳐 호외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은 김일성의 이름이 국내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항일연군의 조선진출공격에 자극을 받아 이를 토벌하고자 김인욱 소좌의 지휘하에 함흥의 74연대를 출동시켰다. 이 부대는 항일연군이 간삼봉으로 이동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간삼봉으로 이동하였으나 매복 공격을 당해 김인욱의 부상을 비롯하여 괴멸적 타격을 입었다. 이 사건도 국내에 보도되었다. 김일성과 최현의 이름은 강렬한 인상을 조선인들에게 남겼다. 일제는 중일전쟁의 개시 이후에도 만주에서의 토벌작전을 늦추지 않았다. 집단부락을 통해 상호 감시하는 체제를 구축하는가 하면 항복한 자를 처형하지 않고 귀순자로 받아들인다는 전술을 채택하여 선전하였다. 이들은 양정우 부대와 김일성 부대를 목표로 동변도지구특별귀순공작을 실시하는가 하면 38년 9월에는 길림 제2군관구 사령부 아래 간도특설대를 조직하였다. 이것은 조선인 청년들로 조직된 대 게릴라 전문부대였다. 조선인들을 통해 조선인들의 저항을 진압하겠다는 것으로 여기에는 나중에 한국군의 지도자가 된 白善燁(백선엽) 金白一 (김백일)申鉉俊(신현준) 金錫範(김석범) 등도 들어 있었다. 1938년 12월 일제의 가혹한 토벌 속에서 유격대 편제가 개편될 때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 군장이 되었다. 2방면군 군장시절 김일성은 1940년 3월 180명으로 구성된 마에다前田(전전)토벌대를 전멸시킨 것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940년 3월 11일 김일성 부대는 화룡현 홍기하에 있는 일본인 목재소를 습격하였다. 삼림경찰대가 지키는 곳이었지만 심야에 습격하여 대량의 총탄과 쌀을 탈취하는 데 성공하였다. 마에다 부대 145명은 퇴각한 김일성을 뒤쫓아 왔다. 쫓고 쫓기기를 여러 날, 김일성은 매복공격을 결정하였다. 3월 25일 대마록구 서쪽 25km 지점에서 격전이 벌어져 마에다 부대를 궤멸시켰다. 교전에 참여하였던 김일성 부대원은 마에다 부대원 140명 가운데 단 한 명만이 살아남았다고 전하고 있으며 일본측의 기록으로는 20여명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 145명의 경찰대는 일본계 9명과 약간의 만주계를 제외하면 거의가 조선인이었다고 한다. 김일성부대 쪽에서는 "총을 버리고 손을 들어라. 명령에 따르는 자는 죽이지 않는다"는 소리를 목이 쉬도록 외쳤다고 한다. 그러나 한 사람도 항복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일본 경찰과 토벌대가 반드시 추적 사살하고자 하는 목표가 되었다 ● 소련영으로의 이동 일제는 토벌대를 강화하고 집요하게 추격하여 왔다. 1939년 말부터 시작된 일제의 대토벌 작전에 만주의 유격대는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극동지역 소련군은 유격대의 활동이 일소간 긴장을 초래한다하여 이들의 소련 입경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주의 항일 유격대는 소련으로의 이동을 결정하였다. 김일성부대도 1940년 11월 소만 국경을 넘어 블라디보스톡 근처의 보르시로프 야영(남야영)으로 이동하였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조중연합의 항일유격대가 소련으로 이동하게 됨에 따라 북만에서 활동하던 이들은 하바로프스크 시 근처의 비야츠코에 동남만에서 활동하던 부대는 보로시로프에 야영을 짓고 활동하였다. 이 때 김일성은 북만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참모장 최석천(최용건), 그리고 중국공산당 북만성위 서기 김책 등 그와 함께 '만주파'의 핵심이 될 조선인 유격대 지도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이 시기는 강고한 투쟁의 시기에서는 찾기 어려웠던 개인적 생활도 가능하였다. 김일성은 유격대 대원이던 김정숙과 결혼하여 1942년 2월 16일 장남 김정일이 태어나게 된다. 42년 7월 남북야영의 항일유격대를 동북항일연군교도려(일명 '88여단')로 개편하면서 김일성은 비야츠코로 이동하여 왔다. 그는 교도려의 4개영 가운데 조선인 중심으로 결성된 제1영의 영장을 맡았다. 여기서의 한인 고위 지도자들은 최용건 김일성 김책 안길 강건 등이 있었다. 해방후 김책 안길은 당과 정부에서, 최용건, 강건은 군부에서 김일성의 최고지도자로서의 부상을 도왔다. 조선인 대원의 수는 140명에서 180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측된다.({항일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를 비롯하여 1960년대에 발표된 회상집들에 집필한 사람들과 거론된 사람들을 포함하면 정확히 133명의 이름을 확보할 수 있다. 이들이 이른바 만주파로서 김일성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인적 토대가 되었다.) 1945년 7월말 당시까지 중국공산당에 속해 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분리해 나와 조선 공작단을 건설하였다. 이것은 해방 후 조선에서의 당 건설과 공작사업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김일성이 단장을 맡았다. 김일성 최용건 김책 등이 주축이 된 이 조선공작단에는 대부분의 조선인이 참가하였다. 이들은 소련군과 함께 대일전에 참전하여 일본군을 격파하면서 귀국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조선인 유격대원 가운데 소련군 정찰대에 파견 나가 있던 오백룡 등 일부를 제외하면 고대하던 대일전에 참전하지 못한 채 귀국하여야 하였다. 이들은 1945년 9월 5일 비야츠코에 야영을 떠나 9월 19일 김일성의 인솔하에 원산항을 통해 귀국하였다. ● 조선 공산당 북조선 분국 김일성이 귀국한 후 우선적으로 처리하여야 할 문제는 공산당의 건설이었다. 그러나 이미 서울에는 박헌영을 당수로 하는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어 있었다.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은 박헌영이 조선공산당의 지도자임을 인정하면서 북한만이라도 독자적인 조직을 결성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들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설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분국의 설치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오기섭 정달헌, 이주하 등의 함남 출신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은 서울 당중앙이 있다는 이유로 분국의 설치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미소 양국의 군대가 남북조선에 진주함으로써 지역적 특수성이 생겨났다는 이유로 분국의 설치를 주장하였으며 1945년 10월 13일 평양에서 서북 5도 당원 및 열성자 연합대회를 열어 서울의 당중앙과는 별개의 당기구로서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결성할 것을 결정하였다. 소련은 공산당과 민족주의 세력인 조만식의 조선민주당과의 통일전선 형성을 통해서 북한에 정부를 수립할 구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은 신탁통치 정국이 전개됨으로서 무산된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의 내용을 이루는 신탁통치에 대해 조만식의 조선 민주당은 신탁통치 거부의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합의에 의거한 모스크바 3상결정을 수용하여야 하였고 3상결정의 내용 또한 조선에 민주적 임시정부의 수립을 내용으로 하는 것인 만큼 지지를 표명하였다. 조만식은 소련군과 공산당의 설득에도 3상결정을 받아들이기를 완강히 거부하였다. 조만식은 연금상태에 빠지고 조선민주당의 상당수 인사들이 월남하였으며 궁극적으로 조선민주당을 무력화시키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노동자출신의 민주당원은 공산당으로 이적되었으며 공산당행을 망설이는 인민들을 위해, 민주당과 경합하여 인민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는 정당으로 중도좌파의 이념을 지닌 조선신민당을 결성하였다. 1945년 12월 귀국하였던 연안의 독립동맹 세력들이 조선신민당을 발족하게 하였던 것이다.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결성하였으며 김일성은 그 위원장이 되었다. 이 조직은 사실상의 정부로서 북한 지역에서의 개혁적 과제들을 수행해 나갔다. 이상...
신고 0명
게시물신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