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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특별 88여단...08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40 2021-12-31 03:45:47

08편



※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중국어(원문은)는 빼고 이 원문을 (한글로 번역된글)만 올리겠다.


(한글로 번역)

3. 소련 진영에 결성된 '유격파' 1932년부터 1935년까지 발생한 '민성연대' 사건은 중공의 조선인들에게 큰 피해를 주었지만 공산국가들과 중앙위원회의 실수를 바로잡았다. 중국 공산당 이후에 젊은 북한 간부들이 다시 성장하여 중국 공산당의 전적인 신뢰를 얻었다.  ⑤ ? ? 1936년 이후 동만주변의 조선인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다.  항일연합군 제2군은 조선인이 60%, 지동·난만유격대에서는 조선인이 20~30%를 차지했다.  ?  

제1차 볼리회담 전후에 많은 북한 간부들이 이미 중공 조직과 반동맹에서 중요한 지도적 임무를 맡았습니다. Xi ?? Shan(Xu Hengzhi) 김책,북만성 당위원회 집행위원 및 제3로군 참모총장 역임, 최석천(최용건) 길동성 당위원회 집행위원, 제2참모총장 역임 총사령부 참모장, 제1로군 제2전선군 지역공작부장 겸 정치부장, 제1로군 제2전선군 사령관 김일성 역임 로군과 제1분견대의 대장, 강신태는 제2로군과 북진영 임시당의 정치위원을 역임했다.

※   ( 참조)


①주보중:《동북항일유격일기》,645쪽,《펑쉬루:소련에서 탄생한 동북항일연군교도여단》,《당사박람회》,2011년 12호,2728쪽,
주보중:《동북항일유격일기》,658-^62쪽,《중국공산당조직경자료》(1921-1997번)3쪽,《동북항일유격일기》.88여단의 인원은 1945년 8월 25일 해산 직전까지 1354명 중 중국인 373명, 조선인 103명, 나나이인(극동지역에 사는 허저) 416명, 러시아인 462명이다.

추빌린이 바실레프스키에게 보낸 보고서는 1945년 8월 25일 UAMOPO(러시아연방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 ■42년 9월 길동, 북만성 위원회가 철폐되고 88여단에 중공 동북특별지부국을 설립하면서 중공 동북위원회로 바뀌었다.〈중국공산당사서류〉(1921-1997 )3권,12권,12권,주보,동항일기,663-671권,상견,지화,동명연결:조선공산당사서류,일,사회과학전선,2015년 2차,18권,Chrupe-pepe,Chpepe,Chpe,Chpe510쪽. 《동북지방혁명역사문서집》 가 63,324~325쪽. 1 1


●   《 번역 》

김윤호 남야영 임시당 비서 ,김광만은 제4기 서기 ,김윤호 항일총사령부 경비대 정무위원을 지냈다.

1 이 간부들 중 김성속은 후발주자다. 김일성은 김채영, 최석천, 허형식에 비해 낮은 직무를 맡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어렸지만 감히 나서 잘해서 눈길을 끌었다.

1935년 초, CPC의 동만특위는 보고서에서 김일성을 두 번 언급하면서 "충성스럽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용감하며, 그 고유의 손짓을 하는 행위와 이상할 정도로 잘 웃는다. 게릴라전에서 많은 전쟁 경험을 가지고 있다", "구국군에서 상당한 믿음이 있다", "중국어를 잘한다", "정치적 문제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는 않지만 "사랑의 말", "신앙이 있다"고 말했다.

김일성이 이끄는 게릴라들이 해안을 건너는 곳곳에서 적 경비대를 공격하는 경우가 많다고 1939년 8월 30일 신화저널이 보도했다.

3 김일성이 북한에서 게릴라 활동을 벌이면서 일본인들을 놀라게 하여 그를 잡기 위해 50만엔을 내걸고 흥정하려 했다. 일본의 조선신문이 김일성을 겨냥한 홍보는 김일성의 조선인 중 위상과 인지도를 높였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4 그러나 김일성이 도약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상황과 맞은 우연의 일치로 인해 운이 좋은면도 있다. 일본군의 대규모 징벌이 시작된 직후인 1939년 10월 항일 제1로군은 게릴라 분산, 시켜 소부대로 보존에 나서기로 했다. 1940년 겨울까지 제1로군 피해는 참담했고, 양정우 총사령관이 사망했고, 제2군사령관인 웨이지민 부사령관과 정치부장도 병에 걸렸고, 제1군사령관인 진한장, 제3군사령관인 카오야반, 그리고 많은 간부들이 희생되어 제2군사령관인 김일성()이 장백산(백두산) 밀림으로 전입하여 탈출했다.

5일 일본군 포위의 대피를 위해 김일성이 부대를 이끌고 안두를 거쳐 
1940년 10월 23일 소련으로 건너갔고, 김일성과 그 부하가 국경을 넘어 소련 국경군에 의해 억류된 후 다행히 저우보중(주보중)이 나서서야 해방되었다.

7. 
주보중은 후임에서 '웨이지민"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일성 등이 기회주의적 성격을 취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실수를 다스리는 것은 혁명적 입장이 흔들리고 이들은 잘못을 인정했지만 주보중은 김일성 등에게 징계를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소련 측은 벨리에서 ALU 지도자들을 소집하고 싶어했고, 2, 3로군 군대는 1로군 군대의 '웨이저민'에게 아무런 소식도 주지 않고 도착하거나 연락을 취했다. 
이에 김일성은 소련 내 제1로군 최고 장교와 유일한 대표가 됐다. 소련의 요청에 따라 1941년 1월 1일 김일성, 안길, 서철이 제1로군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10일 제1로군 대표로 참여한 김일성 씨가 제2차 펠리컨퍼런스에 참가한 것은 에이스리그에서 김일성의 위상과 지위향상에서도 관련이 있다.

1941년 7월 1일 왕신림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보중은 김일성은 최고 군사 간부이며 중국 공산당 고려인 동지의 최고 분자이며 최고 능력자이고 동북남부와 오린강동, 북한북부 지역에서 중요한 활동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9월 15일자 서한에서 김일성은 남만 제1로군 1호, 중국 공산당 조직사 자료(1921-1997), 제3호, 제1293-12%, 제1306-1308호, 제1311-1315호, 제1317-1318호, 주보중: 북동쪽

이제 유일하게 중요한 간부인 양정우와 위증민 동지가 사망하였으므로 김일성만이 남만유격대를 지도하는 최고책임을 계속 맡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88여단이 창설되었을 때 김일성은 제1대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에서 복무하기 시작하여 중국공산당 동북특별지부 부서기가 되었다. 그리고 중국공산당 동북당위원회 위원

②이 기간 동안 허형식이 전투에서 사망하고 금와 추석권의 위상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가 독립과 조직기강이 문란해진 상태에서 ③ 88여단의 정치위원으로 임명된 것은 중요 하지 않다.

1943년 1월 추이스취안은 부참모장에서 돌연 해임되어 정계로 진출하였다. 추이스취안이 여전히 중국공산당 동북당위원회 비서직을 유지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그를 불만스럽게 여기는 것은 소련뿐일지도 모른다.

그는 주보중의 신임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소련의 총애를 받았다. 러시아 기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북한 유격대 사이에서 좋은 성적과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러시아 학문의 탁월한 업적". 그의 지휘 하에 북한인으로 구성된 제1대대는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군사 문해력과 군사 규율을 가지고 있다. 엄격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소련 극동군 정보부도 김일성의 우려와 ⑥ 걱정 때문이든 의도적 감시이든 소련이 김일성을 중시하는 것은 자명하다.

김일성을 핵심으로 하는 북한 유격대(게릴라)가 형성되었고, 즉 후대에 등장한 '유격파'가 형성되었다. 이 진영의 주체는 김일성이다. 한국 학자 진광윤(Jin Guangyun)에 따르면 제1대대에는 60명 이상의 조선 간부와 전사가 있었는데, 일찍 사망한 사람들(안길 등)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나중에 한국당이 되었다.

그 중 김일(국가 부주석), 표성철(국가 부주석), 이용호(고위인민위원회 부위원장), 최현(국가부주석)이 유명하다. 국방위원회 의장), 주용진(내각부총리), 우젠유(국방부 주석), 한이즈우(인민군 총정치국장), 쉬제(노동당검토위원장) 위원), 시에(국가검토위원회 위원장), 김경석(노동당 평양시 위원장) 등

⑦ 김일성은 스탈린의 귀환 명령을 받고, 그리고 그가 이끄는 것은 바로 이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음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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