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편
※ 앞쪽에서 말한바와 같이 중국어(원문은)는 빼고 이 원문을 (한글로 번역된글)만 올리겠다.
● 《 번역글 >
88여단의 해체와 독일 패전 후 얄타 비밀협정에 따라 스탈린은 극동으로 눈을 돌렸다.솔킨 1사단 1은 5월 5일 몇달 뒤 시작될 예정인 대일 작전에서 88여단은 극동 제2자 面면군 서열을 편성하고 10만 명의 정규부대로 확장하라는 극동군 사령부의 지시를 저우바오중(주보중)에게 전달했다. 이어 소련군과 상의한 결과 저우바오중(周保中), 장수오(張壽 制定)는 중국 공산당과의 연락 복원, 항일연군 재건, 동북당 조직 복원, 공산당 중앙 정치노선 하에 행동 등을 요구했다.저오바오중의 계획에 따르면, 88여단의 작전 임무는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이미 동북의 소분대에서 유격전(게릴라)을 전개하고, 정찰 임무를 수행하며, 소련군에 협조해 행동하며 대일전 때 소련군이 출동할 때
88여단의 선발대를 파견하여 동북쪽으로 공수하여, 소련군을 위해 전투를 한다.
※ < 참고할만한 >
[ ① "중국동북혁명사문서집" A 61, pp. 337-344. ??
② "중국공산당 조직사 데이터(1921-1997)" 제3권, 1321-1324페이지, 흑룡강성 사회과학원 지방당사연구소 편집: "동북 중국 공산당의 일부 ??당 역사 데이터 인터뷰 및 선택 Zhou Baozhong Gay Album", 1980년 편집 및 인쇄, 6페이지. ??
③리자이데: "송산바람과 눈", p.293, 진유중: "북만유격전에서 지속되는 저항세력", (중국조선사 시리즈 책 편집위원회 편집위원회 _? ?? 중국어 한국어 역사발자국 시리즈(4) "결전"(국문, "방진생의 수운 4침(4): 도사격"), 국립출판사, 1991년판, pp. 259-265. ??
④ "극동질서" 전선군사령부(1943년 1월 27일), UAMOPO>, 238, on.?1620, fl.197, j3?, Zhou Baozhong: "동북항일전쟁 유격일기", ??699페이지 ?.??
⑤?I|AMOPC>, 1896, ?on, ?1, 4, ?, i. 29 ?, ? fl. ? 10, n. ? 2-3.6, Ijoumapie ncrophH ? copctko-KopefftcKHX.oTHomeHHft. 1942년 제88여단 창설 당시 중소청은 김일성 특파원으로 제1대대에 파견됐다. 2014년 7월 25일 중소청의 딸과의 저자 인터뷰 ?
⑦ 자오계유에 : "형제가 부사 4도에 가다: 구수.고희 ■ 구오지윤운", 시디(진광윤: "북한정치사학(1): 당 건설, 나라 건설") 건군', Seoul, Xianren Publishing House, 2003), pp. 116-120. 그러나 저자는 당시 3대대 정치부사령관이었던 Jin Ce를 포함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 ]
● 다시 이어서 본문으로 계속~
① 7월 말, 중공 동북당 위원회는 전체 회의를 열어 정세에 따라 당위를 개편했다. 창춘(長春)에 있는 신당위는 저우바오중(周保中)을 서기로 하고 멤버로는 펑중윈(彭仲雲)·장서우치(張壽 王)·왕샤오밍(王孝明)·펑쉬루(彭施魯)·왕밍구이(王明貴) 등 중국인 외에, 조선인 강신태(姜信泰)(강건)·김광협(金光協) 등 중국인이 참여한다.
아울러 조선공작단도 최석천(최용건,당무 담당) 비서, 김일성(정칟군사 담당), 김책·안길·서철·김일·최현 등 조직원이 재입북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시나리오가 완전히 실현된 것은 아니었다.이 임무를 극동군 사령부와 저우바오중(周保中)이 주도면밀하게 준비했고, 훈련된 88여단 전사도 훌륭하게 수행했다.
소련군은 1945년 7월 하순에 선발된 여단 88여단 290명을 선발 소대(小隊)로 편성해 동북부 18개 지역에 투입, 곧 있을 공격, 정찰에 대비했다.
③그러나 88여단 주력부대의 운명은 정세변화에 따라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일본이 포츠담 선언 수용 거부와 무조건 항복에 따라 1945년 8월 6일 미국이 히로시마에 첫 원자폭탄을 투하했고, 8일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 9일 소련군 150만 명이 세 방향에 걸쳐 중국 동북과 조선에 대거 진출했으며, 같은 날 미국은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15일 일왕이 항복을 선언했다. 갑작스러운 정세 변화와 급속한 발전은 소련으로 하여금 다시 88여단의 앞날을 계획하게 하였다.전후 스탈린의 극동 전략 목표는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가 중국 동북부와 일본해에서 잃었던 모든 권익을 회복하고, 외몽골을 중국 판도에서 떼어내는 것이었다.
중국에서의 목표를 합법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民국민정부와 우호동맹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 소련의 계약조건을 중국에 수용해 소련군과 대(對)일본 작전을 맞바꾸겠다는 스탈린의 본래 의도에 미국도 동의했다.
그러나 중·소 간 외교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 미국이 돌연 원자탄을 투하하면서 태세와 고려가 바뀌었다. 스탈린은 일본이 중국에 항복해 더 이상 소련 출병이 필요 없고 동맹조약도 체결할 필요가 없어지면 모든 극동 구상이 불가능해질 것을 우려해 출병을 앞당겼다.
소련의 대군이 이미 성 아래까지 내려온 상황에서 장제스는 소련이 동북부를 점령한 뒤 발뺌하거나 공산당에 동북부를 넘겨줄 것을 걱정했다. 그래서 타협을 했다.장제스(蔣介石)는 소련의 모든 조건을 수락했고, 스탈린은 중공을 절대 지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동북부 주권은 국민의 정부에게만 이양되었다.
④이렇게 되면 중국 공산당에 있으면서 급조된 연합군과의 연락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소련은 출병 다음 날, 88여단에서 궐기대회를 열었다.전 여단 장병은 격앙되고 강개하여, 일률적으로 소련군과 함께 반공하여 관동군을 소멸시키고 항일전쟁의 최후 승리를 쟁취할 것을 요구하였다. 회의 후 저우바오중은 극동군 총사령관인 바실레프스키(A.asM.asVasilevski) 원수에게 서한을 보내 88여단을 동북쪽으로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김일성도 편지로 그의 첫 주둔지를 북한에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저우바오중(周保中)과 김일성(金日成)은 구두상으로 위로하는 말 외에는 소련군의 공식 답변을 받지 못했다.
⑤이후 며칠 동안 저우바오중(周保中)은 주저 앉아 있다가 베이스캠프와 연락관에게 문의했다. 소련군 사령부는 조령석개(朝令石改)를 거듭하며 미루고 있다. 11일 동강으로 이주를 준비 하라는 연락을 받은 주보중은 12일 "제자리에서 대기하라"는 편지를 보냈고, 15일에도 "제자리에서 대기하라"는 전보를 보냈다. 저우바오중(주보중)은 23일까지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지 며칠이 지나도록 답변을 기다리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⑥이 기간 스탈린은 쑤바오중: 동북항일유격왈기(東北抗日遊格 ?記), 811쪽, 중공 동북지방당사 자료방문록 펑중윈(馮仲雲) 동지 앨범(中共) 157쪽, 펑펑(彭彭) 등 분개 등의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다음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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