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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의 미스테리
Korea, Republic of 돌통 0 220 2022-01-06 22:44:26

미국은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에 관한 주요 정보를 통신 감청을 통해 모두 파악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독일군의 소련 침공, 노르망디 상륙작전, 미드웨이 해전 등 주요 전쟁에 관한 내용을 모두 다 파악하면서 전쟁을 수행했다고 한다.


미국이 통신 감청을 통해 이들 모든 자료를 파악한 상태에서 전쟁을 했음이 밝혀졌다. 
당시 통신 감청했던 자료들이 모두 공개되면서 이들 자료에 입각하여 이미 많은 사람이 연구한 결과다.


여기서의 의문은 6.25전쟁에 관한 것이다.

미국이 6.25전쟁에 관해 사전 알고 있었는가?  이것을 음모론 내지는 수정주의적인 사관이라고 하지만 오늘날 이 같은 관점이 대세인 듯 보인다.

이 같은 음모론 내지는 수정주의 사관을 견지한 한국인에는 이승만 대통령, 초대 외무장관 임병직,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임영신 상공부장관이 있었다.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정보 측면에서 불가사이한 현상,

6.25전쟁에 관해 미국이 잘 알고 있었음을 암시해주는 내용, 통신 감청을 했음을 암시해주는 주요 사건을 언급해보고자 한다.


1) 첫째는 6월 25일이란 날짜다. 1950년 6월 23일과 24일에는 기이한 일이 여러가지 벌어진다. 6월 중순부터 전선에서 한국군 상황을 점검하던 유엔위원회가 6월 24일 철수한다. 마찬가지로 한국군사고문단 단장 대리로 있던 롸이트 대령이 6월 24일 일본으로 출국한다.


 6월 23일 저녁에는 장기간 동안 비상사태를 유지하던 한국군의 비상이 해제되며, 25일에는 많은 장병이 휴가를 떠난다. 6.24일 늦은 시점까지 한국군 고위 장교와 미 군사고문단 요원들이 밤새도록 유흥을 즐긴다.


그런데 6월 16일 북한의 소련대사 스티코프는 6월 25일 새벽에 북한군이 남침할 것임을 모스코바에 보고한다. 이 내용은 다음과 같다.


"6월 16일 스티코프는 북한군의 3단계 남침계획을 모스크바에 보고했다. 토크노프에 따르면 남침계획은 다음과 같다. '공격은 6월 25일 아침에 시작된다. 북한군 부대는 먼저 옹진반도를 공격할 것이며, 그 후 서해안을 따라 주요 공격을 감행할 것이다.

서울과 한강을 점령할 것이다. 동시에 동부 지역에서 북한군은 춘천과 강릉을 점령할 것이다. 적의 주공을 서울 지역에서 포위하여 격멸할 것이다. 작전의 두 번째 단계에서 적의 잔여 세력을 격파할 것이며, 도시와 항구의 점령을 통해 남한의 나머지 지역을 해방할 것이다.

( On June 16, Shtykov sent a three-stage operational plan of attack to Moscow. According to the quotation by Torkunov, the plan was as follows: “The attack begins early in the morning of June 25. KPA units attack first on the Ongjin Peninsula and then launch major blows along the west coast. Seoul is occupied and the Han River seized. At the same time the Eastern KPA liberates Chunchon and Kangnung. Enemy main forces are surrounded and destroyed in the Seoul area. In the final stage of the operation remnants of the enemy army are destroyed and, by the occupation of cities and ports, the remainder of Korea is liberated.”[70])

Haruki, Wada. The Korean War (Asia/Pacific/Perspectives) .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Kindle Edition. "

■    《번역하면》

6월 16일, 슈티코프는 모스크바에 3단계 공격 계획을 보냈다. 토르쿠노프가 인용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6월 25일 아침 일찍부터 공격이 시작되며, 조선인민군은 옹진반도를 먼저 공격한 다음 서해안을 따라 큰 타격을 가한다.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도 점령한다. 동시에 동부 인민군은 춘천과 강릉을 해방한다. 서울 지역에서 적의 주력이 포위되어 파괴된다. 작전의 마지막 단계에서 적군의 잔존은 파괴되고 도시와 항구를 점령함으로써 한국의 나머지 지역은 해방된다.”)

하루키, 와다 한국 전쟁 (아시아/태평양/개인전) . Rowman & Littlefield 출판사. 킨들 에디션. "

~~이어서 계속~    6월 중순부터 6월 24일까지 미 국방부장관 존슨, 합참의장 브레들리, 국무성 보좌관 덜러스, 극동군사령관 맥아더가 일본에서 며칠 동안 비밀 회의를 한 것도 기이했다.


당시 이들은 소련과의 전쟁 가능성을 심각히 논의했다고 한다. 출처: 
Stone, I. F.. 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 1950?1951 (Forbidden Bookshelf Book 10) . Open Road Media. Kindle Edition.    ■   《 번역 》
스톤, I. F. 한국전쟁의 숨겨진 역사, 1950-1951 (금단의 책장 10권) 오픈 로드 미디어. 킨들 에디션.



2) 둘째는 6월 19일이란 날짜다. 6월 19일에도 기이한 일이 목격된다.

1950년 6월 19일 미국은 1949년 9월에 작성한 한반도 전쟁계획을 관련 요원들에게 회람시켰다.

6.25전쟁은 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여기서의 의문은 왜 미국이 6월 19일 이 문서를 관련 부서에 배포했는가란 부분이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시카고 대학의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왜 미 국방성이 1950년 6월 19일 북한군의 남침을 가정하고 있었으며, 부산 교두보로 신속히 후퇴한 후 낙동강에서 방어망을 구축하고는 인천에서 상륙작전을 가정하고 있던 SL-17로 지칭되는 한반도 전쟁계획을 승인하여 회람시켰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있다.


We still do not know why the Pentagon approved and distributed in the week of June 19, 1950, a war plan known as SL-17, which assumed a KPA invasion, a quick retreat to and defense of a perimeter at Pusan, and then an amphibious landing at Inch’?n. )" 이리고  Korea's Place in the Sun(태양 아래 한국의 위치) 란 제목의 책(pp. 259-260)에서 언급하고 있다.?




■   《 번역 》

우리는 왜 1950년 6월 19일에 국방부가 SL-17로 알려진 전쟁 계획을 승인하고 배포했는지 아직도 알 수 없다.(인천상륙작전등)


그런데 이는 1950년 6월 18일 김일성이 북한군 전 부대에 전쟁 준비를 지시했기 때문일 것이다.(출처: Joseph C. Coulden, Korea: The Untold Story of the War, 1983, p. 41)

번역(출처: 
조셉 C. 카넨, 한국: 1983년, 41쪽 전쟁 이야기)

그런데 6월 19일 또 다른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미 군사고문단 대리를 담당하고 있던 롸이트 대령에게 일본으로 떠나라는 명령이 하달되며, 롸이트는 전쟁이 벌어지기 하루 전날 일본으로 떠난다. 마찬가지로 거의 동일 시점에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장군은 미국으로 귀국하면서 롸이트가  대리가 된다.


덜러스를 서울로 모시고 오기 위해 도쿄로 갔던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는 미국으로 귀국하는 덜러스를 배웅하기 위해 재차 도쿄로 갔으며, 후임자가 오기 이전에 미국에서 퇴직하기 위해 도쿄를 떠났다 미 군사고문단장 대리 롸이트는 6월 19일 도쿄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24일 서울을 떠났다.

"KMAG commander Brig. Gen. William L. Roberts, who had gone to Tokyo to escort Dulles to Seoul, returned again to Japan to see him off back to Washington and then left Tokyo for retirement in the United States before his successor arrived. Col. W. H. Stirling Wright, the acting KMAG commander, received orders to go to Tokyo on June 19 and left Seoul on June 24. According to one account, Wright was on leave when the war started.[92])

Haruki, Wada. The Korean War (Asia/Pacific/Perspectives) .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Kindle Edition. " 번역( ("KMAG 사령관 Br. 덜레스를 서울로 호송하기 위해 도쿄로 떠났던 윌리엄 L 로버츠 장군은 워싱턴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고, 후임자가 도착하기 전에 은퇴하기 위해 도쿄를 떠났다. KMAG 사령관 대행인 W. H. 스털링 라이트 대령은 6월 19일 도쿄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6월 24일 서울을 떠났다. 한 이야기에 따르면, 라이트는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휴가 중이었다고 한다.)

하루키, 와다 한국 전쟁 (아시아/태평양/개인전) . Rowman & Littlefield 출판사. 킨들 에디션.
"

3) 1950년 10월 9일 트루먼이 맥아더에게 한반도 도처에서 중공군과 마주치는 경우 싸울 것을 명령한다. 그런데 10월 8일 마오쩌둥은 중공군이 한반도전쟁에 참전할 것이란 사실을 김일성에게 전문으로 보낸다.


4) 1950년 1월 30일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을 허용해주면서 모스크바로 초청할 것이란 내용의 전문을 북한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에게 보낸다. 그런데 그 다음날 트루먼은 아태지역에서 소련과 중국을 동시에 봉쇄해야 할 것이란 내용의 NSC-68 전략문서 작성을 지시한다. 이 문서에서는 당시 120억$ 수준의 미국의 국방비를 500억$ 수준으로 올릴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공산세력과 장기간 동안 치열하게 싸울 필요성을 언급한다. 유럽에 더불어 아태지역에 공산세력을 봉쇄하기 위한 동맹 구축을 언급한다.


5) 1949년 12월 19일 모스크바에서 마오쩌둥이 유소기에게 보낸 전문이다. 이 전문 내용은 중국이 미국을 포함한 자유진영 국가들과 국교를 정상화해야 할 것임을 언급하고 있다. 이 전문을 스탈린이 감청했다. 미중관계 정상화를 매우 우려하고 있던 스탈린이 6.25전쟁 남침을 구상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전문을 본 즉시 스탈린은 북한에 전쟁 준비 차원에서 1949년 12월에 주요 인사를 보낸다.


그런데 1949년 12월 23일 미국은 해외 주재 모든 미 대사관에 대만을 포기할 것이란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마찬가지로 1950년 1월 5일의 트루먼 연설에 더불어 12일 에치슨은 미중 관계를 정상화하는 경우 미국이 대만을 포기할 의향이 있다는 의미의 연설을 한다.  그런데 에치슨 연설은 중국이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가 되는 경우 대만을 중국에 넘겨줄 것인 반면 그렇지 않은 경우 한반도에서 전쟁을 유도할 것이란 의미의 것이다. 



6) 마오쩌둥은 10월 15일에 중공군을 한반도로 투입할 것이라고 수차례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트루먼은 10월 15일 웨이크섬에서 맥아더와의 회동을 요청했다. 당시 회동의 주요 주제는 중공군 참전 문제였다고 한다. 7,000마일을 날아와 트루먼이 맥아더를 만난 것이다. 당시 이들 둘은 1시간 동안 비밀 회동을 했다고 한다.


7) 1950년 6월 16일 북한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는 6월 25일 남침할 것이란 사실을 모스크바에 보냈다. 그런데 6월 18일부터 22일까지 존슨 국방부장관, 브테들리 합참의장, 미 국무장관 특별 보좌관 덜러스, 맥아더는 소련군의 극동지역 전력 등의 문제를 놓고 논의했다고 한다. 이 시점 영연방 국방 고위급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비밀 회담을 했다. 한편 6월 19일 미 국방성은 한반도 전쟁계획인 S-17를 관련 부서에 배포했다. 극동군사령부에 50부를 배포했다고 한다.



6.25전쟁 발발 이전 미 극동군 사령부, CIA, 미 육군 및 공군 등 주요 부서들이 북한군의 동향을 철저히 파악하고 있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북한군 총참모부에도 극동군 사령부의 첩자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더불어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소련의 활동 파악 목적으로 온갖 정보 수단을 동원했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은 당시 한반도가 우선순위가 낮았기 때문에 정보를 제대로 수집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수집한 장보도 제대로 분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

그러나 당시 미국이 모스크바와 지구상 도처의 국가에 파견나가 있던 소련 대사관 간의 통신을 모두 감청했다는 점에서 보면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내용이 소련과 주변국들이 주고 받았던 외교채널을 통한 교신이란 점에서 보면 미국은 감청을 통해 상기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

앞에서 보인 바처럼 6.25전쟁 관련 주요 내용이 외교채널로 전달될 당시 미국은 그 내용에 대응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것을 단순한 우연으로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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