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편
●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 창당
◇ 김일성, 고당에게 「허수아비정당」창당 간청
금의환향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 이 평양공선운동장에서 '환영대회]를 마치고 자신의 고향인 만경대를 찾아가 마을주민들과 함께 기념촬영 했다.
해방 후 북한의 두 지도자 조만식과 김일성은 상당기간은 외형상으로나마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김일성은 수십차례 조만식 선생을 찾아가 대선배에 대한 깍듯한 예의를 갖추면서 건국문제 등을 상의했다.
조만식 선생도 김일성과 그의 가족을 초청해 환영연을 베풀었으나 조선민주당을 창당하라는 소군정과 김일성의 요청을 귀담아 들었다.
그러나 두 지도자의 이같은 협력관계는 처음부터 동상이몽(同床異夢)속에서 진행됐다.
초창기 은밀하게 두 지도자의 관계를 접목시켰던 前(전) 소25군 정치담당관 메크레르 중좌는 『김일센이 겉으로만 조만식을 대선배로 받든 척했을 뿐 자기들끼리 모이면
「반동 영감쟁이 조만식을 죽여야 한다」고 외쳐댔다』면서 『김일센의 이중적 태도는 인민의 신망이 큰 조만식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를 포섭 공작해도 좋다는 양해를 스탈린에게까지 구해놓고 있는 소련군의 분위기를 재빨리 파악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조만식과 김일성의 외형상 관계에 대해 메크레르는 이렇게 회고했다.
『솔직이 털어놓는다면 초창기 나의 주임무는 김일센과 조만식의 거중조정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여러 차례 밀실대좌를 했지요. 그때마다 건국문제 등을 놓고 서로 공명하는 점도 있었습니다. 특히 김일센이 겸손하게 행동하면서 조만식을 위한 발언도 자주하여 조만식이 김일센에 대해 호감을 갖기도 했지요.』
○ 고당과 가까웠던 김일성 외가쪽 인척관계
메크레르의 증언이 계속된다.
『김일센을 어느 정도 신뢰하게 된 조만식은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장 명의로 10월 16∼17일께(정확한 날짜 기억 못함) 저녁 평양시내 「가선(歌扇)」이라는 일본식 요리집에서 김일센 가족들을 위한 환영연을 베풀어 주기도 했지요.
이날 밤 연회에는 김일센과 그의 할머니, 숙부와 숙모, 사촌동생, 그리고 평남인민정치위 간부진, 평양의 종교계·교육계·실업계 등 각계 유지들이 많이 참석했습니다.
나는 즉석연설에서 「김일센 장군은 러시아 코사크의 한 추장으로 볼세비키 혁명 때 적군(赤軍)에 가담해 각 처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여 백군(白軍)을 무찌른 레닌의 추종자 차바예프같은 사람이라고 소개했지요.』
66년 평남민보사(平南民報社)에서 발행한 『고당 조만식』이란 책은 이 연회에서 고당이 김일성을 「전필승(戰必勝), 공필취(功必取) 김일성 장군」이라며 격려했다고 적고 있다.
前(전) 북한노동당 간부 서용규씨는 『조만식과 김일성은 서로 알고보니 기독교 계통 등으로 가족적인 내왕도 상당히 있었다』며 초창기 원만했던 두 사람의 관계를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조만식과 김일성의 외가 강(康)씨 쪽은 기독교 장로교였기 때문에 일제때부터 가까웠지요. 조만식이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金亨稷)의 숭실학교 5년 선배여서 약간 아는 사이라고 합니다.
김의 외삼촌 강진석(康晋石)은 조만식과 같은 교인으로 조의 몇 년 선배여서 잘 아는 사이고요.
또 만경대 칠곡에 가면 김일성이 다녔던 창신학교가 있는데 이 학교는 원래 김,의 외가 친척인 강신애가 세웠으며 설립 당시 조만식이 도와주었다고 알려져 있지요.
조만식은 김일성의 이모·외삼촌 등 어머니 형제들과 가까운 사이였다는 거예요. 이런 배경들이 조만식과 김일성의 관계를 한층 부드럽게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徐(서)씨의 이같은 증언에 대해 고당 선생의 부인 전선애(田善愛)여사(89)는 『선생이 김일성의 아버지와 외가 강씨 쪽과 교회일 등으로 교분이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면서 『서울에 와서야 월남한 기독교 인사들로부터 김,의 외가쪽도 기독교 집안이라는 말을 들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어쨌든 소련군정은 민족주의자 조만식과 자신들이 후원하는 공산주의자 김일성의 협력관계를 만드는 것이 북한에 공산주의 체제를 이식시키는 첫 과제였다.
조만식과 김일성이 본격적으로 접촉을 벌이기 시작한 것은 조선민주당 창당을 둘러싸고 부터다.
1945년 10월 15일 오전, 만경대 위 구(舊) 평남도청에 자리잡은 소25군사령부에서는 소군정의 실력자들이 모여 중대한 회의를 하고 있었다.
◇「공산당원은 전면에 내세우지 말라」지시
이 자리에는 소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 민정사령관 로마넨코 소장, 정치국장 이그나치프 대좌 등 4명이 참석했다.
이들 중 치스차코프 사령관만 순수 군인일뿐 나머지 3명은 노련한 정치군인이었다.
이 회의가 있게 된 경위와 회의 내용에 대해 레베데프 장군은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우리는 전날(10월 14일) 「소련군 환영대회」를 평가하면서 향후 대책을 논의했지요. 참석자 대부분이 북한지역의 공산당과 보안대 등이 아직 일천하고 미미해 민심에서 이반되는 경우까지 있다고 했습니다.
이 영향으로 소련에 대해서도 점점 소원해가고 있다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참석자들 상당수가 북한지역 공산당의 조직과 활동에 대해 그리 탐탁치 않게 생각했지요.
그걸 좀 바꿔 보려는 것이 이 회의의 목적이었어요. 참석자들은 2시간여 동안 토의 끝에 하루빨리 공산당과 대립되는 동등한 자격의 정당을 조직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이것이 곧 북한에서도 소위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니까요.』
레베데프 장군은 『이 회의의 배경에는 당시 본국의 당중앙에서도 아직 공산당원은 절대 정권 전면에 부상시키지 말고 민족·민주진영의 인물을 내세우라는 지시가 계속 내려오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레베데프 장군은 빛바랜 수첩을 꺼내면서 『1945년 12월 1일 현재 북한지역의 공산당원은 4,000명 미만이었지만 창당 1개월이 채 안된 조선민주당 당원수는 5,406명이었다』고 밝혔다.
소련군정 지도부는 이같은 민주당 창당의 필요성에 대해 은밀히 내부 결정을 해놓은 뒤 김일성을 통해 고당에게 정당을 조직하라고 권고했다.
해방 당시 조만식 선생의 측근으로 활동했던 박재창(朴在昌)씨는 민주당 창당을 둘러싼 고당과 김일성의 관계를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 최용건(崔庸健)·김책(金策)을 추천하며 발뺌
『45년 10월 20일께로 기억됩니다. 김일성이 평남인민정치위원회로 찾아와 「선생님, 공산당도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선생님을 지지하는 대중을 결집시켜서 좋은 정당을 조직하시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소련의 희망입니다. 선생님이 정당을 조직하면 저도 도와 드리겠습니다.』
김일성의 간청을 받은 조만식은 공산당과 대립, 또는 동등한 자격의 정당을 조직하는 문제를 놓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고당이 정당 조직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국토가 분단된 상태에서 북한만의 조직밖에 되지 못할 반신불수의 정당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과의 연락을 유지하고 각 지역의 정보 수집에 힘쓰면서 시국의 추이를 면밀히 검토할 끝에 아직 독자적인 정당을 조직할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박,씨의 증언이 계속된다.
『선생님의 주위 참모들이 「소련에 대한 외환(外患)은 다음 문제로 하고 우선 공산당과 적위대에 대한 내환(內患)부터 막기 위해서는 이들에게 대항할 세력의 결집체가 필요하다」고 건의했습니다. 이 건의가 선생님의 귀를 아프게 했던 거지요.』
박,씨의 증언.
『선생님이 정당 조직을 재고하고 계실 때쯤 김일성이 다시 찾아와 「선생님이 정당을 만드시고 친히 당수가 되신다면 저도 입당해 소련군정과의 가교역을 맡아 선생님의 일을 도와 드리겠습니다」면서 속마음까지 털어놓더군요.』
이렇게 하여 고당은 조선민주당 창당을 결심했고 창당준비가 착착 진행되던 45년 10월말쯤 김일성이 다시 고당을 찾아가 본색을 드러내 놓았다.
박,씨의 증언.
『선생님의 묵시적인 지시에 따라 김일성을 부당수로 내정하는 등 당직자 인선에 착수하고 있었을 때였지요. 김일성이 선생님을 찾아와 「선생님, 정당준비가 잘 진행중이니 축하합니다.
저 혼자 곰곰 생각해보니 저는 선생님 정당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소련군 사령부를 배경으로 공산당과 민주당의 마찰을 방지하고 중간 조정 역할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 대신 선생님의 오산학교 제자인 최용건과 김재민(당시 김책의 가명)을 추천하겠습니다. 이들은 저 못지 않게 능력 있는 인물들입니다」이렇게 말했던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조만식은 약간 당황했다. 고당은 조선민주당 창당에 김일성이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태도 돌변이 수상했기 때문이다.
전, 북한 외무성 부상 박길용 박사는 『김일성의 갑작스런 막판 태도 돌변은 소련군정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12월 중순으로 예정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책임비서를 맡기로 내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하여 조선민주당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정세 속에서 1945년 11월 3일 평양시내 일본인 중학교 교정에서 역사적인 창당대회를 갖게 된다. 거르나 소련군정과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조직을 비밀리에 뻗쳐가고 있었다.
이상 ~~ 제 9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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