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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팩트)일 수 밖에 없는 북한 초기역사 증언..5편
Korea, Republic of 돌통 0 268 2022-03-29 19:31:04

05편


※  {  사실 북한 역사나 사실등은 전문가라도 알기 어렵다. 그래서 추상적이고 예측적이고, ~일것이다. 등 한계가 있는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미화나,우상화하기 좋아하는 북한측 의견이나 주장을 그대로 믿기도 어려운게 현실이다.  그러나 이번 글은 (북한 수뇌부이자,핵심층이었고,고위층이었던 
한 인물이 당시 직접 보고 들은 사실들의 증언이자 이야기다.)  물론 김일성 측근이기도 하다.

1943년 부터 1958년경 까지의 북한의 역사~특히, 북한의 저명한 문화,예술인등의 삶,숙청등의 내용이 많다.  

분명한건 적어도 여기 글의 내용은 100% 팩트 라고 자부하며 또 믿어도 된다고 확신,확신한다.

●   북한 문화선전성 제1부상 '정*진'씨의 증언 내용..  저 윗부분의 파란글자인  "한 인물이"~~바로 문화선전성 제1부상이었던 《정*진》씨의 증언이다.


●   
고려인 428명이 각 부처 부()책임자 맡아


당시에는 어딜 가나 고려인(소련 출신 조선인)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정*진(鄭*進)의 회고다.

『소련 군정 당국은 고려인 428명을 데려와 각 부처의 제1부()책임자 자리에 앉혔습니다. 어느 부서나 그 부서의 2인자는 반드시 고려인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든 일을 반드시 소련 군정 
당국에 보고해야 했고, 소련 군정은 이들을 통해 북한을 통제했습니다.

북한 주둔 소련군 정치위원 "슈티코프 대장"은 우리 고려인들을 모아 놓고 「여러분들의 역할은 말할 수 없이 중요하다. 여러분 하나하나가 1개 사단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칭찬했습니다. 김일성(金日成)은 「동지들의 도움이 없으면 내가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해방 당시, 일개 소련 해군 육전대 특무상사에 불과했던 정*진(鄭*進)은 문예총 부위원장, 김일성 종합대 노문학부장, 문화선전성 제1부상 등을 거치면서 북한 문화예술계의 실력자로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로서는 드물게 대학에서 문과교육을 받았고, 문예에 관심이 깊어 일찍부터 카프문학 등 조선의 현대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 발탁의 이유인 것 같습니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가 열렸다. 흔히 말하는 「남북협상」이었다. 그는 김구와 홍명희(洪命熹)를 가까운 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한눈에 김구(金九)는 「정치갯, 홍명희(洪命熹)는 「애국문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남북협상은 성과 없이 끝났다. 김구(金九) 일행은 서울로 출발하기 전 기자회견을 했다. 정*진(鄭*進)은 그 자리에 있었다.

◇   
김구(金九)의 오판



 

 『한 기자가 「북조선에 대한 인상이 어떻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김구(金九) 선생은 「친일파 청산이 마음에 든다」고 하시더군요. 기자가 다시 「북조선에서 사업하면 어떻겠느냐?」고 묻자 김구(金九) 선생은 「북()은 제대로 되어 가는 것 같은데 남()은 그렇지 못하다. 거기에 내가 할 일이 있다. 더 많은 백성들이 살고 있는 남()에 가서 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김구(金九)와 함께 평양으로 올라갔던 홍명희(洪命熹)는 북()에 남았다. 후일 홍명희(洪命熹)는 정*진(鄭*進)에게 자신이 북한에 남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남조선에서 친일파가 날뛰는 것이 보기 싫었습니다. 반면에 북조선에서는 친일파들을 청산하고 일련의 개혁을 실시했습니다. 남조선의 이승만은 미국에서 편안하게 살면서 공부했지만, 김일성 장군은 총을 잡고 만주벌에서 항일투쟁을 했습니다.

내게 중요한 것은 「민족주의냐, 공산주의냐」가 아니라, 「애국자냐, 아니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북조선을 택한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   홍명희 (
洪命熹)

1948년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홍명희(洪命熹)는 북한 초대 내각의 부수상이 되었다.

『공산주의자도 아닌 양반계급 출신의 대표적인 인물이자, 최남선(崔南善)·이광수(李光洙)와 더불어 조선 3재()(재) 가운데 하나로 일컬어지던 홍명희(洪命熹) 선생이 북한 정부의 부수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남한의 문화예술인들에게 충격이었습니다.


작곡가 김순남(金順男), 영화배우 문예봉, 만담가 신불출 등이 월북한 것은 홍명희(洪命熹) 선생의 영향이 컸습니다. 참 어질고 착한 분이었는데, 결과적으로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홍명희(洪命熹)는 명목상으로는 교육과 문화 부문을 총괄하는 부수상이었지만, 실권은 없었다. 문화선전성의 관리들이나 문화예술단체 관계자들은 홍명희(洪命熹)를 찾지 않았다.

북한에 들어온 후 홍명희(
洪命熹)의 「임꺽정」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던 정*진(鄭*進)은 1952년 문화선전성 제1부상(차관)이 되자, 홍명희(洪命熹) 부수상실을 자주 찾았다.

  『홍명희 선생은 착하고 어진 분이었습니다. 내가 부수상실로 찾아가면, 선생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 나오면서 내 두 손을 잡고 인사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정 부상 동지, 감사합니다. 나를 찾아 주시는 분은 정 부상 동지뿐입니다」』

정*진(鄭*進)은 한번은 홍명희(洪命熹)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과거 우리 조선의 양반들이 전부 선생님처럼 어질고, 성실하고, 착하고, 모든 면에서 아름답다면, 나는 양반계급을 절대 지지하고 존경하겠습니다』

홍명희(洪命熹)는 그 말을 듣자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정 부상 동지, 양반들이 전부 그랬더라면 임꺽정이 나타날 수 없었고, 나의 소설 「임꺽정」이 나올 리도 없었겠지요』


 배를 젓고있는 오른쪽 '김일성'. 왼쪽은 '홍명희'

다음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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