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후 김일성이 귀국 후 자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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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의 귀국직후 빨찌산을 활용한 정보수집1) 원산에 들어온 김일성은 소련의 전폭적인 후원 속에 지방조직에 착수하면서 소련과 직접 연결되는 빨찌산의 하부조직을 뻗어간다. 김일성은 원산에 도착한 직후 함께 온 빨찌산들을 각 지방에 파견한다. 金一(김일)을 평북으로, 박성철·최은국 등을 함북으로 파견, 지역 사정을 소상히 파악토록 지시한다. 서용규씨의 증언-. 『김의 이러한 조치는 소련군과의 약속이나 묵인 하에 했든, 지시를 받아서 했든지 간에, 김이 독자적으로 추진한 것입니다. 소련군이 김일성의 심복들에게 직접 이같은 지시를 내렸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요는 소련측의 지원 하에 나름대로 「집권구상」을 가졌던 김일성이 이의 일환으로 자신의 심복들을 지방에 파견했다는 얘기다. 전 북한 내무성 副相(부상) 姜尙昊(강상호)씨(83·러시아共(공) 페테르스부르크 거주)의 증언은 보다 실감이 난다. 『46년 초쯤인가 김일성이 자신의 집으로 나를 초대하더군요. 그 자리에는 文日(문일)부관도 있었지요. 김은 「빨찌산이 해방전에 참전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면서「원산에 도착 즉시 북한 전 지역의 정세파악에 들어갔었다」고 하더군요. 』 강씨의 증언은 계속된다. 『김일성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그래서 金策(김책)을 함흥으로, 吳振宇(오진우)를 회령으로,崔賢(최현)을 혜산으로 급파해 지방사정을 파악토록 지시했지..」라고 말한 것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김일성은 이를 위해 원산에서 했듯이 빨찌산 핵심들을 북한 전역으로 파견했다.김일성 자신도 「김동환」등의 가명을 써가며 「민정시찰」을 했다. 전 소 25군 정치담당관 메크레르 중좌는 『9월 중순께 상부로부터 김일센이 평양에 도착하면 그를 데리고 각 지방에 다니며 주요 인사들에게 소개하라는 지시가 떨어지더군요』라고 증언하고 있다. 김은 지방에게 내려가는 빨찌산들에게 구체적이고 치밀하게 지시를 내렸다. 무엇보다도 민족주의자, 기독교 인사, 국내파 공산주의자 등 다양한 계층으로 섞여있는 당시 북한 상황에서 김이 내린 지시는 「의미」가 있다고 파악된다. 김일성은 원산에서의 체류일정을 끝내고 고향 땅 평양으로 입성한다. 김은 이곳에서 소련군의 지원 아래 김책·최용건·안길 등 빨찌산 핵심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집권구상을 펼쳐나갔다. 이 당시 김일성이 가장 역점을 둔 대목은 공산당 창건 준비와 이에 대비한 인재발굴이었다. 서용규씨는 『김일성이 내린 임무는 지방의 당 조직 착수, 노동계급 속에서의 새로운 인재 발굴, 기술자·전문가 발굴 및 추천, 지방의 실태 파악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말한다. 서씨의 증언은 계속된다. 『노동계급 속에서 새 인재를 발굴하는 과제는 평양학원 입학 추천으로 추진됐죠. 이 학원은 45년 10월 18일 개교, 11월 중순에 1기생을 배출합니다. 바로 이들이 지방에 내려간 빨찌산들이 추천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거죠.』 평양학원 1기생은 정치반 84명, 군사반 1백여명 등 모두 2백여명 정도가 배출돼 북한사회의 핵심간부로 등장한다. 이 학원의 군사반은 46년 2월 보안간부훈련소로, 그 뒤 정치반은 중앙당 학교로 각각 개편된다. 이들은 6·25때 정치군관으로 참전, 상당수가 전사했다. 김일성은 이들 학원이나 훈련소를 보다 내실있게 하기 위해서는 빨찌산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 기술자등 전문가를 확보하는 데 치중한다. 서씨의 증언-. 『김일성은 일제 때 학병을 나갔거나, 해군으로 복무했거나, 비행기 조종사로 근무했던 사람들을 찾는 데 역점을 두었죠. 지방에 내려간 빨찌산들이 이런 사람을 찾으면 소개장을 써서 김일성에게 보냈습니다. 그러면 김일성은 「당신은 보안간부훈련소(평양)에 가서 무엇을 가르치시오」, 「당신은 수상 보안간부훈련소(남포)에 가서 이것을 가르치시오」, 「당신은 비행보안간부훈련소(신의주)에 가서 조종술을 가르치시오」라는 식으로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서씨는 『지방에 내려간 빨찌산들의 숫자는 공식적인 자료는 없으나 林春秋(임춘추) 등의 말을 종합해 볼 때 60명쯤』이라며 『이들은 48년 2월 조선인민군이 창설되기 직전에야 거의 전원 평양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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