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편
◇ 홍명희(洪命熹), 납북된 이광수(李光洙) 간병
월북화가 정종녀
6·25 당시 수많은 문인과 예술인들이 납북되었다. 문화선전성 제1부상이던 그는 안전계통(정보기관)에 근무하던 소련 고문들로부터 김동환(金東煥), 이광수(李光洙) 등 그가 젊어서부터 존경했던 문인들이 납북되어 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들을 만나 볼 수는 없었다.
『그들은 전쟁포로처럼 납치되어 온 처지였고, 사회안전성의 관리 아래 있었기 때문에 만나볼 수는 없었습니다.
이광수(李光洙) 선생에 대해서는 부수상으로 있던 홍명희(洪命熹) 선생으로부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홍(洪)선생께서는 「김일성(金日成) 수상에게 간청해서 春園(춘원)을 15일 동안 우리 집에서 묵게 했다」고 말씀하더군요. 그때 춘원(春園) 선생은 폐결핵을 앓고 있었는데, 홍명희(洪命熹) 선생께서는 지극정성으로 간병했다고 합니다.
결국 춘원(春園) 선생은 얼마 후 병사했습니다. 김동환(金東煥) 선생에 대해서는 나중에 「평양의 어느 신문사에서 교정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북한이 전쟁 중 문화예술인들을 납북해 간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이렇게 추측했다.
『안전계통에 있던 사람들로부터도 문화예술인들을 납치해 간 이유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다만, 그들을 납치해 재(再)교양시켜 공산주의 건설에 활용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요?
예컨대 북한 정권은 국회의원 등 납북 정치인들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를 만들었습니다. 여기 소속된 인사들에게는 사무실과 비서들까지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남한 국회의원들과의 만남을 요구하고 나오자, 김일성(金日成)은 그들을 숙청했습니다. 납북문화예술인들도 그런 식으로 활용하려 한 것일 수 있습니다』
남로당파에 이어 1955년 소련파에 대한 숙청이 시작됐다. 월북(越北) 문화예술인들과 가깝게 지내던 정*진 (鄭*進)에게 시련이 닥쳤다.
1955년 9월, 그가 북한 문화예술단을 이끌고 소련 순회공연을 하고 돌아오자, 「사회과학원 과학도서관 관장」이라는 직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좌천이었다.
1955년 10월22일, 그는 박창옥 부수상, 기석복 인민군 중장, 박영빈 당중앙위 조직부장, 전동혁 참사관 등과 함께 노동당 정치위원회에 출두했다.
『그 자리에서 김일성(金日成)은 「당신들에게는 왜 주체가 없느냐?」고 다그쳤습니다. 북한에서 「主體(주체)」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나흘 후 노동신문에 「주체」에 관한 논문이 실리더군요.
6·25 와중에 「이제 김일성(金日成) 동지에게 元帥(원수) 칭호를 줄 때가 되지 않았나?」라는 스탈린의 지시가 있은 후 원수(元帥) 칭호를 사용했던 사람이 「주체」라니…』
정*진 鄭尙進의 초청으로 북한에 와서 북한미술에 많은 영향을 준 변월룡 화백.
9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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