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 ‘김일성 사망 직전 부자지간의 암투 120시간’
김일성 ~ “그런 식으로 일하려면 최고사령관이고 조직비서고 싹 그만두라!”
김정일 ~ “통일, 통일 하는 놈들은 다 노망난 것들이야!”
● 1994년 7월3일, 김정일 측근의 대동강 초대소 비밀회합
● 7월 초, 김일성 묘향산행 수행명단서 주치의·의료설비 삭제
● 7월6일 묘향산, 김일성의 분노 “언제부터 쌀 배급이 중단됐나”
● 7월8일 새벽2시, 구급헬기 추락…김정일이 지닌 권총의 의미는?
● 7월8일 낮, 김일성 묘향산 집무실 압수한 김정일 측근들
● 김일성 호위담당 1호총국 고급군관, 김정일 저격 시도
● 권력 위의 권력, 김정일의 여자 ‘옥이 비서’
● 김달현, 김정일·연형묵과의 노선투쟁서 패배하고 자살
하나의 절대권력이 막을 내리기까지는 수많은 징후와 징조가 있게 마련이다. 또한 막을 내리고 나서도 가볍지 않은 잔향을 남기게 마련이다. 1994년 여름 김일성 사망을 전후해 북한의 세습체계는 겉으로 보기에 아무 이상 없이 작동하는 것 같았지만, 평양 권력핵심부는 급격한 권력투쟁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음은 더는 비밀이 아니다.
말년의 김일성 주석은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분주히 준비하던 가운데 김정일 당시 당조직비서와 마찰을 빚었고, 급기야 7월8일 새벽 묘향산 초대소에서 여러 가지 의심스러운 정황 속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신의 죽음’을 앞에 둔 북한 주민들이 당혹스러워하고 있을 무렵, 평양의 핵심 권력층에서는 후계체제를 굳건히 하려는 김정일 비서와 이에 반기를 든 1호 호위총국 등 김일성 충성파,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죽음에 의문을 품은 김 주석의 딸 김경희 등이 갈등을 빚는다.
김일성 사망 직전인 7월 초부터 7월8일까지의 상황, 사망 직후 평양 권력 핵심부에서 벌어진 일들을 소상히 기록한 문서를 정부에서 입수한 사실은 다 알것이다. 수기를 작성해 보내온 인물은 수년 전 북한을 벗어나 해외에 머물고 있는 전 평양 핵심 관료다.
1994년 무렵 김일성 주석의 경호를 담당한 1호 호위총국에서 업무를 맡아 최고위층 인사들과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던 그는, 이때의 상황을 면밀히 파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탈북 인사들과 관계기관의 자료, 정부 당국자 등 다양한 경로로 파악해본 결과 그가 설명한 자신의 경력은 대부분 사실로 확인됐다.
● 김정일에 비해 김일성에 우호적
이 탈북 관료는 수기에서 당시 인민군 차수 리을설 원수 등 김 주석 생전의 핵심 측근과 그를 호위하던 1호 총국 관계자들의 관점을 중심으로, 김 주석이 사망하기 직전 그와 김정일 비서 사이에 빚어진 갈등의 실체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 국내외 정보 당국에 보고된 바 있으며 최근에는 북한 내에서도 떠돌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른바 ‘김정일의 김일성 살해설’(‘**아’ 200*년 *월호 146쪽 ‘평양발 *문서, ‘김정일 김일성을 죽이다’ 기사 참조)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밝혀진 것은 없지만 의구심을 가질 만한 여지는 있다’며, 몇 가지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또한 김 주석 사망 직후 그를 호위하던 1호 총국의 고급 군관이 김정일 비서 저격을 시도한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도 기록하고 있다.
최근에 북한을 벗어난 상당수 인사의 시각은 김정일 위원장에 비해 김일성 주석에 대해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편이다. 이 수기 또한 전체적으로 그러한 맥락으로 읽힌다. 상대적으로 경제개방·개혁이나 통일문제에 진취적인 아버지와 폐쇄적인 사회주의 유지를 주장한 아들 사이의 이념차이가 갈등의 뿌리였다는 분석이다.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체제의 생존을 위해 고민하던 김 주석은 이미 아들에게 집중된 권력을 일정부분 회복하고자 남북정상회담 등 통일문제를 계기로 삼으려 했고, 김정일 비서는 이에 극력 반발해
갈등이 극대화 됐다는 것이다.
이 갈등의 실체와 권력투쟁의 세부사항을 꼼꼼히 기록한 수기의 전문을 살펴보면. 독자에게 생소한 북한식 표현은 일부 수정했으나, 글의 흐름이나 구성, 문장 내용 등은 가능한 한 원문을 그대로 살렸다.
◇ 1994년 7월7일 묘향산 초대소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나
1994년 7월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일성이 갑작스레 사망하자, 세계 언론계는 이에 대해 의혹과 여러 가지 설을 제기하며 김정일을 주시했다. 마치 그 시선을 온몸으로 느끼기나 한 것처럼 김정일은 장례 100일제를 발표하고 직책 후계를 3년간 사양함으로써 최대의 효성(孝性)을 시위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김정일은 아들로 볼 때는 효자이며 정치인으로 볼 때는 수령에게 누구보다 충실한 혁명동지이고 전사라고 극구 찬양받기도 했다. 그의 피 색깔이 정말 이렇듯 진하고 뜨거웠을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노동당 총비서는 영원히 김일성”이라고 선언한 김정일의 말은 과연 진심이었을까.
북한 주민들은 김일성을 인간으로 생각지 않았다.수십년 동안 북한 노동당 선전부로부터 김일성 신격화 교양을 받으며 살아왔기에 김일성을 정말로 ‘영원한 신’인 줄로 착각했던 그들은 김일성의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그도 한 생만 살게끔 태어난 인간임을 알았다. 그때 세계는 전 주민이 ‘아버지!’ 하고 김일성을 애절하게 찾으며 우는 7월의 북한을 보고 놀라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소란스러운 7월에 평양의 최고 고위층은 대성통곡을 할 수 없었다. 김정일의 눈치를 살피며 슬픈 표정을 유지했을 따름이었다. 별 네 개짜리 인민군 차수이자 김일성의 빨치산 동지였고 그의 호위를 책임지는 호위총국장이던 "리을설"은 영결식장에서 침통한 얼굴로 김일성의 시신만 바라볼뿐 눈을 들어 김정일을 마주보려고도 하지 않았다.무엇이 불편해선지 그는 김정일과 함께 서 있어야 할 그 옆 자리를 피해 구석진 곳에서 혼자 한숨짓기도 했다.
이 시기 북한 주민들은 평범한 일상을 유지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이 김일성 백일제 기간에 술을 먹거나 사우나를 했다는 이유로, 혹은 비장한 추도가 외에 다른 노래를 감상했다는 이유로 직위에서 해임되거나 출당되어 반혁명 분자라는 누명을 쓰고 산골로 추방당했다. 이렇게 온 나라에 슬픔만이 강요되고 국가안전보위부나 사회안전부, 사법검찰이 사상검토 차원에서 매 개인의 정서상황을 매시 매분마다 예리하게 감시하며 체크하던 그때에, 호위 총국장 리을설은 차수라는 계급에 걸맞지 않게 주위의 시선은 개의치 않고 밤낮으로 혼자 술을 마셨다.
김일성의 호위사업을 평생토록 맡아오며 차수, 후에는 원수로까지 출세일로를 걸어온 그 늙은이의 충성심이 고작 술 한잔이었을까. 그는 기필코 자살도 선택했을 전형적인 충신이었으며 또 그래야만 김정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었겠지만, 모종의 압력 속에 통제받는 몸이 되어 있던 까닭에 쉬이 죽을 수도 없었고 그래서 더욱 타는 속을 술로 식혀야 했을 것이다.
반면 다른 고위층 인사들과 달리 김정일의 최측근 인사들은 주위 사람들이 격분할 만큼 막무가내였다. 카메라나 사람들 앞에서 마지못해 손수건을 눈가에 몇 번 가져갈 뿐, 일단 휴게실에 들어와 앉으면 마치 김일성의 죽음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처럼 새롭게 시작될 김정일 정권의 번영에 대해서만 공상적으로 한담을 나누었다.
북한의 체제를 생각할 때, 더욱이 김일성의 시신이 놓여 있던 상황임을 생각할 때 너무도 태연하다 못해 무엄한 언행이었다.
하기야 김정일 본인부터 김일성 사후 3일 만에 얼굴을 웃음으로 바꾸지 않았던가. 대외적으로 김정일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은 슬픔을 도무지 감당하기 어렵다며 “원래 우리 조상전래의 제(祭)는 3일제지만 그 3일이 너무도 짧다”고 했다. 그러면서 “수령님은 죽어서 간 고인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영원히 계시는 현재형임으로 그런 의미에서 3년제를 치르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정작 자기는 3일 만에 공개 석상에서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그날은 김정일이 평양시 장례연도 행사에 쓸 김일성의 대형 영정이 완성됐다는 보고를 받고 수행성원들과 함께 현장으로 간 날이었다. 초상화의 김일성은 한껏 웃는 모습이었다. 이십리 바다를 가로막고 완공된 서해갑문을 바라보며 통쾌해하던, 그야말로 일생 가운데 가장 기뻐하던 순간을 담은 모습이었다. 장례영정으로 그렇게 환히 웃는 모습을 택한 것은 이를 통해 ‘김일성은 영원히 살아 있다’는 말을 실감나게 부각시킬 수 있다는 아이디어 때문이었다.
김정일은 이 초상화를 앞에 두고 “수령님은 웃을
때도 참 미남”이라면서 호탕하게 소리내어 웃었다. 또한 미술가의 수완에 계속해서 경탄하고 오래오래 심취해 있었다. 마치 김일성이 죽은 지 3일밖에 안 됐다는 사실을 감감 잊은 듯한 모습이었다.
김일성의 영생을 만들어가는 김정일의 혁명적 의리와 도덕을 강조하는 북한 당내 문헌 영화에서 이장면이 구체적으로 공개되자, 당시 통곡과 눈물만을 물고 살던 당 내외 인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시기 김정일은 “자신과 똑같은 위대한 수령, 위대한 후계자를 두고 가기 때문에 수령님께서는 가시면서도 만족하게 웃을 수 있다”는 식으로 선전자료를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이렇듯 김일성의 죽음을 마주한 김정일의 마음은 결코 무한한 허탈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를 깨끗이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