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팩트)일 수 밖에 없는 북한 초기역사 증언 10편..마지막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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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편. (마지막편) ※ 1955년 평양 비행장에서 소련문화대표단을 맞아 환영사를 하는 정**(鄭**). 오른쪽으로 두 번째가 허정숙(許貞淑) 문화선전상이다. 소련으로 돌아온 정**(鄭**)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출두했다. 공산당에서는 모스크바에서 대학원에 다니든지, 아니면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타슈켄트의 고급당학교에 입교하든지 택일하도록 요구했다. 『모스크바에서는 방 한 칸짜리 집에서 살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가족들과 함께 그런 집에서 살기는 어려울 것 같아, 타슈켄트의 고급당학교 입교를 택했습니다. 당학교 기자부에 다니는 동안 매월 학비조로 320루블을 받았습니다. 당시 소련 부상(副相)(부상·차관)들의 월급이 그 정도였습니다』 1961년 고급 당학교를 졸업한 후, 정**(鄭**)은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 있던 고려인 신문 「레닌기캣에 입사(入社)(입사)했다. 이후 그는 「레닌기캣의 문화부 담당 기자, 특파기자, 논설위원 등으로 활동하는 한편, 문학 평론가로 활약했다. 1991년 「레닌기캣는 「고려일보」로 제호를 바꾸었다. 그는 「레닌기캣라는 제호로 신문이 나오는 마지막 호인 1990년 12월19일자 「레닌기캣에 『「레닌기캣 독자들과의 작별』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썼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소련제국이 붕괴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고려인 강제이주 때 이미 「소련은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저는 소련연방의 붕괴까지는 원치 않았습니다. 소련이 자유롭고 민주화된 나라가 되고 그 나라에서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었죠.
◇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은 청진 전투』 정** 옹과 헤어지기 전, 「북한에서 만났던 사람들 중 다시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정**(鄭**) 옹은 지긋이 눈을 감았다. 『역시, 허정숙 상(相)이 가장 보고 싶습니다』 뜻밖이었다. ―선생님이 북한을 떠나올 때, 그렇게 쌀쌀맞게 대했는데도 허정숙(許貞淑)이 보고 싶습니까. 『1980년 모스크바에서 북한에 있을 때 친구였던 박길룡 당시 북한 외교부 부부장(차관)을 만났더니, 「허정숙(許貞淑) 동지가 안부를 전하더라. 불쾌한 일이 있었으면 잊으라고 하더라」고 전하더군요. 「착한 말 한마디가 병을 치료한다」는 러시아 속담이 정말 맞더군요. 박길룡의 그 한마디에 서운했던 감정은 사라졌습니다』 ―90세가 되어서도 그렇게 정정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40년 동안 매일 아침 1시간씩 아침체조와 달리기, 걷기를 했습니다. 자기 전에는 꼭 찬 우유를 한 잔씩 마셨습니다. 음식은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습니다. 무엇보다도 원수가 없어야 합니다. 저는 남이 저를 나쁘게 말해도 흘려듣고, 나서서 해명하려 애쓰지 않습니다』 ―선생님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그는 지긋이 눈을 감더니 이렇게 말했다. 『역시 청진 전투였습니다. 그때를 제외하면, 나는 남을 위해 내세울 만한 일을 한 것이 없습니다』 이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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