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금포 작전 기습 전투..{ 1 } 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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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기전에... 《 1부》 ※ [ 너무나도 모르는 우리나라 역사이다. 이 사건이 북침설 빌미가 되자 70년 동안 입도 뻥긋 못하다 이승만 건국대통령 만드느라 사건 왜곡해 훈장 수여하는 이벤트까지 벌인 것으로 알려졌음. 로버츠의 배가 아니고 요트. 북한 애인 만나러 올라갔는데 미군 요트 찾아주느라 해병 병력의 2/3을 동원한 미친 짓을 저지른 것. 우리 측 피해는 제대로 밝히지도 못한 사건. ] 1949년 8월 17일 북한 몽금포 항구 기습작전 참가 지휘관들에게 훈장을 수여한다는 기사가 실렸었다. ■ 발단 해방후 정부수립 1주년 기념 관함식(1949년 8월 16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1949년 8월 10일, 이승만 대통령한테까지 자랑했던 주한군사고문단장 윌리엄 라버츠(William L. Roberts) 준장의 전용 배가 사라졌다. (1949년 8월 10일 해군 인천 경비부 소속 안성갑 하사가 라버츠 준장의 전용 배를 몰고 월북했다. 남로당원 여동생의 사랑을 얻고자 라버츠 준장의 전용 배를 몰고 오면 결혼시켜 주겠다는 말에 저질렀다. 이후 함정을 몰고 오라는 지시를 받고 1950년 봄 서울에 잠입해서 대기하다가 해군 특무대에 체포되었다.) 인천 경비부가 라버츠 준장에게 사실을 숨긴채 연평도, 덕적도, 백령도 항구 등을 수색했지만 찾지 못했다. 라버츠 준장은 자신의 전용 배가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되자 즉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알렸다. 이승만 대통령은 해군총참모장 손원일을 경무대로 불러 세워 놓고 면전에서 질책했다. ■ 경과 해군에 비상이 걸렸다. 서해 첩보부대장 이태영 소령이 황해도 몽금포에 라버츠 준장의 전용 배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해군총참모장 손원일이 경무대로 호출 되었을 때 보좌했던 함명수 소령의 제안대로 작전이 입안되었다. 작전목표는 라버츠 준장의 전용 배를 도로 가져 오는 것이고, 여의치 않으면 그 자리에서 폭파였다. PG 313 충무공정, JMS 301 대전정, JMS 302 통영정, JMS 307 단천정, YMS 507 광주정이 엄호하기로 했다. 함명수 소령이 이끄는 20명의 특공대원(정보부대원)이 야간 기습 상륙작전을 하기로 했다. 1949년 8월 16일 02시 정대사령 이용운 중령의 승인 아래 인천항을 떠났다. 1949년 8월 17일 새벽 백령도 남쪽과 몽금포 서쪽으로 우회하여 몽금포 근해에 도착했다. 1949년 8월 17일 06시 무장태세를 점검하고 몽금포 항구로 진입을 개시했다. 북한군 해안경비병들이 초소와 정박한 함정에서 사격을 가했다. 함명수 소령이 이끄는 특공대원들은 5척의 고무배에 분승하여 항내로 돌격했다. 함정들은 진입하면서 포격을 가해 특공대원들을 엄호해야 했지만 북한군의 거센 사격에 주춤 거렸다. JMS 302 통영정 공정식 정장은 동기생 함명수가 위태롭다고 판단하고 항내 진입을 강행하였다. 특공대원들이 탑승한 고무배 뒤를 따르며 좌우현의 기관총으로 엄호사격을 가하여 보호에 나섰다. 상륙 지점 수십미터를 남겨 두고 고무배 5척 가운데 4척이 기관 고장으로 멈춰 버렸다. 함명수 소령이 탄 고무배만이 전진했다. 북한군의 총탄에 함명수 소령은 넓적다리 관통상을 당했다. JMS 302 통영정 공정식 정장은 고무배에 뛰어 들어 함명수 소령을 PG 313(충무공)에 실었다. 공정식 정장은 다시 MS 302 통영정에 승선하여 37mm 대전차포로 쏘면서 부두로 돌진했다. ■ 결과 MS 302 통영정은 대전차포 사격으로 북한 경비정 4척을 격침 또는 대파시켰다. MS 302 통영정 병사들은 제18호 경비정에 수류탄 투척후 승선하여 장교 1명 포함 승무원 5명을 생포했다. MS 302 통영정 병사들은 북한 해군 35톤급 제18호 경비정을 나포했다. 라버츠 준장의 전용 배는 남포항을 거쳐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PG 313 충무공정에서는 군의관이 병사의 헌혈 도움으로 함명수 소령의 총상을 응급처치하였다. ■ 되살아 난 군함 살 돈 걷기 1949년 6월 1일 해군은 함정건조기금갹출위원회를 구성 해군총참모장 손원일을 위원장으로 임명했었었다. 장교는 월급의 10%, 병조장은 월급의 7%, 수병은 월급의 5%를 각각 군함건조 기금으로 내도록 했었었다. 해군부인회는 바자회를 열었었다. 외교부는 외교관 부인들에게 수예품을 팔았었다. 그러던 중에 몽금포 기습 전투가 발생했고승전 소식이 펴졌다. 4개월 3일만에 해군장병은 810만원을, 해군 부인회는 42만원을 모았다. 정부는 4만5천달러를 지원했다. 해군총참모장 손원일과 주미대사 장면이 협력하여 대잠수함 작전에 투입되었던 USS PC 823 구매에 나섰다. USS PC 823은 길이 52.9m, 배수량 459t, 속력 18노트 성능이었다. 미국해양대학이 포를 해체하고 엔선 와이트 해드(Ensign White Head)로 개명후 실습선으로 쓰고 있었다. 1949년 10월 17일 미국이 요구하는 판매 가격 그대로 1만8천달러에 구매하였다. 1949년 12월 뉴저지 호보켄 부두에서 2달간의 수리가 끝나자 인수요원들은 직접 701이라고 번호를 그렸다. 1949년 12월 24일 뉴욕 해안경비대 제 8부두로 이동하였다. 1949년 12월 26일 오전 10시 뉴욕 해안경비대 제8부두에서 백두산이라고 명명식을 했다. 1950년 1월 26일 하와이 진주만에 도착하였다. 1950년 3월 규정 문제로 2개월여 논란 끝에 3인치 함포 1문 설치를 완료했다. 1950년 3월 20일 하와이 진주만을 출발했다. 1950년 4월 10일에 진해항에 입항했다. ■ 2015년 몽금포 기습 전투 지휘관 훈장 수여 태극무공훈장 JMS 302 통영정 정장 공정식 소령 을지무공훈장 정보부대 특공대장 함명수 소령 충무무공훈장 서해 첩보부대장 이태영 소령, PG 313 충무공정 정장 이종철 소령, 화랑무공훈장 YMS 503 광주정 정장 남철 소령, JMS 301 대전정 정장 김상질 소령. ■ 참고:
JMS-301 대전 JMS-309 대동강
YMS-501 금강산 YMS-512 구월산 YMS-513 김천 YMS 511 경산정은 1948년 2월 21일 제주도 서북방 비양도에서 좌초 되었다. YMS 517 고원정을 1948년 5월 15일 남로당원이 제주 근해에서 납북했다. PG는 일본 해군이 패망하여 건조 중단한 선체를 조함창에서 완성하여 1947년 2월 7일에 명명식을 가졌다. PG-313 충무공정 1944년 9월 14일 일본 해군은 비행기 조종사 구출 겸 어뢰 발사를 목적으로 건조에 착수했었다. 기중기와 어뢰 4문을 장착하려고 했으나, 1945년 7월 조선인 기술자들의 파업으로 건조가 중단되었다. 1946년 7월 15일부터 설계변경 등 재건조에 착수했다. 1947년 2월 2일 건조를 마쳤다. 길이 46.6m, 폭 6.7m, 배수 287t, 최고 속력 18노트였다. 건조비는 공비 669,000원, 재료비 21,904,000원, 부속품비 1,387,000원으로 총계 23,960,000원이 들어 갔다. ■ 그외 1946년 9월 15일 최초로 1대를 넘겨 받은 후 차례로 들어 온 미해군 상륙정(LCI) 6척이 더 있었다. 1946년 12월 4일 넘겨 받은 미해군 유조선 YO-1 구룡 1척이 더 있었다. 몽금포 기습작전 시기의 함정 배치 인천 1정대 부산 2정대 목포 3정대 ■ 여수 훈련정대 진해 훈련정대 진해 통제부 ※ ( <국군의 총기를 검열중인 군사고문단장 < 관련사진 삭제 > ※ ( <JMS 302 통영정> ) < 사진 삭제 > 윌리엄 라버츠 준장. Brigadier general William L. Robert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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