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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못알고 있는 한국전쟁.《새롭게 밝혀지는 6.25》 1편 총 3편작
Korea, Republic of 돌통 0 220 2022-08-28 02:54:12

< 1> 편


한국전쟁과 김일성의 꼼수


1. 김일성이 전쟁 구상을 스탈린에게 알렸지만 동의받지 못하자… 



1985년, 유학을 떠나기에는 늦은 나이인 마흔세 살, 미국 워싱턴 근교 수틀랜드 국립문서보관소(NARA)의 황량한 벌판에 서서 나는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어림하여 30억쪽의 문서가 소장되어 있다는 이곳에서 명색이 한국전쟁 문서를 찾고자 왔다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했다.


?다행히도 한국현대사 연구의 전설이 된 방선주(方善柱) 교수를 만나 도움을 받았으나 “나는 이곳에서 7년 동안 8만쪽의 자료를 복사했는데도 아직 한국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를 알 수 없다”는 말이 나를 더욱 절망하게 만들었다. 


2개월이 지나서야 무슨 자료가 어디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귀국할 무렵에는 1만5000쪽의 1차 사료를 복사할 수 있었다. 이것이 내 한국현대사 연구의 거름이 되었다.


전쟁은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역사의 재앙이었다. “전쟁은 부흥을 가져온다”는 스탠퍼드대학교 역사학자 모리스(Ian Morris)의 말은 너무 잔인하다. 전쟁은 피 흘리는 정치요, 정치는 피 안 흘리는 전쟁일 뿐이다. 죽지 않을 수 있다면 전쟁은 가장 멋진 게임이라고들 말하지만, 로마의 정치인 대카토(Cato the Elder)의 말처럼, 용맹한 것과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거기에는 무고한 생명들이 권력자의 오판이나 허세로 말미암아 목숨을 잃기 때문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훈련되지 않고 비이성적인 충동에 따라 움직이는 군대보다 더 국가의 통치에 두려운 것은 없었다. 



탱크에 맞설 무기가 없었던 국군은 북한군 전력의 핵인 소련제 T34 탱크부대에 힘없이 무너져 전쟁 발발 3일 만인 6월 28일 서울을 빼앗겼다.


전쟁, 그 무모하고도 덧없는 참상


인간은 왜 전쟁을 일으키는가? 수많은 변명과 명분에도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은 떳떳하거나 선명하지 않았다. 그 원인을 굳이 정리해 본다면, 자원의 결핍,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영토 확장에 대한 욕심, 정치지도자의 공명심과 헛된 영웅심, 승리할 것만 같은 오판으로 말미암은 충동 때문이었다. 불행하게도 한국전쟁은 위의 요소를 함께 갖춘 특이한 전쟁이었다.


?전쟁은 합리적 선택이 아니다. 광기와 탐욕, 그리고 복수심 앞에 윤리나 도덕적 외침이나 이성의 호소력은 매우 낮았다. 그 참혹함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심하다. 한국전쟁 당시에 어느 장교가 사병에게 “내가 만약 하느님이라면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로 너에게 무엇을 줄까?” 하고 물었더니 그 사병은 “내일(來日)을 주십시오(Gimmi tomorrow)”라고 대답한 데(S. Weintraub·‘MacArthur’s War’·p. xiii)에서 전쟁의 절박함이 잘 나타나고 있다.


한국전쟁은 개전의 이유와 개전 책임에 대해 가장 논란이 많은 전쟁이었다. 따라서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미국의 관문서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주의자들의 남침설, 수정주의자들의 남침유도설, 그리고 재수정주의자들의 내전설 등 그 해석이 구구할 수밖에 없다. 이 글은 “김일성은 왜 전쟁을 결심했는가? 김일성은 무엇을 의도했는가? 그리고 김일성은 전쟁을 통해 무엇을 얻었는가?”라는 질문을 화두(話頭)로 삼아 1950년 6월의 상황을 되돌아보려는 데에 그 본뜻이 있다.


건국 초기인 1948년까지만 해도 “남한의 진보(좌익) 세력은 막강하며, 혁명적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김일성은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인민군은 패퇴한 일본 34군과 58군의 무기를 접수하여 무장하고 있었다. 중국혁명과 러시아 홍군에서 실전경험을 쌓고 귀국한 2개 사단 규모의 조선인 병력도 뿌듯해 했다.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초까지의 기간에 북한에 주재한 소련 군사 고문의 숫자는 중공에 주재한 소련 고문의 숫자보다 많았다.(Sergei N. Goncharov·‘Uncertain Partners’·133쪽) 젊은 나이에 최고 권좌에 오른 김일성은 좀 허황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모두 딸 것만 같은 도박사의 자기최면에 빠져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건국 초기의 불안정한 국가 기반 위에서 자기의 힘만으로 한반도를 공산화할 능력도 없던 그는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스탈린(Stalin)과 한국전쟁을 협의했는데 이 자리에서 오고간 논의는 주로 자신의 개전 의지를 스탈린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때의 상황을 정리해 보면, 김일성이 ‘먼저’ 전쟁 구상을 스탈린에게 피력했으나 스탈린은 그에 동의하지 않았다. 남침 계획을 들었을 때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을 걱정했다. 남한의 공산화가 바람직한 것은 사실일지라도 소련은 미국과의 전쟁을 감수할 뜻이 없었다. 스탈린은 개전을 협의하는 단계에서 만류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남조선에서 미군이 물러난 지금 초전(初戰)에 승리하면 미국이 개입할 겨를이 없어 승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김일성의 주장에 설득되었다. “미국은 그토록 작은 나라를 구출하고자 개입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마오쩌둥(毛澤東)의 판단도 소련의 결심에 도움을 주었다.


?미국이 국공내전에서 국부군을 지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마오쩌둥으로 하여금 그런 판단을 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스탈린의 머뭇거림이 개전으로 바뀐 것은 1950년 2월 전후인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은 1949년 4월 28일자로 스탈린에게 비행기·전차·탄약 등 전투 장비 51종, 공병 장비 43종, 통신 장비 42종과 기타 부품을 요청했고 소련이 이를 ‘부분적으로’ 응낙한 사실이 있지만(‘러시아 문서’(YS)·255~267쪽) 이는 개전을 결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어서 개전과 관련하여 큰 의미를 둘 것은 못 된다.


그 자리에서 또한 김일성은 박헌영(朴憲永)의 말 도움을 받아 개전의 첫 총성과 함께 남한에 있는 1500~2000명의 빨치산과 20만명의 지하당원이 봉기함으로써 남한이 즉시 붕괴하리라고 장담했다.(‘툰킨(Tunkin)이 비신스키(Vyshinsky)에게 보낸 암호전문’·1949년 9월 11일)


?김일성은 지리산의 게릴라들에게 희망을 걸고 있었다. 여기까지 대화가 진전되자 스탈린은 중공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김일성의 의지를 지지했다. 스탈린으로서는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남의 손으로 적을 이길 수 있는 방법(差刀殺人)이라면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2. 단기간 서울을 점령하면 이승만이 항복할 줄로만 알았던 김일성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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