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못알고있는 한국전쟁.《새롭게 밝혀지는 6.25》 2편 총 3편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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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시리즈 2. 단기간 서울을 점령하면 이승만이 항복할 줄로만 알았던 김일성 김일성의 전쟁 구상 내가 한국전쟁의 개전 초기에서 가장 궁금하게 여기는 수수께끼는 김일성이 개전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그 중요한 초전의 시각에 왜 남진하지 않고 서울에서 3일의 시간을 보냈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숨고르기(소련 군사고문 Stanikov)라느니, 한강 도강 장비의 부족(백선엽)이라느니, 상부 지시의 대기 때문(딘 러스크·Dean Rusk)이라느니 온갖 이론이 난무하지만, 본디의 작전에 수원 이남으로의 진격이 포함되지 않았다고 나는 믿고 있다. 김일성이 전면전을 획책했다면 서울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승세를 몰아 남진했을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당시 북한군 작전국장 유성철(兪成哲)의 회고담을 들어보면 이렇다. ?“6월 28일 아침, 탱크 사단을 앞세운 인민군 제4사단이 서울에 입성했다는 보고를 받고 나는 이제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남침 계획은 사흘 안에 서울을 점령하는 것으로 끝나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작전 개념은 우리가 남한 전역을 장악할 의도가 없었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우리는 남한의 수도를 점령하면 남한 전체가 우리의 손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착각했다.… 적의 수도를 점령함으로써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세계의 전사(戰史)에서 비일비재한 일이다. 우리는 20만 남로당 당원이 봉기하리라는 박헌영의 호언장담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만약 이때 인민군이 쉬지 않고 진격을 계속했다면 6·25의 역사는 전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유성철·‘나의 증언(10)’·한국일보 1990년 11월 13일) 유성철의 증언인즉 한국전쟁은 당초 ‘3일의 전쟁’이 ‘3년의 전쟁’이 된 것이다. 이것은 “3일 이내에 서울의 점령을 끝내고 낙엽 지기 전에 남한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김일성의 주장(‘러시아문서’·서울신문사·KO-4D·2쪽)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개전 직전에 북한군 참모부가 4사단 참모장에게 내린 ‘정찰명령서 제1호’와 보병 4사단 이권무(李權武)의 이름으로 하달된 ‘작전명령서 제1호’에도 서울 이남의 작전이 보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부산까지 쳐내려가는 전면적 장기전을 계획했다고 보기에는 북한군의 장비가 너무 허술했다. 6월 23일자로 인민군 657부대에 하달된 군장(軍裝) 명령에 따르면, 전투원은 1개 분대에 모포 1매, 3인에 식기 1개, 미숫가루를 주로 한 비상식량, 군화 1켤레, 세면도구, 예비 발싸개, 마초(馬草) 2일분으로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RG 242, SA2010 Item 1/52, WNRC) 이와 같은 경장비는 속전(速戰)을 의미하며 남한 전역을 장악하기 위한 장비로서는 턱없이 부족하다. 장마가 오기 전에 전쟁을 종식시켜야 하며, 장기전은 불리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김일성으로서는 짧은 시일 안에 전쟁을 끝내야 하는데 그 시간 안에는 남한 전역을 완전 장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옹진·서울의 장악에 주력했다. 그래서 한국전쟁의 작전 명칭은 ‘옹진작전’이었다.(‘러시아 문서’·외무부·21쪽)  한국전쟁 당시의 피란민 이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사실은 인민군이 서울의 남쪽에 있는 수원(水原)의 장악을 중요시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오산비행장을 장악함으로써 남한의 공군력을 무력화하려는 의도 이외에 서울에 있던 정부 요인의 퇴로(退路)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서울을 점령한 2~3일 동안에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의 문제와 맞물려 있다. 북한군으로 서울에 최초로 진주한 부대는 3사단 9연대로서 그 시각은 6월 27일 23시였다. 그리고 곧 이어서 4사단이 진주했다. 이들이 3일(27~29일) 동안에 서울에서 한 일은 “군인, 경찰, 그리고 민족 반역자를 색출하는 것이었다”(‘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32, 53쪽)는 것이 미국의 해석이다. 그러나 요인의 색출 작업은 미국 측의 설명처럼 ‘처단’이 목적이 아니라 그들의 납치를 통해 남북 협상의 우위를 장악하려는 정치 공작이었다. 그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북한군은 6월 말에 당시 서울에 남아 있던 48명의 국회의원을 포함하여 김용무(金用茂)·원세훈(元世勳)·백상규(白象圭)·장건상(張建相)·오세창(吳世昌)·김규식(金奎植)·조소앙(趙素昻)·유동열(柳東說)·조완구(趙琬九)·안재홍(安在鴻) 등을 공산군의 영문(營門)으로 끌고 나가서 ‘항복식’을 거행하고 북한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게 했으며 끝내 이들을 북한으로 이송했다.(‘김창숙문존 (金昌淑文存)’·62쪽) 전선의 구축에도 의문이 남는다. 곧 6월 25일에 북한군은 38도선 전역을 돌파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동부 전선의 돌파에 총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춘천 방면의 진격은 더디었다. 그 이유는 북한의 탱크 부대가 산악 지대를 통과하기가 쉽지 않았고 남한군 6사단의 저항이 결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지만(‘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27~28쪽) 그와는 달리 서울 공격에 주력 부대를 투입하다 보니 동부 전선 침공에 무게를 두지 않은 것이었다. 왜 남한의 게릴라들은 호응하여 일어나지 않았는가 여기에서 의문이 제기되는 또 다른 부분은, 김일성이 진실로 남한 전역을 장악하려 했다면 남하하던 2사단과 7사단의 병력은 홍천에서 ‘서쪽을 우회전하여’ 수원을 공격할 것이 아니라 계속 ‘남쪽을 향하여’ 횡성·원주·제천·단양·영주를 거쳐 민중 봉기와 연고가 깊은 대구를 장악했어야 한다는 점이다. 당시 북한군은 T34 탱크 242대, SU72㎜ 자주포 176대, 장갑차 54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남한군은 대전차 무기를 전혀 보유하지 않았고 전차공포증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북한군이 전차 부대로 신속하게 남진을 감행했었다면 그들은 쉽게 남한 전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딘 러스크·‘As I Saw It’·163쪽)  그러나 북한군 2사단과 7사단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한반도 전역을 무력으로 장악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서울을 점령함으로써 한반도 전역의 공산화가 가능하리라고 오판했다. 그는 이승만(李承晩)이 항복할 줄로 알았다. 한국전쟁은 서울을 점령하기 위한 제한전이었다는 나의 글이 발표되자(‘한국정치학회보’ 30/3·1996·163~182쪽) 김영호 교수(성신여자대학교)는 그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 과정’(1998·60~79쪽)에 나의 입장을 반박하는 장문의 글을 게재했다. 나의 글에 대해 김영호 교수가 제기한 반론의 핵심은 한국전쟁이 미·소 냉전의 소산이었지 김일성의 결심 사항이 아니었으며, 김일성은 서울만을 점령하려 한 것이 아니라 남한 전역을 공산화하려 했으므로 서울제한점령설은 김일성의 전쟁 책임에 면죄부를 줄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자세하고도 정중한 지적에 감사하지만, 사실의 규명은 정죄(定罪)에 앞서야 한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었지 김일성을 비호할 뜻은 없었다. 김일성에 대한 면죄부의 문제를 말하자면, 한국전쟁은 김일성의 개전 의지에 따른 전쟁이었다는 나의 논리보다는, 한국전쟁이야말로 거대한 미·소의 냉전 구도 속에서 김일성은 한낱 하수인(pawn)에 지나지 않았다는 논리가 더 강하게 면죄부를 줄 수 있다. 남한 출신인 박헌영은 한국전쟁을 추동하면서 김일성보다 더 게릴라전의 효과를 과신하고 있었다. 그는 “남조선의 우리 조직은 800만명” (해방일보 1946년 5월 15일자)이라고 호언했다. 이것은 아마도 허장성세였을 것이다. 일단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남한으로 내려가 돌파구를 찾고 싶었던 그의 정치적 욕망과 계산이 빚은 실언이었다. ?김일성이 전적으로 그의 말을 믿고 개전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박헌영으로서는 언제인가 이러한 자신의 발언에 책임을 져야 할 날이 오리라는 것을 계산하지 못했다. 김일성은 중공군의 참전과 함께 1950년 12월에 부수상 겸 외무상(군사위원)인 박헌영에게 중장 계급 부여와 함께 인민군 총정치국장을 겸임토록 했다.(강상호(姜尙昊)·‘내가 치른 북한 숙청’·중앙일보 1993년 3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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