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못알고있는 한국전쟁.《새롭게 밝혀지는 6.25》 3편 총 3편작..마지막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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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마지막편 美(미) 장군의 아들 전사자 200여명, 韓(한) 장군 아들 전사자 수는 0명?  그러나 남한에서 게릴라전의 호응이 있을 것이고 이를 통하여 승리하리라던 김일성의 소망이나 박헌영의 계산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대구사건과 남로당의 와해, 제주 4·3사태와 여수·순천사건의 좌절은 그들로 하여금 유격전을 통한 승리의 희망을 좌절시켰다. 실제로 1948년부터 1950년까지의 빨치산은 수적으로도 급격히 감소하고 있었다.(서주석·‘한국의 국가 체제 형성 과정’·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1993·77쪽) ?유성철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남한에서는 가혹한 소탕 작전으로 말미암아 남로당 당원 90만명은 1948년 현재 24만명으로 감소되어 있었다. 이는 그들을 통한 승리의 가능성이 날로 낮아지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게릴라의 성공 가능성이 낮을수록 내전이 전면적으로 확대될 가능성은 높아진다. 남한에서의 게릴라전은 전술적으로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소수에 의한 테러 위주의 도시 게릴라가 아닌 전투 개념으로서의 유격전을 전개하려면, 연륙(連陸)한 퇴로가 있어야 하며, 강추위가 없어야 하며, 밀림이나 동굴과 같은 엄폐 수단이 있어야 하며, 생식(生食)으로 식사가 가능해야 하며, 주민의 호의적 동조가 있어야 하며, 핵무기와 같은 대형 살상 무기가 등장하지 않은 상황에서 재래식 무기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지형지물은 이와 같은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 나의 기억 속에 북한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남아 있던 공산게릴라들은 추위에 먹을 것이 없어서 동네로 내려와 서성거리다가 잡힌 경우가 많았다. 한국전쟁에 관한 나의 글이 가장 거세게 저항을 받은 것은 내가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규정했기 때문이었다.  김일성이 개전한 6월 25일을 강조함으로써 그의 책임을 확대하고자 전쟁의 이름도 ‘한국전쟁’에서 ‘6·25전쟁’으로 바꾼 우익들의 눈에는 개전 일자를 희석시킬 수도 있는 내전설로 한국전쟁을 해석하는 것이 매우 위험해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 그러나 하루 만에 벌어지고 마친 사건이 아니라 3년 동안 지속된 전쟁을 개전 일자로 명명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었다. 전쟁을 특정일자로 표기하는 것은 승전일을 표기할 때나 하는 일이다. 국제정치학이 주류를 이루고, 김일성의 악마화 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나의 논지가 우익의 강력한 공격에 노출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공산화를 위한 침략 전쟁”이라고 말했어야 한다는 것이 반론의 주류였다.  그러나 이미 1949년 5월의 하계 공세에서부터 남북의 교전이 시작되어 국지전에 돌입하고 있었다는 점을 나는 주목했다. 외세를 등에 업지 않은 내전은 없다는 점에서 국제적 측면만을 강조하는 것은 올바른 해석이 아니다. 6월 25일 이전에 38도선을 둘러싼 크고 작은 교전은 수없이 있었다. 2000~3000명의 연대 병력에 의한 충돌도 있었으며, 이러한 충돌을 통해 한국전쟁 이전에 이미 남한에서만 10만명이 피살되었다.(J. Merrill·‘The igins of the Korean War’·Current Review·December 1988·19쪽) 남북한의 군사적 충돌이 이토록 빈번했기 때문에 6월 25일 막상 북한의 남침 소식이 미국대사관에 전달되었을 때에도 미국은 그것을 사실로 믿지 않았으며, 서울 시민의 분위기도 마찬가지였고(김성칠(金聖七)·‘역사 앞에서’·1950년 6월 25일) 군부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유성철의 증언에 따르면,  [ 남북한은 1950년 초에 옹진반도와 개성에서 이미 교전이 있었다. 남한의 군대가 북한을 공격하여, 38도선을 1㎞까지 침범한 적도 있었고, 이때 양춘 대대는 국방군을 격퇴하고 보복 조치로 남측 지역 1㎞ 안으로 진격해 들어와 있었다.(유성철·‘나의 증언’(8)·한국일보 1990년 11월 9일자) ] 전쟁의 책임 나는 한국전쟁의 확산 과정에서 국제적 요인이 깊이 개재된 것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한국을 일본의 보호를 위한 교두보로 여기는 미국과 러일전쟁 이래 극동에 얼지 않는 항구를 확보하고자 하는 소련의 욕망이 내전으로서의 한국전쟁을 확산시켰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수립된 신생국들이 경험했듯이 독립 이후에는 거의가 내전을 통해 씻김굿을 치렀다. 그와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의 시작은 내전이었다. 그러던 차에 극동에서의 패권을 추구하던 남북한의 후견국인 미국이나 소련은 한국에서 전쟁을 피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한국전쟁은 타협으로 풀 수 없었던 해방정국의 정치적 갈등을 무력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믿은 김일성의 오판이 내전으로 폭발한 것이었으며, 거기에 국제적 요인이 작용하여 국제전으로 확산된 것이었다. 맬서스(Malthus)는 인구의 팽창이 기하급수적이라고 걱정했지만, 잔혹하게도 그 인구를 억제해준 것은 질병과 전쟁이었다. 한국전쟁도 예외가 아니었다. 누구도 정확한 자료를 제시할 수 없지만, 어림잡아 북한의 민간인 사망자는 110만명 정도이며 군인의 전사·실종자는 55만명 정도이다. 중공군의 사망·실종자는 13만명이며, 남한 민간인 피살자는 99만명으로 추산되며, 남한군의 전사·실종자는 16만2000명이다. ?미군은 3만7423명이 죽거나 실종되었고, 그 가운데 200명은 장군의 아들이었다. 장군의 아들이 이렇게 많이 죽은 것은, 전쟁이 일어나면 국가의 지도층이 먼저 나가 스스로를 조국 전선에 바쳐야 한다는 로마 이래 서구의 전통에 따른 것이었다. 서구의 전쟁사를 보면 귀족의 전사율이 사병의 전사율보다 높았다. ?한국인 장군의 아들이 전사했다는 기록을 나는 보지 못했다. 미군 이외의 UN군은 4429명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이들을 모두 합치면 대략 298만명이 한국전쟁으로 죽었다. 그 가운데 한국인 사망자는 대략 280만명인데 당시 남북한의 총인구 약 2966만1000명(남한의 2018만9000명과 북한의 947만2000명) 가운데 9.5%가 죽은 셈이다. 나누어 말하자면 북한 인구의 18%가 죽었고, 남한 인구의 6%가 죽었다.(‘통계로 본 6·25전쟁’·국방부·2014) 김일성은 저세상에서 한국전쟁은 통일이라는 민족의 염원을 이루고자 함이었다고 자신의 처사를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합참의장 브래들리(O. Bradley)가 맥아더청문회(1953·732쪽)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한국전쟁은 “잘못된 곳에서,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적을 만난, 잘못된 전쟁”이었다. ?우리의 역사에서 통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동족상잔을 일으킬 때 그 민족주의는 죄를 짓는다. 나도 젊어 한때는 가슴이 끓는 민족주의자였지만, 역사를 되돌아보면 민족주의적 열망은 국제 문제의 해결책이라기보다는 원인일 경우가 많았다. 요컨대 1950년 6월 25일의 남침은 분명히 김일성의 결심 사항이었다. 그는 전쟁을 통해 국가 건설의 초기 모순을 공산화로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내전이었든, 적화 야욕이었든, 저들이 말하는 “해방 전쟁”이었든, 민족사적 입장에서 볼 때 한국전쟁은 무고한 죽음을 차치하더라도 통일을 적어도 60여년 이상 뒤로 물렸다는 점에서 비난을 면할 수가 없다. 그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2000년 전에 내전에 휘말렸던 로마의 황제 오토(Marcus Otho·32~69년)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죽었다. “내란에 따른 동족상잔은 조국에 커다란 죄를 짓는 것이다. 나는 그 길을 피하고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플루타크영웅전’·오토편 § 15)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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