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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시작전통제권과 ~~ 그 이름도 유명한 유재흥 장군
Korea, Republic of 돌통 0 640 2023-04-28 14:25:46

■ 한국군의 전시 작전권이 박탈된 이유



1950년 한국 전쟁의 전황을 결정적으로 가른 큰 두개의 전투가 있었다. 하나는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이고, 또 다른 전투는 1950년 11월 중공군의 인해 전술에 의한 ‘청천강 전투이다. 1950년 11월 청천강 전투에서 유엔군의 주력 부대인 워커 장군의 미 8군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결국, UN군은 평양에서 철수하였다. 그 후, 중공군은 파죽지세로 휴전선 이남으로 내려왔고, 결국 서울이 다시 점령되어 1951년 01월 04일 서울울 또다시 포기해야만 했다. 1951년 01월 04일, 1.4 후퇴라고 불리우는 날이다.


그런데, 1950년 11월, “청천강 전투의 결정적인 패인이 한국군에게 있었다!” 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를 뒤집은 후, 미 8군이 주축이 된 연합군은 1950년 10월 서부 전선에서 북한군을 거의 신의주까지 몰아냈다. 그런데, 1950년 11월, 중공군이 참전하게 되고, 신의주 아래 온정리 라는 곳에서 처음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전황이 좋지 못하다고 판단한 유엔 사령부는 연합군을 청천강 부근으로 물러나게 한 후, 방어를 위하여 부대를 재정비하고, 청천강 일대에 전선을 구축하게 되었다.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청천강 서부 지역에는 한국군 1사단, 미군 24사단, 제1기갑 사단 등을 배치하고, 청천강 상류인 덕천군, 영원군에는 한국군 제2군단(6사단. 7사단. 8사단)을 배치했다. 중국군 사령관 팽덕회는 위와 같은 병력 배치를 파악하고, 전혀 주저함 없이 1950년 11월 24일 한국군이 방어를 담당하고 있는 덕천군과 영원군을 공격하여 미군의 퇴각로를 차단하라는 내용으로 공격을 지시했다.


중국군 사령관 팽덕회는 참전 이래 한국군을 오합지졸(烏合之卒)로 평가했다. 그래서, 주로 한국군 방어지역을 공략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1950년 11월, 청천강 전투에서, 한국군 제2군단은 완전히 궤멸되었다. 전 병력의 60%가 사망. 실종. 포로가 되었다. 심지어는 연대장 3명이 생포되고, 1명의 연대장은 전사하였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6사단을 이끌고 있던 한국군 2군 단장 (유재흥 중장)은 6사단이 중공군을 직접 조우하기 전까지 자신의 예하 사단인 7사단, 8사단이 궤멸당한 사실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위와 같이 방어선의 우측이 무너짐에 따라 미군이 중국군에게 포위당할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다.


미 8군 워커 중장은 한국군 2군단의 붕괴 소식을 접하고, 연합군 및 미군에게 평양까지 후퇴를 지시하게 되는데, 퇴각을 명할 시점에 이미 중공군 38사단은 미군의 퇴로 차단에 나서고 있었다. 중공군 38사단의 퇴로 차단에 맞서서 터키군 여단이 미군의 퇴로 확보에 나섰고, 터키군이 용감하게 중공군을 차단하고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미군은 겨우 평양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1950년 12월 23일에는 연합군은 임진강. 한탄강까지 후퇴하여 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다. 1951년 01월 04일, 다시 수도 서울을 버리고 1.4 후퇴해야 했다. 1951년 1월 14일,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추락하듯이 남쪽으로 후퇴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서쪽으로는 평택, 동쪽으로는 삼척을 연결하는 선까지 후퇴하였다. 1951년 1월 25일에는 수원까지도 빼았기게 되었다. 1951년, 거침없이 공격하던 중공군은 남으로 


진출할수록 병참선이 길어지고 그 병참선이 유엔 공군의 공격을 받으면서 전투력이 약화되었다. 더 중요한 요인은 1951년부터 전쟁 중에 갑자기 중공군에게서 수천 명의 괴질병(怪疾病) 환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중공군 병영 내에 갑자기 괴질병이 돌아 한강 이남을 넘어오지 못했다. 괴질병이 한강 북쪽의 한탄강(漢灘江) 유역에서 유행했기 때문이다. 그 괴질병(怪疾病)이 바로 유행성 출혈열이다. 중공군은 갑자기 10여만 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1951년 03월 15일 본격적으로 퇴각했다. 한국 전쟁에서 가장 위험했던 순간은 이렇게 뜻밖의 괴질병(怪疾病) 유행 사건으로 해결되었다.


1951년 03월 14일, 유엔군과 국군은 전선을 북으로 밀어 올려 다시 수도 서울을 탈환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38선까지 진격한 후 재차 북진하였다. 1951년 04월 12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그 자신의 명령에 철저히 복종하지 않는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을 해임하고, 그 후임으로 미군 제8군 사령관인 리지웨이(Ridgway) 장군을 임명하였다.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Van Fleet) 중장(워커 중장의 후임)은 새로 구성된 한국군 제3군단 (보병 3사단, 보병 9사단)을 강원도 인제군 현리 오마치 고개 지역에 배치했다.


1951년 중공군의 춘계 공세가 시작되었는데, 이 때에도 팽덕회는 연합군의 약점으로 한국군을 지목하고 한국군의 방어 지역 공격을 선택했다. 1951년 05월 16일부터 한국군 제3군단 수비 지역인 강원도 인제군 일원에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중공군은 한국군 주력을 우회하여 한국군의 퇴로부터 먼저 차단한 후, 공세를 시작함으로써, 한국군 제3군단은 중공군에 포위되었다. 이때 중공군 100여명은 강원도 인제군 현리 오마치 고개를 점령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당시 한국군은 2만 5천명이었다. 상황을 정리하면, 2만 5천명의 한국군이 100여명의 중공군을 막지 못했다. 위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자 제3군 단장 (유재흥 중장)이 부군단장에게 지휘권을 위임하고, 부하들은 남겨 둔 채, 경비행기를 타고 도주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당연히 제3군단은 중공군에 포위된 채 궤멸되었고, 병력의 60%는 사망. 실종. 포로가 되었다. 나머지 생존 병력도 무기를 버리고 개인별로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였다. 지휘관을 잃은 병사들은 지리멸렬되어 3일 동안 무려 70km를 퇴각했다. 장비를 버리고 몸만 빠져나온 병력은 3사단 34%, 9사단 40% 정도만 살아 남았다. 나머지는 사망, 실종, 포로가 되었다. 중공군의 포위망이 거의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직도 싸울 힘이 충분히 남은 상황에서 지휘관이 먼저 도망감으로써 부대 전체를 와해시키는 믿지 못할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 패전이 계기가 되어 전시 작전 통제권은 완전 상실하게 되었다.


제2차 대전에서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참전했던 백전노장 밴플리트(Van Fleet) 장군은 이런 한국군의 지휘부를 보고 황당하고 대경실색하여 맥아더에게 한국군의 작전권을 빼앗아 달라고 요청하였다. 맥아더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연락하여 한국군 지휘관들의 작전 및 지휘를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으니, 지휘권을 연합군에 넘기라고 요구하였다. 이승만은 ‘장군의 요구대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적은 각서를 맥아더에게 보냈다.


이 사건이 바로 ‘전시 한국군 전시 작전 통제권 상실’의 사건이었다. 이 시점 이후, 한국군은 자기 부대만 통솔할 뿐, 작전 및 작전 지휘권은 금지되었다. 전시 작전 통제권은 한미 연합 사령부에 이양되었다. 2007년 02월 노무현 정부는 ‘전시 작전 

통제권 환수’를 2012년 04월로 합의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2015년으로 시점을 늦췄는데 그것을 다시 박근혜 정부가 무기한 연기하기로 하였다. 군사 주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그런데, 국민들이 잘 알지 못하는 더 놀라운 사실은 지금부터이다. 한국전의 분수령이 된 청천강 전투를 패전으로 이끈 한국군 2군단장과 현리 오마치 전투에서 도망친 한국군 제3군단장이 ‘동일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 사람이 바로, ‘유재흥 중장‘이다. 유재흥은 이렇게 한국 전사에 길이 남을 전설의 패전 2건 주역으로 기록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더 놀라운 일은 이런 짓을 했는데도 유재흥은 군법 회의에 회부되기는 커녕 이승만 밑에서 참모총장 대리까지 지내고 중장으로 예편했다는 것이다. 박정희가 쿠테타로 집권에 성공하자 박정희는 유재흥을 국방 장관에 임명했다. 그런데, 사실 이것도 아무것도 아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유재흥이 한국말을 할 줄 몰랐다는 것이다. 유재흥은 일본군 장교 유승렬 (친일파로 분류)의 아들이었고, 유승렬은 아들을 진정한 일본인으로 키우기 위하여 한국말 사용을 금지해서 유재흥은 한국말을 할 줄 몰랐으며, 한국인임에도 한국인 통역관을 데리고 다녔다. 군에 명령을 하달할 때 “돌아가라”를 “또라가라”고 할 정도였다. 물론 유재흥도 일본 육사 출신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였던 자이고 친일파로 분류된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놀라운 것은 2004년 노무현 전대통령이 미군으로부터 전시 작전권을 회수하겠다고 발표하자, 예비역 군 장성 2명이 반대 성명을 발표하는데, 그 성명의 대표자가 바로 유재흥이었다. 자신의 황당한 일로 빼앗긴 작전 통제권의 환수를 본인이 스스로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유재흥은 한국 석유공사 사장까지 역임 하고 난 뒤, 2011년 사망하였고, 현재 국립 묘지에 묻혀 있다. 그래서, 친일파 척결이 이 나라의 제1 과제이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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