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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년간을 돌아보며..
REPUBLIC OF KOREA 푸른바다 9 577 2006-10-17 10:24:23
어느덧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자유의 땅에 온지도 어언 1년이라는세월이 지났다..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북한을 떠난지 1년 4개월이 되었다..
그 1년동안 참 변한것도 많고 배운것도 많고 새삼스럽고 아름다운 추억도 많아졌지만 무엇보다 기쁜것은 나 자신의 자신감을 되찿은것이다..
그 길지않은 1년동안 고민도 많이 했고 울어도 보았고 고독감과 외로움을 많이도 느꼈지만 또 그모든것이 별로 변한것도 없지만 그래도 나자신을 잃지않고 살아갈수있는 정신적 밑천이 생겼다는것에 경이로울 뿐이다..
그 1년동안 나는 나의 혼란스러운 정체성에 고민도 많았고 북한에서 살아온날이나 앞으로 남한에서 살아갈 모든것에 새삼스러운 정의 도 내려보면서 그나마 골빈 머리를 움켜지고 고민해왔다.
하긴 이런 고민이나 모순은 여기 한국에 와서 새삼스럽게 생긴것도 아니고 내가 자라온 환경이나 사회의 원인때문에 생긴것이라 보는것이 옳은것일것이다.
나는 어릴적부터 그 공포스러운 정치국가에서 살면서 너무도 많은 혼란성을 겪으면서 성장해왔고 그원인이 나의 자신감이나 지나친 자신의 콤플렉스를 몰고오는 효과를 가져온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북한에서 굉장한 배경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났다..
김일성과 빨치산을 같이 했다는 증조부며 초대 장관을 지냈던 할머니와 당시 북한 직업총동맹의 요직에 계시다가 숙청당하신 할아버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 두 삼촌을둔 굉장히 비극적인 가정에서 나는 성장해왔다.
또 그토록 가난하고 못사는 나라에서 굉장히 부유하게 굶어죽고 노숙자로 전락해가는 사람들을 간접적으로 보고 느낄수있는 축복을 받은 행복동이로도 되었다.
빨치산 줄기의 조상들과 그와 상반되는 반당반혁명종파분자의 자손...
엄청나게 가난한 나라에서 엄청나게 잘살다온 복에 겨운 젊은이..
이것이 북한에서 살아온 나의 모습이었고 사람들이 알수있는 나의 프로필이였다.
그 무서운 정치국가에서 살면서 삼촌들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는 그모든 것을 체험해야했던 비애..
굶어 쓰러져가고 얼어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고통을 간접적으로 느끼며 성장해온 소년...
이모든것이 결국에는 나를 어떤때는 난폭하고 또는 굉장히 반항아적인 기질을 가진 무식한 오늘의 나를 만들어놓았다.
그나마 나에게는 이렇게 라도 지난날의 내모습이나 현재의 내모습을 글로 쓸수있다는 이자유조차 복에겹다..
1년전 인천공항의 활주로에서 새로운 세상을 접하게된 나의 감격, 행복, 기대는 사실 상상을 초월했고 나는 이제는 천국이다라는 느낌에 들뜨는 마음을 어쩔수가없었다.
인천공항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그길이 왜이리 근사하고 멋져보이는지, 해빛은 왜그리도 따뜻하고 사람들은 왜그리도 친절한지...
모든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라지만 분명히 나의 첫느낌 대한민국은 그어디보다 행복한 천국이었다.
시원하게 쭉 뻗어나간 대로로 앞이 안보이게 빼곡히 달리는 차들,몇개인지 헤어볼수도 없는 한강의 모든 대교들과 (참고로 평양대동강의 다리개수는 내기억에 12개임..)아름답고 예쁜 유람선들...
모두가 너무 낭만적이었고 행복해 보였다.
처음에 조사기관에 들어갔을때부터 나는 무엇이나 알고싶은 욕망에 닥치는대로 책을 읽었다.
삼류 연애소설로 부터 시작해서 대학원생들이나 봄직한 철학책까지 그 내용을 파악하든 못하든 무엇이나 읽고 알고싶었다.
그 욕망은 하나원3개월교육기간 동안도 이어져 하나원 독서실의 책을 독파하다 싶이 하였다.
거기서 김일성의 주체철학이라고 하는 진절머리나는 그사상과 반대되는 월등한 그무엇이라도 얻고싶은 느낌도 들었다.
현대종교철학으로 시작해서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대철학과 데카르트로부터 헤겔의 근세 철학까지 알지도못할 고리타분?한 그모든것을 다읽다 싶이 하였다.
그분야는 상당히 넓어서 기독교의 원리나 불교의 논리까지 다알고싶은 욕망은 끝이없었다.
사실 참으로 마구 잡아넣다싶이한 그때의 지식은 마구넣은것만큼 마구 나가버려 지금은 처음과같은 골빈머리로 되고말았다.
그리고 하나원을 나올때 나의 트렁크 세개중 한개는 독서실의 책을 훔쳐온것이었다.
난생처음하는 도둑질이였지만 책도둑은 도둑이 아니라신 아버님의 말씀이 생각나 다행이 마음을 안심할수있었다.
그 3개월의 교육과정이 왜그리 지루하고 더디였던지 참 하루하루가 고문인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그까이꺼 사는방법은 나가서 부닥쳐보면서 터득하면될것을..) 하는 생각에 나는 그 교육기간동안 거의 강의를 듣지않았으며 호실에 틀어박혀 책을읽고나 컴퓨터 게임을하고 또는 헬스장에서 탁구채를 들고 땀을 흘리곤했었다
너무도 알고싶고 느끼고 싶었던 그모든것에서 유일하게 내가 배척한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종교였다.
북한에서 배워온 주체사상이나 무신론에 중독되어서가 아니라 나에게는 특별히 종교를 좋아하지않게된 계기가있었다.
물론 지금은 교회를 다니고 하느님이 계심을 믿고 다니지만 마음한구석에 때때로 일어나는 의심이나 호기심은 아직 많이 남아있다.(사탄의 욕망이 남아있다는?..)
하나원 교육 3개월간 단한번도 종교적 모임에 가지않은 사람은 그많은사람들중 단 두명이었다.
언젠가 하나원교육전에 새벽기도회에 구경을 간적이 있었다.
그때 친구녀석( 내가 교회에 다니게 된것이 자신이 꾸준히 나를 교회에 나가게 해달라고 한 기도에 대한 답변이라고 여기는)이 기도를 했다.
근데 이친구가 하는 기도는 참 나를 어이없게하는 그런 내용이였다.
기도의 내용을 요약하면..
" 하느님 아버지!
저기 하느님의 땅 북한에도 하느님의 영생함을 알리게 해주옵시고 하느님의 권세와 능력이 차넘치게 해주옵소서..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마음을 열어 하느님께 속죄하고 그가 지은 모든죄를 하느님께서 사하여주옵소서."
그때 참 괜찮게 생각했던 그녀석에대한 환멸감을 나는 감출수가없었다.
땅에 그대로 묻어버려도 한이 풀릴것같지않은 김정일을 용서하고 하느님께서 죄를사하여주시기를 바란다고?..
그후 언젠가 그와 종교에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이런물음을 던졌다.
"너는 북한에서기독교를 믿었다는 죄로 죽을뻔하다가 겨우 살아온녀석이 김정일을 용서해달라고 기도를 하냐?"
근데 그친구의 대답이 참 유머적이라 봐야하는지 아니면 독실한 크리스챤의 대답인지...
"내가 용서할수없는 인간이니까,즉 인간의 감정으로는 절대로 용서할수없는 그런 인간이기에 하느님께 용서해달라고 기도한거지"
그말에 나는 할말을 잃고 말았다..
쯥.. 이런 애한테 내가 무얼 물어본것이 잘못이다라는 생각과 그말에 할말을 잃은 나의 텅빈머리에 갑자기 혐오감이 생겼다.
(물론 지금은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있고 새벽기도에도 종종나가곤한다..)
그후 3개월의 교육기간이 끝난후 나는 서울의 내집에 도착할수있게되었다.
넓은 세상 수많은 사람 너무도 아름답고 행복할것만 같은 나의 남한 생활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이땅은 무엇이나 쉽지않았고 점차 낭만은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지하철타는 방법도 몰라 1100원짜리 전철티켓을 사야하는것을 900원짜리로 사 짐승처럼 지하철밑을 넘나들때가 한두번이 아니였고 교통카드를 몰라 버스에 오르면 만원짜리지페를 내여 기사아저씨와 모든사람들의 이상한 눈초리를 받아야했다.
은행에서 돈찿는 방법도 알수가 없었던 나에게 있어서 첫 정착생활은 뭔가 혼란스러운 매일매일 너무도 많은것을 배워야했던 시절이였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않았고 늘한가하게 모든걸 배울시간을 나는 가질수가없었다.
사실 나는 첫정착을 시작한지 일주일도 안되여 일을 시작할수밖엔없었다.
너무도 낭만적이였던 나의 남한 생활에 대한 환상이 하나둘깨지면서 나는 내가 살아가야할 모든것에대하여 하나하나 재정립해야하는 환경에 처했다.
사실 당장 일을 하지않으면 다음달부터 집관리비도 낼수없고 넓은 서울시를 걸어서 다녀야하는 처지에 처할만큼 첫생활은 힘들었다.
그래서 처음 벼룩시장을 보고 찿아간곳이 훼미리 마트 (24시편의점)이였다.
짧고 촌스로운 헤어스타일에 정장바지에 구두 위에는 츄리닝을 입은, 거기에다 이상한 가방을 어깨에 멘 청년이 "아르바이트생을 찿는다고 해서 왔습니다"고 북한사투리로 이야기할때 사장님의 얼굴에 스치는 실망감을 나는 어렴풋이나마 느낄수있었고 처음으로 시작할수도있는 일이라는데 대하여 대단한 호기심과 기대감, 또 큰용기를 가지고 찿아갔던 나는 저절로 초라해지는 내모습을 느낄수가있었다.
다행이도 사장님은 내가 평양사람이라는데 대하여 상당한호기심과 친근감을 보여주셨다.
결국 사장님의 장모님이 평양분이셨단다..
거기서 나는 3개월간을 열심히 일했고 또 많은것을 배웠다.
담배이름하나 제대로 모르던 내가 그일을 완전히 소화해 내는 기간 나는 사실 너무도 많은것을 배웠고 느낄수가있었다.
또 사회주의라는 체제에서 살아온 나에게 있어서 받는월급만큼의 가치를 노동력으로 보상한다는것은 이론상은이해되었지만 현실로는 잘안겨오지가 않았다.
모든걸 대충하는 습관이 잘고쳐지지가 않았고 그모든 안좋은 습관들을 버리는데 3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 3개월이라는 시간을 참아주시고 너무도 이사회에 필요한것을 하나하나 가르쳐주신 그 나의 첫일터 사장님을 나는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있다.
그 3개월동안 나는 내가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사회는 그리 행복하기만 한 사회는 아니였고 자기가 하고싶은것을 하되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소요되는 그런땅이였다.
내가 하고싶은것을 하면서 즐긴다?. 이런 나의 첫생각은 낭만이였고 그냥 꿈에 불과했다.
그하고싶은것자체가 나의 인격이되고 자식의 가정의 행복이될수도 있고 또는 그반대일수도있다.
또 하고싶은것 그것이 나를 먹여주고 입혀주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그런 금전적 역활도 수행해야한다.
사실 즐기며 산다는것은 남한생활의 초보자인 나에게 있어서 너무도 호사스러운 생각이였다.
그때부터 너무도 고민스러웠던 내 첫시절의 시련이 시작되였다.
조금씩보이기 시작하는사회는 나를 정신들게 했고 장기적인 대비책을 세워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
학벌이 중요한사회이고 또 돈이 우선인 이땅에서 나는 비로서 현실을 하나하나 볼수있게되였다.
그때부터 공부를 해야한다는 막연한 생각과 함께 나의 생활을 바꾸기 시작했다.
다니던 마트일을 그만뒀고 조금 어려워도 학업을 시작하는 길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무엇을 잘할수있는지도 또 무엇을 하고싶은지도 잘모르는 나는 무턱대고 학교로가는 길을 택했다.
나의미래가 걸린일이고 앞으로 떳떳하게 고향으로 갈수있는 길도 이길밖엔 없다는 생각이 늘 나의 머리를 아프게했고 새롭게 공부를 시작하게 했다.
물론 지금은 대학을 수시로 합격했고 몇개월후면 당당한 대학생이될것이다.
거울앞에서서 대학생이 된것에 너무도 감사하고 행복한 표정을 짓다가도 진득진득나오는 여드름에 화가나서 거울을 때려부수고 싶은 충동에 종종 사로잡히군하는 이 몸이다.
길거리에서 멋진차를 보면 나도 저런차를 사서 바다가로 근사한 여행을 떠나고 싶고 또는 엑시브 오토바이를 사서 대로를 속후련하게 달려보고도 싶고 작고 예쁜 클래식 스쿠터에 여자친구를 태우고 깔깔거려보고도 싶은 욕망을 지금도 종종느끼군한다..
에잇 대학 1년포기하고 일열심히해서 차뽑고 오토바이사고 할까? 하는 생각을 짓다가도 1분도 못되 헛꿈잘도 꾼다 하면서 실웃음 짓는 단순하고 천진한 청년이 바로 나이다..
내또래 애들이 입는 멋진옷이나 악세사리에 현혹되여 한동안 가게앞을 맴돌며 빈약한 지갑을 만지작거리다가 한탄하며 돌아서는 자존심도 없는 불쌍한 인간이 바로 나이다.

추석날 식탁에 밥한그릇 정히 떠놓고 사진도 없이 제를 올리는 실향민의 신세이지만 두고온 부모와 친구들이 보고싶어 술을 마시고 꺼이꺼이 우는 마음약하고 눈물많은 감성적인 존재가 바로 나이다..
그렇게 볼것없고 가진것없고 욕망뿐인 저체중증에 시달리는 청년이 바로 나이다.
그래도 가진것없고 볼것없는 하찮은 인간일지라도 나는 희망만은 버리지않는다.
늘 모든것에 불만이고 논리적이거나이성적보다는 다혈질 성질로 한행패하는 무식한 나일지라도 희망에는 불평을 안부린다..
그 길지않은 1년동안 나는 희망을 가지는법을 배웠고 그희망을 놓치않는법을 배웠다.
가진것없고 모든것이 시작인 우리에게 있어서 희망마저없으면 그것은 죽은목숨이나 마찬가지이다.
나는 그1년동안 떳떳하게 고향에 간다는 희망으로 열심히는 못살았어도 나름대로 노력하며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살아갈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희망을 가진자만이 무엇을 할수있고 희망을 성취할수있다..
우리 탈북자들이 지금은 어렵고 힘들고 새로운환경에대한 부적응이 생길수 있겠지만 누구나 꿈과 희망만 잃지않는다면 꼭 성공해서 부모형제들을 만날수있는 날이 온다고 나는 믿고있으며 확신하고있다.
우리모두 자신의 모든것을 다잃더라도 희망만은 버리지말자..
희망을 안고 살면 꼭 밝은 날이 오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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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소녀 2006-10-17 11:03:08
    맞아요! 저두 희망을 안고 살고있답니다.
    참 푸른바다님! 몇개월후면 당당한 대학생이 되신다하셨죠?
    저두 마찬가진데...
    어쩌면 서로 만날 지도 모르겠네요!
    이름도 모르지만...
    우리 서로 희망을 안고 꿈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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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랑이 2006-10-17 14:55:48
    푸른바다님!~좋은 글 참 감사합니다..
    우리가 잃지 말고 잊지 말아야 할 ..
    통일된 고향에서 해야할 우리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
    저도 그희망을 간직하고 열심히 나름대로 살고있습니다만은..
    이글 읽고나니 넘 힘이 되네요..
    꼭 열심히 공부해 높은 희망의 꿈을 이루시리라 믿습니다.
    희망의꿈을 실현하기위해 노력한 님의 피나는 학구체험의
    그후의 글을 기다립니다..좋은글 많이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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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제나늘 2006-10-17 20:00:57
    남한사회가 이기적이고 경쟁이 치열한 자본주의사회지만, 그리고 이방인에 대해 낯을 가리지만, 그대신 효율이 최우선시되는 실력사회입니다. 처음접하는 사회에 적응하느라 어려움이 많은 줄 압니다. 그러나 일 잘하고 성실하고 대인관계 좋다고 인정받으면, 사장은 탈북자래도 결국 그사람 발탁합니다. 자기에게 가장 도움되는 사람이 가장 효율적인 사람이며 그 사람 써야 치열한 경쟁에서 회사가 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의 이런 장점을 잘 활용하여 열심히 하시면 전도양양합니다. 부디 성공하시고 통일되면 고향을 찾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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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한총각 2006-10-18 00:01:30
    푸른바다님 글을 잘 읽었읍니다
    푸른바다님 남한으로 어렵게 오셔서 그동안 많은 어려움을
    스스로 이기는 법을 배워 가고 있었을겁니다 푸른바다님께서
    지금보다 우리사회에 적응을 빨리 하시길 바라며 우리나라 속담에
    천리길도 한걸음 부터라고 했읍니다
    모든것이 새롭고 힘들더라도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시면
    님께서 앞으로 하시고자하는 꿈을 알게 되시고 그꿈을 향해 갈것입니다
    앞으로도 모든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리시고 힘내시고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사세요 앞으로 추운 겨울이 다가옵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행복하세요 님께서 행복만 가득하기를 하나님께 기도드리겟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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