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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서 버림받은 영웅들/국군포로
UNITED STATES 남신우 0 379 2006-11-19 13:24:11
남한에서 버림받은 영웅들/국군포로

사모님께서 조창호 선생님이 위독하시다고, 하루 전 미리 전화를 주셔서 돌아가실 것을 예상했지만, 오늘 조창호 선생님께서 운명하셨다는 슬픈 소식을 읽었습니다. 평생 고통과 수난을 겪으시면서도 악의 세력과 싸우시다 전사하신 조중위님의 넋을 하나님께서 거두어주시기 빌며, 사모님과 유가족께 심심한 조의를 드립니다. 조선생님, 이제는 편히 쉬십시오.
2006년 11월 18일
남신우 올림

'돌아온 死者' 조창호 예비역 중위 별세 [조선일보-2006/11/19]

6·25 전쟁 당시 국군 포로로 북한에 억류됐다가 43년만에 극적으로 생환했던 ‘돌아온 사자(死者)’ 조창호(趙昌浩) 예비역 중위가 19일 오전 12시30분 별세했다.

북한에서부터 평소 규폐증을 앓아오던 조 씨는 이날 오전 생환한 지 12년만에 경기도 분당 서울대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6세. 유족으로는 부인 윤신자씨와 북에 두고 온 선일·선이 등 2남1녀가 있다.

조 씨는 최근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 북한에 남아 있던 국군포로 귀환을 위한 활동을 벌여왔었다.
(이상)

다음 글은 필자가 작년 4월 조선생님이 워싱턴에 오셨을 때, 쓴 글입니다. 선생님께 바치는 조사 대신 다시 실어 보냅니다.

남한에서 버림받은 영웅들/국군포로 (제1신)

2005년 4월 19일
오후 3시 반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으로 차를 몬다. 오늘 국군포로 두 분 조창호, 김창석(가명) 선생님들이 서울로부터 도착하신다. 이 두 분은 지옥같은 북한에서 반 세기를 고생하시다가 탈북하셔서 이제는 그들의 험난했던 70 평생을 증언하러 미국에 오시는 것이다. 지난 해 11월과 지난 2월, 서울에 들어갔을 때, 두 분을 만나 뵈었었다. 그때, 김창석 선생께서는 북한에 남겨둔 포로 동지들을 생각하며, 말씀하시다가 눈물을 흘리셨다. 늙은 동지들을 남겨두고 혼자 탈북한 죄책감 때문에 낙루하셨다.

두 분이 통관절차를 맞추고 부인들과 함께 천천히 걸어 나오신다. 조창호 선생님은 노구에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 나오신다. 지옥에서 천신만고 살아나셔서 이제 미국과 전세계에 김정일과 북한의 참상을 고발하러 태평양을 건너오신 것이다.

2005년 4월 22일
워싱턴 연방국회 건물 레이번 하우스 빌딩에서 정오시간 두 분 국군포로를 위하여 디펜스 포럼이 주최하는 오찬이 열렸다. 강연의 제목은 “지옥같은 악몽 속에서 보낸 반 세기의 삶, Half a Century in the Hellish Nightmare”이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나라들 중 여섯 나라 대사관에서 대사가 직접 참석하든지, 대사관의 무관이나 외교관들이 참석했다. 한국 대사관에서도 외교관 둘이 참석했다. 무관의 정장예복들이 찬란하다. 디펜스 포럼 오찬에 자주 참석하시는 제임스 릴리 전 주한대사도 참석했다.

조창호 선생님께서 먼저 말씀하신다.

“저는 1952년 2월 16일, 북한군 1군단에서 집단탈출 혐의로 군사재판을 받고 13년 형을 언도 받았습니다. 정치범 수용소에서 6년, 그 후 58년부터 1964년까지 일반감옥에서 13년을 복역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비인간적이며 야만적인 인간살육의 현장을 고발하려 합니다.

국방부가 확인한 숫자만 하더라도 미귀환포로 6만명중 아직도 생존포로 547명이 북한에 있다고 확인하였습니다. 나는 이 자리를 통하여 그들이 조속히 송환되도록 강력히 호소하는 바입니다…

외부세계와는 엄격히 단절되어 있으며, 세상에 알려진 바는 거의 없는 상태였습니다. 여기는 반토굴로 된 감방으로 동물원과 흡사했습니다.”

“생활용품이라곤 휴지(화장지) 한 장도 없었고, 드럼 통 하나 변기통 하나 뿐이었습니다. 취침시간이 되어도 벼개나 침구도 없으니, 수의를 입은채 그대로 얽혀 자야 했습니다. 13년 동안 단 하루도 벼개나 이불을 덮고잔 기억이 없습니다. 아침에 깨어나도 세면시설이나 목욕시설이 없으니, 3년 동안 세수나 양치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기생충과의 처절한 전쟁이 우리들의 일과였습니다. 13년 동안 양치를 못하였으니, 그 결과 40 전후에 치아를 모두 잃었습니다. 여기에 영양실조도 가세하여 수용소 내에는 각종 전염병과 질병으로 우리는 죽어갔습니다.”

“한 가지 다행한 것은 감옥이 반 지하였으므로, 우리는 얼어죽지 않고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때 같이 있었던 국군포로 5백명은 제가 13년 후 출소할 무렵 불과 50명밖에 남지 않았으며, 당시에 국군포로 장교 5명중 4명은 병사했고 살아남은 사람은 저밖에 없습니다….”

다음은 김창석 (가명) 선생님께서 일어나셨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공산군이 일으킨 한국전쟁은 대한민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판갈이 싸움이었습니다… 그런 피바다 불바다 속에서 다같이 피를 흘리며 한 전선에서 한국의 운명을 지켜주신 미국의 전우들을 수만리 대양 건너인 이곳에서 만나게 되어 고맙습니다…”

“저는 임무 수행중 중공군 놈들의 포탄에 맞아 심한 부상을 당했습니다. 포로가 된 저는 50여년 긴 세월 북한의 독재정권 아래서 고생하다가 친구들의 도움으로 조국에 돌아왔습니다….”

“1953년 8월 중순경 중공군 병원에서 이동되어 당시 평안남도 강동군 해운 광산이라는 데 포로수용소에 이관되었습니다… 신창 탄광이라는 데로 이송되었습니다… 당시 북한의 김일성은 그 값싼 노동력을 우리 국군포로들에게서 찾았다고 봅니다… 국군포로들은 안전교육도 없이 광산으로 보내졌습니다…”

“나는 국군포로로서 우리 한국정부나 국방부에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제를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불명예스럽게도 포로가 되어 북한에서 50년간 사람다운 생활도 못하고 천대와 멸시 속에서 살아오다가, 한 시 한 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는 내 조국 고향에 조상의 뼈가 묻혀있는 고향을 찾아와서 느낀 문제를 말하고 싶습니다…

우선,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고위 장관들 뿐만이 아니라, 수억만 장자들이 자기가 잘 나서 그런 높은 지위에서 일하고 또 수억만 장자가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분들이 나라의 운명을 판갈이하는 어려운 전쟁때 무엇을 하였으며 전쟁이 어떤 것인지 맛이나 본 사람들인가, 만약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몇 명이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만약 당신들의 형제나 동생 자식들이 지금까지 북한에 억류되어 있다는 것을 당신들이 알면 매일 국회에 앉아 보안법이나 폐지하자고 싸움질만 할 것입니까?

나는 고향에 돌아와서 먹는 것 입는 것 모든 생활에서 북한에서 잘 산다고 하는 북한 군당책임 비서들의 생활보다 몇 배 잘 지내고 있지만, 그렇게 흰 쌀밥을 먹다가 고기덩어리가 쓰레기 통에 들어가지만, 그 맛있는 음식도 두고온 가족들을 생각할 때, 그 쌀밥이 입 안에 들어가도 모래알을 씹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누구 덕분에 추운 겨울에 보일라를 돌리고 가스 불에 음식을 해먹고 있습니까! 우리가 후방에서 이렇게 생활하고 있는 것이 누구의 덕분입니까?

우리 정부는 생존하고 있는 국군포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사람도 이산가족 방문에 참가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국군포로들은 국민의 자식이 아니란 말입니까? 참으로 섭섭합니다.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포로들과 데리고 오지 못한 가족들을 생각하면 나는 잠이 오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도 소식 하나 듣지 못하고 있는 그 가족들, 근 반 세기에 걸쳐 남편을 기다리고 있던 부인들이 이제는 백발이 된 노인이 되지 않나! 좀 바꾸서 생각해 보십시오…”

조창호 선생님이나 김창석 선생님이나 하실 말씀들이 한도 없고 끝도 없다. 두 분의 동지들은 지금 북한에서 기아와 고령으로 돌아가시고 있다. 모두가 70대이시고 80대를 넘긴 분들도 있다한다. 그런데 남한의 김대중 노무현은 이들의 참상을 들은 척도 안 한다. 국군포로 두 분이 당신들을 초청해서 이야기를 들어준 미국 사람들에게 고맙다고 치사 하신다.

국군포로 두 분을 미국으로 초청하는데 주역을 맡으신 정박사님과 디펜스 포럼의 수잔 숄티 여사가 두 분에게 “자유의 상패, Freedom Award”를 증정한다.

오찬이 끝나고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이 링컨 기념관 바로 앞에 위치한 한국전 기념소로 옮겨갔다. 기념비에는 큰 글씨로 “자유는 공짜가 아닙니다, Freedom is not Free”란 명구가 삭여있다. 두 분 국군포로께서 군인들 동상과 시가 삭여져 있는 곳에 준비해온 화환을 올린다. 지나가던 미국인 관광객들이 걸음을 멈추고, 무슨 일인가 구경한다. 수잔 숄티 여사가 큰 목소리로 이 두 분이 누구인지, 이곳에 어떻게 오셨는지, 설명한다. 구경하던 20여명 관광객들이 갑자기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두 분이 손을 들어 답례하자 박수 소리가 더 커진다. 미국인들은 자유의 전사들을 존경하고, 자유의 전사들을 사랑하고, 자유의 전사들을 잊지 않는다.

박수 소리를 들으면서 가슴이 메어온다. 대한민국 국군포로 두 분이 어쩌다가 태평양을 건너 남의 나라에 있는 자신들의 전쟁 기념소에 와서 미국인 관광객들에게 박수를 받으며, 드디어 마음의 환향과 개선과 영광을 찾게 되었나!

2005년 5월 5일
남신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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