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의 실체에 대한 새로운주장... |
---|
김경천과 전설상 김일성장군 6번 주자 : kih191 ( 2006-11-22 07:36:02 작성, 2006-11-22 07:45:30 수정 ) 신고하기 | 이의제기 평점 : +3 (13명 평가) 나도 평가하기 김경천과 이순신, 을지문덕 그리고 김일성(김성주) 김경천은 이순신, 을지문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인이었다. 혹자, ‘김경천이 위인임은 인정한다. 그러나 이순신, 을지문덕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두 사람은 우리나라 오천년 역사에서 첫째, 둘째가는 위인들이다’라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김경천의 일기에 의하면 그는 이순신을 자신으로서는 넘볼 수 없는 하늘같은 인물로 존경했다. 이순신은 한국인뿐만이 아니라 일본인들한테도 숭배받는 위인이다. 그러나 오늘날 알려진 이순신 상은 많이 부풀려져 있는 것이다. 그 부풀려진 허상을 제거시킨다면, 그래도 역시 위대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지만, 많은 위인 가운데 한 사람이 될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순신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경향미디어 刊)》에서 상술했다. 고구려는 수나라의 백만 대군과 싸워 이겼다. 그런데 당시 고구려의 군사 정치 체제는 여러 세력의 연합체였다. 을지문덕은 최고 위치에 있기는 하였지만 알렉산더, 카이사르 같은 절대적 권한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수나라 백만 대군을 격파한 최고위 장군은 을지문덕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세력 집단의 대표자들, 여러 장군들이었다. 필자는 불원간 이를 밝히는 논서를 발표할 예정이다. 임은의 《김일성정전》은 김경천이 아니라 김일성(김성주) 관계 논서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전설상 김일성 장군은 김일성(김성주)이 아니라 김경천이라는 이영명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김경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한 두 페이지이지만 김경천 연구에 귀중한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임은이 김경천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해 작성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이 김경천과 같이 생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한 것이라 그런지 감동적이다. 그때까지는 아직 그 사람들이 생존했던 것 같다. “‘전설 속 김일성’은 김경천일 수가 없으며 김일성(김성주)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김경천은 비록 ‘전설 속 김일성’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위대한 애국자였다. 그런 위대한 애국자를 김일성 따위와 대비시키거나 김일성의 대용 인물로 이용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그분에 대한 모독이며 불순한 행위이다.” 전성기 때, 김경천은 빨치산 부대장인데도 사방 천리를 관할하고 삼천여명을 이끈 반면에 김일성은 산속 몇 개 마을을 관할하고 삼백여 명을 이끌었다. 김경천 시대 일본군은 수십만 명이었는데 김일성 시대에는 수백만 명이었으니 두 사람 간의 차이가 백배라고 할 수도 있다. 김경천과 김일성(김성주)을 동일 범주로 다룸으로 인해 임은한테 욕을 먹게 된다면 변명받을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김경천 전설 본서는 주로 재소 한국인들의 기록물에 의존해 집필되었다. 그런데 사실 그 기록물에서 김경천을 찬미하는 구절을 발견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김경천은 위대한 인물인데 어째서 그러한가. 김경천은 숙청당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소련당국은 1959년 그를 복권시켜주었지만 형식적인 것일 뿐으로 그의 가족에게는 아무런 연금도 내려 주지 않았다. 소련사회는 자유세계의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무시무시한 사회이다. 재소 독립운동가인 박정훈은 숙청당한 것이 아니라 자연사한 공산주의자인 이동휘의 장례식에 참석했다는 죄목으로 해서 총살당했다. 그에게 그 외에 어떤 뚜렷한 죄목이 없었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사회에서 숙청당한 비공산주의자인 김경천을 담담하게 묘사할 수는 있어도, 찬미하는 구절을 사용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김경천 전기는 한권 분량의 책이 되려면 담담한 묘사로는 안 되고 찬미하는 내용이 되어야만 한다. 김마트웨이는 자신의 저서 《1918년부터 1921년 사이 소비에트 정권을 위한 전쟁에서의 한국인 국제주의자들》이라는 책에서 김경천의 전기를 몇 십 페이지 분량으로 수록했다. 소련사회의 김경천 전기로서는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썼다고 할 수가 있다. 김마트웨이는 김경천의 가족들에게, 그에게 바쳐지는 두번째의 책을 써 발간하려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들은 그가 늙어서였는지(당시 김마트웨이의 나이 육십팔 세였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는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마트웨이가 자신의 저서 《…한국인 국제주의자들》에서 김경천에 대해 써야할 것은 모두 썼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런데 또 쓸 것이 있다고, 김경천 전기는 몇 십 페이지로는 절대 부족하다고 한 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만일 본서 같은 찬미 서적이 되지 않는다면 더 쓸 것이 없을 것 같은데도, 한 권의 분량으로는 도저히 될 수가 없을 것 같은데도 말이다. 소련 지도에 ‘빨치산스크’라는 지명이 나온다. 원래 지명은 ‘수청’이었는데 소련당국이 극동해방전쟁후 그곳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빨치산들의 본거지였음을 기리어 중국식 이름 ‘수청’을 버리고 ‘빨치산스크’로 개명한 것이라고 한다. 김경천이 사방 천리를 관할한 지역이 바로 ‘수청 ― 빨치산스크’였다. 이곳은 다른 어떤 빨치산 부대보다 김경천 부대가 맹활약한 지역, 김경천 부대의 본거지가 있는 지역이었다. 러시아인도, 중국인도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면 그의 허가증을 소지해야만 했다. 소련당국에서 ‘수청’ 이름을 (비록 ‘김경천’ 세 글자는 넣지 않았지만) 빨치산들의 본거지였음을 기리어 ‘빨치산스크’로 바꾸어서 지도에 표기했다. 김경천과 ‘전설 김일성’ 김경천이 김일성이라는 별호를 사용했으며 바로 ‘전설 김일성’ 그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연구가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김경천은 ‘전설 김일성’의 모델임에는 확실하지만 ‘김일성’이라는 별호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가 ‘김일성’으로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에 새겨지게 된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 검토해보기로 하자. 기존의 ‘전설 김일성 연구서’에서 김경천, 김일성(김성주) 외에도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있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들 외에도 일제 시대의 신문과 경찰관계 기록에 ‘김일성’ 이름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당시 ‘김일성’ 이름은 ‘갑돌이’처럼 흔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 단어에는 ‘태양, 태양 같은 별, 성공, 스타’ 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김일성’ 이름이 아주 흔했고 더하여 똑똑한 사람은 ‘김일성’이란 별명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김경천은 국내외에 ‘김장군’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백두산에는 ‘김일성 전설’이 벌써 생성되어 있었다. 김창희라는 독립운동가가 ‘김일성’이라는 별호를 사용했는데 신출귀몰해 도적들도 ‘김일성’이라고 자칭했다고 한다. 그런 연고로 해서 ‘김장군’이 백두산에서는 ‘김일성’이 되었을 수가 있다. 북간도는 연해주와 붙어 있는 지역이라 연해주에서 일어난 사건은 직접, 입을 통해 북간도로 전해졌다. 김경천은 연해주 수청에서 마적들을 근절시켜 ‘김장군’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마적들에게 시달리고 있는 북간도 동포들은 당연히 김경천을 ‘스타’로 여기게 되었을 것이다. 만일 이곳 동포들이 마적들에게 시달리지만 않는다면 이곳이 한반도보다 살기가 더 좋은 면도 있는 시대였다. 김경천이 수청 지방에서 마적들의 그림자도 볼 수 없게끔 만들었다는 사실은 북간도 동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김경천은 이만전쟁으로 해서 자신의 명성을 동경, 모스크바에까지 떨쳤다. 북간도 교포들에게 이미 스타가 되어 있었으므로 이제 그냥 별(스타)이 아니라 태양 같은 별이 되었을 것이다. ‘별(스타) 김장군’이 ‘태양 같은 별(일성 日星) 김장군’으로, ‘김일성장군’으로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북간도의 ‘전설 김일성’의 원형은 김경천임이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들이 ‘김일성’ 이름을 ‘스타’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시대라 ‘김장군’이 ‘김일성’이 된 지역은 백두산과 북간도 외에 또 있었을 것이다.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에 김경천이 ‘김장군’과 ‘김일성’으로 함께 새겨지게 되었을 것이다. 단지, 김일성(김성주)에 의해 촉발하게 되어 ‘김일성’만 표출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신고 0명
게시물신고
|